142화 #26 – 넘치는 보답 (4)
나는 눈을 뒤집으며 고개를 가로저었고.
최서빈은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의자에 몸을 푸욱 기대며 말했다.
“이야, 내가 살다 살다 남자 배우랑 스캔들이 터지네.”
그의 말에 차 안은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다.
“하하, 둘이 얼마나 재미있게 놀다 온 거야.”
운전석에 있던 배 실장은 깔깔대며 웃음을 터트렸고.
나 역시 그제야 실소를 터트렸다.
“선배님, 저희 호주에서 너무 안 가리고 다녔던 걸까요?”
“그러게. 아니, 어디서 다들 본 거지?”
우리는 서둘러 각자 휴대 전화를 집어 들고 기사와 SNS를 찾아보았고.
오래 걸리지 않아, 우리의 여행 사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선배님… 저희 완전 커플인데요?”
기사에 뜬 사진 하나를 최서빈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최서빈은 눈이 감길 정도로 쓰러질 듯 웃으며 답했다.
“그래, 우리 이날 누가 봐도 동성 커플 같긴 했지?”
호주에 도착했던 첫날.
우리는 우연찮게 커플 티를 입은 듯, 같은 색상의 옷을 입었고.
그날 나란히 앉아 맥주를 부딪치던 그 순간을 누군가가 포착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사진을 두 손가락으로 확대하며 말했다.
“선배님, 저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으신데요?”
“이 자식이. 너도 마찬가지네. 사진 속 네 눈을 봐. 아주 나를 사랑하는 사람처럼 찍혔잖아.”
“저야, 호주에 빠졌던 눈빛인데….”
우리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스캔들 기사를 살폈다.
그러던 최서빈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근데 기사가 생각보다 많이 난다?”
그의 말에 인터넷 새로 고침을 누르자 연달아 기사들이 쏟아졌고.
기사들은 온통 우리 둘의 사랑 이야기로 가득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거… 진짜 믿는 거 아니겠죠?”
도를 넘어선 기사 제목들.
그 밑으로 달린 선 넘는 댓글들.
최서빈은 한참 기사를 바라보다 결국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희성아, 우리 사이가 좋긴 한가 봐. 호주에서 찍힌 사진들 봤어?”
“네, 봤죠.”
“이렇게 지나가는 사람이 찍었는데도 다정해 보이기는 하네.”
“그래도… 선배님.”
나는 한숨을 참아내며 그를 불렀고.
“응?”
“제 배우 인생에 첫 스캔들이… 선배님과의 열애설이라니요….”
내 말에 최서빈과 운전을 하던 배 실장까지 웃음을 터트렸고.
최서빈은 그제야 대처 방안을 떠올렸다.
“그럼 우리 해명이나 하자.”
그러고는 운전석에 있는 배 실장에게로 몸을 다가가 말했다.
“형, 이거 굳이 회사에서 입장 발표할 것까지는 없잖아. 내가 SNS에 올려도 되지?”
최서빈의 말에 배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냥 해프닝인데, 뭐. 혹시 심각해지면 회사에서 대처할게.”
배 실장은 룸 미러로 나와 최서빈을 번갈아 보며 음흉한 눈빛을 지었다.
“근데… 혹시 둘이 진짜 그런 건 아니지?”
그의 말에 나와 최서빈은 동시에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아, 형!”
“헐, 실장님!”
최서빈과 내 호통에 배 실장이 웃으며 손을 뻗었다.
“하하, 미안. 얼른 SNS에 올려.”
“알겠어.”
최서빈은 휴대 전화에 카메라를 클릭해, 자신의 얼굴과 함께 나를 비췄다.
“희성아, 사진 찍자.”
“네, 선배님.”
우리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사진을 찍었고.
곧장 최서빈은 자신의 SNS에 방금 찍은 사진과 함께 글을 게시했다.
-안녕하세요, 최서빈입니다.
오늘 아주 황당한 기사들을 보고, 넘어갈까 하다가 이렇게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이번 ‘블랙맨’ 작품 이전부터….
.
.
.
그렇게 진희성 배우와 함께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기자분들께서 실망하셨을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생각하시는 그런 남남 커플이 아닙니다ㅎㅎ.
재미있게 여행하고 왔고, 앞으로도 좋은 작품에서 찾아뵙겠습니다.
아, 참고로 저는 여자를 좋아합니다!!
최서빈의 글이 SNS에 게시되자, 나는 곧장 그의 게시물에 들어가 ‘좋아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순식간에 달리는 댓글들.
-꺄! 오빠들 커플이 아니었다니ㅠㅠ.
-ㅋㅋ이런 해프닝도 있네요. 두 분의 사랑… 아니, 우정 응원합니다!
-내 최애 배우 둘의 사랑이라면, 응원할 수 있었는데ㅋㅋ 여자를 좋아하신다니, 그럼 저 줄 서도 되는 거죠, 오빠?
-그냥 둘이 사귀어도 될 것 같은데?ㅋㅋ 오빠들이라면 제가 찬성합니다!
-기자님덜,, 우리 오빠들 엮지 마요. 오빠들 평생 동안 작품에서 케미 보여줘야 해요ㅠㅠ.
-아… 이 브로맨스 응원한 사람 넘치는데, 거짓 기사였다니. 아쉬워!
-서빈 오빠, 죄송한데 줄 서주세요. 제가 희성 오빠한테 먼저 줄 섰다, 이 말입니다.
최서빈과 나는 각자 휴대 전화로 댓글을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고.
최서빈이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희성아, 어떡하냐?”
“네?”
“우리 그냥 사귀라는데?”
내 눈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씨익 올리는 최서빈을 보고.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답했다.
“선배님, 안 됩니다. 금단의 사랑입니다!”
최서빈은 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썹을 들썩이며 계속해서 장난을 걸었다.
“왜, 우리는 이뤄질 수 없는 건가?”
“아, 선배님!”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차 안.
어느새 스캔들은 잊은 지 오래였다.
한참 휴대 전화를 하던 최서빈은 지루했는지 휴대 전화를 내려놓은 뒤, 내게 물었다.
“희성아.”
“네?”
“그나저나 너는 진짜 연애는 안 해?”
“…….”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내게는 그저 꿈을 이루기 위해 달리기에 급급했으니까.
지금 하고 있는 연기, 그리고 다음 작품.
드라마의 시청률과 영화의 관객 수에 집중하기에도 정신이 없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그랬다.
조금 전 터졌던 기사처럼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당연히 여자를 좋아하지만.
그렇게 여자를 바라보며 일에도 집중할 만큼 내가 여유롭지는 못했던 것이지.
내가 대답을 망설이자, 최서빈이 재차 입을 열었다.
“설마… 너 나 좋아하는 거 아니지?”
그의 농담에 나는 실소를 터트렸다.
“그래도 됩니까?”
최서빈에게 농담을 받아치자, 그는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징그러워, 인마.”
“하하, 연애… 그동안 연기만 하느라 바빴던 것 같습니다. 누구를 좋아하고,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고요.”
최서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야, 전쟁 통에서도 사랑한다는데, 뭐가 그렇게 바빠.”
“아시잖아요. 저 막 얼굴 알리기 시작한 뒤로, 계속 작품 했던 거.”
“그랬긴 하지. 그래도 작품 속에서 다들 만나고 하는 거야. 바빠도 젊을 때, 사랑 많이 해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고.
최서빈은 쓰읍, 소리를 내며 내게 물었다.
“그동안 작품 몇 개 했잖아. 같이했던 배우 중에는 없었어?”
“네, 제가 신인이라 어디 그럴 정신이 있나요. NG 안 내고 연습하기에 바빠서, 한눈팔 새가 없었죠.”
“에이, 연기도 잘하면서 겸손은.”
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고.
“배우가 아니어도 좋아하는 사람도 없었고요.”
내 말에 최서빈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내가 한 명 소개시켜 줄까?”
“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그는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업계 사람도 많고, 일반인도 있고. 그래도 내가 이 바닥 생활이 몇 년인데, 말만 해.”
나는 그의 말에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말씀은 감사한데, 괜찮습니다.”
“왜, 그래도 연애도 좀 하고 그래.”
“하하, 차차 해 보겠습니다. 혹시 소개받고 싶으면, 선배님께 꼭 말씀드릴게요.”
그는 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 나 그만 좋아하고, 연애 좀 해.”
“예, 알겠습니다. 하하하.”
최서빈은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대었고.
달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 이번에 출연료 받았어?”
“맞습니다. 호주에 가기 전에 들어왔어요.”
그는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그때 들어왔다. 블랙맨에서 꽤 들어가지 않았어?”
“네, 엄청 잘 챙겨 주셨더라고요.”
최서빈이 흐뭇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희성이 너 블랙맨 전에 드라마도 했잖아.”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말을 이어갔다.
“통장 가득 찼을 텐데, 계획은 세웠어?”
최서빈의 말에 나는 턱을 어루만지며 한참을 고민했다.
사실 통장에 돈이 꽂히자마자 이 고민은 시작됐다.
출연료 정산을 처음 받아본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큰돈이 들어온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래서 이 큰돈으로 뭘 해야 좋을까, 생각했고.
아직 확정한 것은 아니지만, 가장 적합한 것은 집이라고 판단했다.
“이사나 갈까 합니다. 결정한 건 아닌데, 아직 생각 중이에요.”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얼마 전에 이사 간 거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 생각보다 이번에 정산된 액수가 커서, 어영부영 쓰느니 이참에 아파트로 내 집 마련을 해볼까 해서요.”
최서빈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몸을 내 쪽으로 돌렸다.
“그래, 가능하면 내 집 마련해두는 게 좋지.”
“네, 아직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럼 지역은 어디로 할 건데?”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그것까지는 생각 못 해봤습니다.”
최서빈은 손뼉을 부딪쳤고.
“잘됐다. 그럼 우리 동네로 오는 거 어때?”
“선배님 집, 왕십리 아닙니까?”
그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답했다.
“어, 왕십리에 괜찮은 아파트 많아. 근처에 살면 같이 술 한잔하기도 좋고, 집에도 왔다 갔다 하고.”
최서빈의 눈이 반짝였고.
나 역시 그와 같은 동네에 사는 것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최서빈과의 교류가 많아지는 요즘, 그와 동네 친구가 되는 게 내게 해가 될 리 없으니까.
“…그럴까요?”
***
“네?”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고.
내 앞에 서 있는 부동산 중개인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이 집이 뷰도 좋고, 아주 넓게 빠졌어요. 그래서 금액이 비싸.”
“아… 네, 집 좋네요.”
최서빈은 자신이 아는 부동산 지인을 내게 소개해줬고.
그로 인해 여러 집을 구경했지만, 집값은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서울 집값… 내 집 마련이라는 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네.’
그녀는 내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럼 생각해 보시고, 연락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부동산에서 나와 집으로 향하는 길.
나는 몇 시간 동안 봤던 집을 떠올리며 발길을 옮겼다.
오랜 기간은 아니지만, 그동안 배우 생활을 하며 모은 돈.
작품에 출연했던 출연료와 회사에서 받은 계약금.
거기에 광고료까지 모두 합쳐도 빚 없이 내 집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대출은 꿈도 꾸지 못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얼굴이 알려진 프리랜서 배우가 되었기에, 대출은 가능해졌다.
대출이 되는 배우가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했지만.
그 기쁨도 잠시.
대출을 받고, 거기에 지금까지 모은 돈을 모두 올인해야 이 집을 살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물론 이렇게 하면 내가 원하는 집으로 내 집 마련은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직업의 특성상 수입이 일정치가 않기에.
통장의 모든 돈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게, 부담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지.
또다시 깊은 고민에 빠졌고.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면 이번에는 집을 포기하고… 좋은 차나 한 대 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