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38)화 (138/303)

138화 #25 – 누군가에게는 위기, 누군가에게는 기회 (7)

“컷, 오케이!”

차 감독의 목소리가 현장에 울려 퍼졌고.

그 목소리와 동시에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커다란 주문 제작 케이크를 가지고 달려왔다.

“고생하셨습니다.”

짝짝짝-.

울려 퍼지는 수십 명의 스태프와 배우의 박수 소리.

그리고 그 가운데로 다가오는 3단으로 쌓아올려진 커다란 케이크.

진한 네이비블루의 크림으로 뒤덮인 가운데, 노란색 글씨로 ‘블랙맨 안녕’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고깔모자를 들고 온 배우는 차 감독에게 다가가 머리에 덥석 씌웠고.

평소와는 달리 호탕하게 웃으며 모자를 겸허히 받아들인 차 감독의 모습에 현장의 모든 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감독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야. 우리 많은 스태프들, 배우들이 고생했지.”

“어서 촛불 부세요, 감독님.”

케이크는 차 감독의 앞에 다가왔고.

“후우….”

그의 입김에 여러 개의 초.

그 위에 일렁이던 불이 온전히 꺼졌다.

짝짝짝-.

동시에 현장에는 다시 한번 박수 소리가 가득 메워졌고.

우리는 차 감독을 필두로 사진 대형으로 자리를 잡았다.

“서빈 씨랑 희성 씨, 얼른 이 앞으로 와.”

차 감독은 끝에 서 있던 최서빈과 나를 급히 불렀고.

“네.”

그의 부름에 우리는 차 감독의 양쪽에 한 명씩 자리를 잡았다.

“자, 그럼 찍습니다. 하나, 둘….”

찰칵-.

다사다난했던 드라마 블랙맨.

어느새 드라마는 16화 최종 촬영을 마무리했고.

유독 힘들었던 환경과 촬영이었기에, 눈물을 훔치는 스태프들과 배우가 많았다.

“우리 진짜 고생 많았다.”

초창기부터 있지는 않았지만.

나 또한 이들과 다를 것이 없는 마음이었다.

특히나 잘나가던 블랙맨이 바닥을 치는 시점에 들어왔기에.

어쩌면 이들보다 마음고생이 심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마음을 모두가 아는지, 차 감독이 내게 손짓을 하며 입을 열었다.

“우리 희성이가 제일 고생이 많았지. 물론 다른 배우들도 고생 많았지만, 희성이는 6화부터 급하게 생방송처럼 쉬지도 않고 촬영했잖아.”

그의 말에 나는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아닙니다, 감독님. 다들 고생 많으셨죠.”

옆에 있던 조감독이 차 감독의 말에 공감하며 답했다.

“그래, 희성 씨가 연기하랴, 시청률까지 걱정하랴, 제일 힘들었지.”

그들의 말에 덧붙이듯 최서빈과 스태프들도 말을 이어갔다.

“엎어질 뻔한 드라마에 희성이가 나타나서, 이렇게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던 것 같다. 정말 수고했다, 희성아.”

“맞아요. 희성 씨 덕분에 서빈 씨랑 케미도 돋보이고, 저희 동 시간대 1위도 찍었잖아요.”

동 시간대 1위를 탈환하는 데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내가 들어오고 6화부터 시청률이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다시금 8화부터 천천히 시청률이 올랐고.

그러다 13화로 접어들면서 동 시간대 1위를 당당히 차지했다.

거의 생방송처럼 달리다보니, 오늘 찍은 신은 16화였지만.

바로 내일 15화가 방영될 예정이다.

우리는 점점 상승하는 시청률에 15화, 마지막 화인 16화까지 기대를 가지며 기다리고 있었지.

“이대로 가면 우리 마지막 회 시청률 진짜 대박 나는 거 아닙니까?”

조감독의 말에 차 감독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답했다.

“이미 동 시간대 1위를 찍었으니 됐지. 20%도 넘었고, 욕심 좀 부리자면… 23%로 마무리했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하.”

소망을 이야기하는 차 감독의 입가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보였고.

나는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희 열심히 찍었으니까, 꼭 그럴 겁니다. 감독님.”

내 말에 차 감독이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이고, 우리 희성이가 그렇다면, 진짜 그럴 것 같은데? 하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현장은 기나긴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

팟-!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휴대 전화였다.

인터넷에 들어가 서둘러 마지막 16화의 시청률을 확인하기 위함이었지만.

인터넷까지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이미 휴대 전화에 가득 쌓인 메시지.

‘블랙맨’의 단체 톡방에는 나보다 일찍 일어난 차 감독과 몇몇 배우들이 시청률에 대해 떠들고 있었으니까.

눈을 뜬 지 몇 초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시청률 생각에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었고.

그때.

지이잉.

[발신인: 김지훈 실장]

“여보세요?”

-희성아, 일어났어?

김 실장은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내게 물었고.

“응, 왜 이렇게 일찍 전화했어?”

-희성아, 시청률 대박 터졌어!

그의 말에 나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몇 퍼센튼데?”

-어제 마지막 회 24.9% 나왔어.

“미친…!”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그 퍼센트에 소리를 질렀고.

김 실장 역시 목소리에 데시벨을 높였다.

-올해 미니시리즈 중 탑3 안에 들어가는 시청률이야.

“와아, 진짜 대박이다.”

-고생 많았다, 희성아.

“형도 고생 많았지. 고마워.”

-진짜 시청률이 이렇게 많이 나올 줄이야.

“그러게. 그래서 아침부터 드라마 단톡방이 난리였나 보네.”

김 실장이 진지한 목소리로 급히 나를 불렀다.

-희성아.

“응, 형.”

-그때 대타하지 말자고 했던 거, 괜히 미안하네. 네가 옳았다.

“미안하긴, 형은 날 생각해서 한 말이었잖아. 결과가 좋아서 다행인 거지.”

-뭐, 결과가 좋은 건 네가 열심히 한 거니까. 아무튼, 역시 네 안목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하하,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오늘 저녁에 회식 있는 거 알지?

“응.”

-이따가 시간 맞춰서 데리러 갈게. 이따 보자.

***

회식 장소 앞에 멈춰 선 차.

시간을 확인하고 서둘러 차에서 내렸고.

문을 열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허리를 접으며 들어갔고.

“아이고, 우리 블랙맨의 주인공 오셨다!”

차 감독은 지금까지 봤던 얼굴 중 가장 밝은 얼굴로 내게 소리쳤다.

“하하, 오셨습니까, 감독님?”

“이야, 우리 드라마의 주역 아니야. 얼른 와.”

그는 높은 시청률로 마무리된 드라마 덕에 기분이 업되어 있어 보였고.

나를 두 손으로 이끌며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 있는 최서빈은 차 감독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희성아, 왔어?”

“네, 선배님. 오셨습니까?”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답했다.

“감독님, 지금 기분 최고조야. 이렇게 신나신 거 처음 봐.”

차 감독은 나를 앉힌 뒤, 다시 일어나 들어오는 배우들을 맞이하고 있었고.

나는 그를 흘긋 바라보며 최서빈에게 말했다.

“예, 그러신 것 같습니다. 하하.”

“감독님이 말했던 것보다 시청률 높게 마무리됐잖아.”

최서빈이 차 감독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잠시 뒤.

모든 이들이 자리에 모였고.

차 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자, 우리 이렇게 성공적인 마무리를 지었는데, 거국적으로 건배 한번 할까요?”

“네.”

그의 말에 우리는 합창하듯 외쳤고.

차 감독이 흐뭇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우리 드라마 블랙맨, 모두 애쓰셨고 올 한 해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따뜻한 연말 보내봅시다. 파이팅!”

“파이팅!”

그렇게 차 감독을 필두로 우리는 차가운 술을 식도로 넘겼다.

이에 질세라 그는 곧장 술잔을 채우며 재차 소리쳤다.

“그리고 한번 주춤했던 블랙맨을 다시 일으켜서 이렇게 성공할 수 있게 만들어준, 진희성 배우를 위해서도 한잔할까요?”

그의 말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고.

앞에 앉은 최서빈이 대신 소리쳤다.

“좋습니다.”

“하하, 그럼 잔들 채우시고….”

차 감독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않은 채, 연이어 술잔을 한껏 높이 들었다.

“우리 희성 배우 덕에 블랙맨이 탈 없이 마무리 지을 수 있었던 거 다들 아시죠?”

“그럼요.”

“네!”

곳곳에서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나를 바라보며 답했고.

차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눈을 보고 외쳤다.

“진희성 배우를 위하여!”

“위하여.”

연이어 털어 부은 술잔.

차디찬 겨울.

그 탓에 일찍 어두워진 바깥과는 달리, 회식 장소 이곳은 연신 밝은 기운을 뿜어냈다.

차 감독은 호탕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고.

나와 최서빈의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우리 주연 배우들, 너무 고생 많았다.”

“아닙니다. 감독님이 가장 고생하셨죠.”

차 감독이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 희성이.”

“네, 감독님.”

그는 회식 시작부터 거나하게 마신 술에, 살짝 볼이 발그레해져 있었고.

입술을 잘근 깨물며 말했다.

“진짜 고맙다.”

“아닙니다. 제가 감사하죠.”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솔직히 그 상황에 오겠다는 배우가 누가 있겠어. 근데 네가 와줘서 진짜 한 줄기의 빛이 내려오는 것 같았다.”

차 감독이 홀로 술을 홀짝홀짝 들이켜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언제든, 당장이든 나중에든. 도울 일이 있으면, 뭐가 됐건 간에 도울게.”

“감사합니다, 감독님.”

“정말이야.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진짜 고마워서 그래.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고.”

“알겠습니다.”

우리의 대화를 듣던 최서빈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야, 차 감독님이 누구 부탁 들어주고 그러실 분이 아닌데?”

“맞지. 내가 다른 사람 부탁은 안 들어도, 희성이 부탁은 들어주려고. 하하.”

나를 바라보는 차 감독의 눈에는 애정 어린 눈빛이 쏟아졌고.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앞으로도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감독님. 제 술 한 잔 받으시죠.”

“좋지.”

***

어느새 달력은 11월을 가리켰고.

느지막이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무에는 잎사귀 하나 남아 있지 않았고, 사람들은 추위로 인해 옷을 꽁꽁 싸매고 있는 모습이었다.

얼마 만에 찾아온 여유인지.

커피 한 잔을 내려 밖의 사람들과 수많은 차를 바라보며 자리에 앉았다.

“좋다.”

아무런 연락도, 스케줄도 없는 오늘.

‘상간녀의 유혹’을 끝마치고 여유를 부리려고 할 때쯤 시작한 ‘블랙맨’.

쉴 새 없이 달려온 하반기가 끝이 나고 있었다.

“하아… 진짜 고생 많았다.”

나 스스로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충분히 그럴 만했지.

WG 엔터로 들어가면서부터 단 한 번도 일을 쉰 적이 없었다.

물론 작품이 하나 끝이 나면 짧게는 쉬었지만.

그 기간이 한 달이 넘었던 적은 없었다.

잠을 자지 못하면서 일했던 만큼.

그 한 달 사이에 못 잤던 잠을 몰아 잔 느낌.

엄청난 일정과 강행군을 펼치고 나니.

이 짧은 휴식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밤에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는 일상이 내게는 일상이 아니었으니까.

“이제 나도 좀 쉬고 싶다.”

팔을 쭈욱 뻗어 기지개를 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루 정도는 늘어져도 괜찮잖아?”

그러고는 다시금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온몸을 던졌다.

다시 잠에 들지는 않았지만, 침대 위를 뒹굴며 게으름을 피우고 싶었다.

평소 하지 못했던 것들이니까.

“쉬는 동안 뭘 해야 잘했다고 소문이 날까?”

나는 휴대 전화를 집어 들고 메모장을 열었다.

그리고 몇 주, 아니 몇 달은 쉬지 못했던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여행?”

글자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고.

너무 오랫동안 쉬지 못했던 탓에, 마치 일중독이 된 것처럼.

어떤 일을 하며 쉬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고.

텅 빈 메모장을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냥 푹 쉬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거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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