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36)화 (136/303)

136화 #25 – 누군가에게는 위기, 누군가에게는 기회 (5)

뜬눈으로 지새운 밤.

블랙맨 대본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을 읽으며 아침을 맞이했다.

내가 하겠다고 한 대타 자리.

무조건 임하준보다 훨씬 잘해내야 했으니까.

잠시 뒤, 현장에 도착했고.

그 어느 때보다 떨리는 마음으로 심호흡을 하며 가다듬었다.

그 모습이 김 실장의 눈에 들어왔는지,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희성아, 잘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김 실장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럼. 걱정 안 해. 연습 많이 했잖아.”

“연기에 대해서는 걱정할 게 하나도 없어. 그냥 늘 하던 대로만 하면 돼.”

“고마워, 형.”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서 내렸고.

서둘러 차 감독과 스태프들에게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우렁찬 목소리가 현장에 울려 퍼졌고.

차 감독은 내게로 다가오며 인사를 받았다.

“희성 씨, 왔어?”

“네, 오늘 열심히 촬영하겠습니다.”

“그래, 우리 지금 몇 주 방송이 안 됐잖아. 그래서 촬영이 앞으로 많을 거야. 얼른 적응해서 빠르게 촬영해 봅시다.”

“예, 빠르게 적응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요.”

차 감독은 짧은 인사를 끝으로 현장으로 걸어갔고.

나는 이어 처음 보는 스태프들을 향해 허리를 접으며, 현장을 돌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몇십 분간 이어진 인사.

그리고 느껴지는 분위기는 밝은 인사와는 사뭇 달랐다.

차갑고 싸늘한 현장 분위기.

물론 내가 투입되어 나빠진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임하준이 구속으로 빠지게 되면서 몇 주간 결방이 된 드라마였고.

더불어 임하준이 찍은 몇 회차의 촬영분까지 날린 것.

그 촬영분을 다시 찍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번거로움과 불편함으로 스태프들은 의욕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재촬영도 귀찮았을 테지만.

그보다도, 높아지고 있던 시청률에 브레이크가 걸렸다는 생각에 침울한 듯 보였다.

대타로 어떤 배우가 오든 간에, 시청률이 주춤할 것은 당연했으니까.

나 역시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그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나는 애써 더욱 밝은 얼굴로 현장을 비췄다.

그때.

내게로 다가와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는 사람.

“희성아!”

최서빈이었다.

“선배님, 오셨습니까?”

그는 빠르게 주변을 쓰윽 훑으며, 곧바로 분위기를 파악한 듯 보였다.

“어, 일찍 왔네?”

“예, 첫 촬영이니까, 더 일찍 오려고 했습니다. 하하.”

“잘했네.”

최서빈은 쓰읍, 소리를 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침울한 현장 분위기가 신경 쓰이는 모양.

더불어 내가 기 죽을세라 걱정되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가 한껏 늘어진 눈썹으로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희성이가 오니까, 훨씬 좋다.”

“네?”

“나 너 있으면, 연기 진짜 잘 되잖아.”

최서빈은 스태프와 배우들이 모두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차 감독님!”

“어, 서빈 씨 왔어?”

“네, 차 감독님. 오늘부터 우리 촬영 일찍 끝나겠는데요?”

최서빈의 너스레에 차 감독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바라보았고.

그는 밝게 웃으며 차 감독을 향해 말했다.

“제가 뭐 원래도 연기를 잘하기는 하지만. 희성이랑 연기하면, 그 시너지가 장난이 아니거든요. 하하!”

최서빈의 말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미소를 지었고.

“희성이도 한 연기하는 배우라, 금방 찍을 겁니다. 하하.”

그는 고개를 돌려 스태프들을 향해 외쳤다.

“우리, 지금까지 방영된 6화보다 더 잘될 겁니다. 제가 확신할게요. 진희성 배우 연기력은 제가 보장하거든요.”

최서빈은 내 어깨에 손을 올렸고.

그의 말이 끝나자 차 감독이 활기를 불어넣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블랙맨, 다시 힘차게 출발해 봅시다. 한번 주춤했으니까, 그걸 발돋움해서 더 높이 뛰어야죠?”

차 감독의 말에 최서빈이 손뼉을 부딪쳤고.

그것을 시작으로 현장에 있는 모두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짝짝짝-.

“맞아요. 저희 힘내봅시다!”

“파이팅!”

곳곳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고.

그렇게 밝아진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7화 첫 장면 촬영 준비에 들어갔다.

***

“컷, 오케이!”

차 감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허리를 접어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보낸 뒤.

현장을 빠져나왔다.

“하암….”

곳곳에서는 입을 쩌억 벌리고 하품을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고된 촬영으로 잠을 편하게 못 잔 지는 꽤 된 편이었다.

몇 주간의 결방으로 인해, 빠르게 촬영해 7화를 내보내야 했다.

그래서 촬영은 밤낮없이 이루어졌고.

배우, 스태프 할 것 없이 밤을 새우는 건 당연지사였지.

다들 겨우 힘을 내며 촬영에 임했지만.

나만 그들과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피곤함은커녕 가슴을 졸이며 아침을 기다렸다.

몇 시간 전.

‘블랙맨’의 7화가 방영되었다.

그리고 조금 지나면 그 7화의 시청률이 올라오겠지.

물론 차 감독, 최서빈, 그리고 많은 관계자들이 그 7화의 시청률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있겠지만.

나만큼 떨리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임하준의 대타.

잘나가다 삐끗한 드라마에 들어온 진희성.

여러 수식어가 나를 향했기에, 그 중심에 있는 나로서는 시청률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최대한 그 시청률에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막상 시청률을 확인하려니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것은 쉽게 컨트롤이 되지 않았다.

차에 올라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숨을 몰아쉬자, 김 실장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희성아, 이제 아침까지 촬영 없으니까 눈 좀 붙여.”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잠이 안 오네.”

김 실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눈도 빨간데, 잠이 안 오기는……. 시청률이 그렇게 걱정돼?”

그의 말에 나는 입술을 말아 넣은 채 한숨을 삼켜냈다.

“뭐… 당연히 떨어질 거라고 예상은 하는데, 그래도 걱정이 되기는 하네.”

“괜찮아. 드라마 자체가 방영을 멈췄다가 재개한 건데, 떨어질 수밖에 없어. 네 탓 절대 아니니까, 괜히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알지. 그래도 어차피 떨어질 시청률, 얼마 차이 안 났으면 하는 거지.”

김 실장은 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까 촬영할 때 7화 봤는데, 실시간 반응도 괜찮았어.”

“다행이네.”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시청률 뜨면, 깨울 테니까 조금이라도 자. 아침 일찍부터 촬영 있잖아.”

“그럴게.”

깜깜한 어둠 속.

해가 뜨기 직전 가장 어두울 시점.

나는 내일, 아니 몇 시간 뒤에 시작할 촬영에 겨우 눈을 붙였다.

너무 피곤한 상태라 금세 잠들었다.

하지만 그 잠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아무리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해도 걱정이 되는 마음에 번뜩 눈이 떠졌고.

마침 김 실장은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나는 서둘러 휴대 전화를 열어 ‘블랙맨’을 검색했다.

빠른 인터넷 속도에도 그 찰나의 순간.

입 안이 바짝 말라갔고, 심장은 미칠 듯이 뛰기 시작했다.

“하아… 제발.”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화면을 가득 메운 시청률.

입술을 잘근 깨물며 그 숫자를 확인했다.

내가 투입되기 전.

그러니까 임하준이 나온 마지막 회인 6화.

그 6화의 시청률은 17.1%였었다.

17.1%보다 낮을 거라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최대한 조금 떨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바랐던 것뿐이지.

그리고 내 앞에 뜬 숫자는….

역시나.

17.1%에서 3%가 낮아진 14%였다.

그 숫자에 나는 아무 말 없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

예상을 안 했던 것도 아닌데.

14%라는 숫자는 심장에 깊게 꽂혔고.

숫자에 연연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게 마음먹은 대로 쉽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오늘 8화 방영되면, 조금 오르겠지. 천천히 가면 되니까….”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마음을 다잡았고.

아직 촬영 시간은 멀었지만, 촬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다음 날 아침.

오늘 역시 눈을 뜨자마자 확인한 것은 시청률이었다.

7화의 시청률은 14%.

그리고 어제저녁 방영한 8화의 시청률은 그보다 낫지 않을까, 라는 조바심에 사로잡혀 있었지.

“내가 확인해볼까?”

김 실장이 마른침을 삼키며 내게 말했고.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같이 보자.”

그리고 이내 차 안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가득했다.

…13%.

내가 투입되고 첫 시청률이었던 14%보다 1%가 더 떨어진 시청률.

순간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고.

김 실장 또한 내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투입되고 계속해서 떨어지는 시청률에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아무리 예상을 하고, 흔들리지 않으려고 해도.

계속해서 떨어지는 시청률에 한숨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지.

김 실장은 코를 찡긋거리며 내게 말했다.

“희성아, 괜찮아.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는 거야.”

그의 말에 나는 애써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김 실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절대 네 잘못 아닌 거 알지?”

“응.”

“희성이 네 연기 보고 분명 다시 시청률 오를 거니까, 상심할 필요 없어.”

그의 말이 맞았다.

내가 투입되면 주춤할 거라는 건, 수도 없이 되새기며 생각했던 것이니까.

그건 절대 내 탓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오롯이 내 몫이다.

떨어지는 건 분명 임하준의 여파였지만.

앞으로의 시청률은 내 연기로 인해 오르거나 내릴 터.

오히려 이 정도만이라면, 나쁘지 않았다.

내려왔다는 건, 이제 오를 일만 남은 것이고.

나는 충분히 내 연기로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형, 나 이제 연습할게. 바로 촬영이잖아.”

내 말에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감정을 털어냈고.

재빨리 대본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수백 번도 더 읽고 외웠던 대사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또다시 연습에 연습을 이어갔고.

죽기 살기로 해보자는 마음에 이를 악물고 대본을 넘겨갔다.

***

최대한 시청률에 연연하지 않기 위해.

눈뜨자마자 시청률을 확인하던 습관을 꾹 참았다.

연습에만 매달리고, 내 연기에 충실하자는 생각이었지.

언젠간 시청자들도 그걸 알아주는 날이 올 테니까.

오늘도 어김없이 연기에 몰두하던 그때.

“희성아.”

최서빈이 연습을 하던 내게 다가오며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선배님.”

그는 내게 커피를 내밀며 말했다.

“이야, 요즘 희성이 네 덕분에 우리 드라마가 인터넷에서 맨날 언급되더라?”

“네?”

최서빈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봐, 내가 너 연기 진짜 잘한다고 했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최서빈은 그대로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린 뒤에 자리를 벗어났다.

“나 촬영 들어가니까, 이따가 보자.”

“예, 선배님.”

그가 떠나고 홀로 남은 이곳.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블랙맨’을 검색하자 줄줄이 뜨는 댓글들.

-진희성, 쟤 막장 연기만 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솔직히 임하준보다 진희성 연기가 훨씬 낫지 않음?

-몇 주 보니까, 이제 진희성이 원래 저 배역 같음ㅋㅋ.

-진희성 연기 진짜 잘하긴 잘한다. 배역이랑 개 잘 어울려.

-최서빈이랑 진희성 케미가 전보다 훨씬 나아서, 보기 더 편함!

댓글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전날 방송한 10화.

그 시청률을 보며 참았던 환호가 터져 나왔다.

10화 시청률 17%.

“…미쳤다.”

곧장 다시 원래의 시청률을 따라잡았고.

휴대 전화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걱정하고 우려했던 시청률이 점차 오르는 것을 확인하자, 가슴이 뜨겁게 타올랐다.

그리고 확신했다.

내가 더 잘해낸다면, 높은 시청률은 그저 따라올 것이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