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35)화 (135/303)

135화 #25 – 누군가에게는 위기, 누군가에게는 기회 (4)

똑똑.

‘한시진 본부장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문을 두드렸고.

“네, 들어와요.”

한 본부장은 기다렸다는 듯 내 노크에 답을 보냈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 본부장이 나를 미소로 반겼다.

“안녕하십니까.”

그에게 허리를 접어 인사한 뒤.

그가 안내하는 자리로 걸어가 착석했고.

곧장 내 앞에는 음료 한 잔이 놓였다.

한 본부장의 얼굴을 본 건 오늘이 처음은 아니었다.

WG 엔터로 이적 후, 인사를 하는 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그때도 느꼈던 생각이지만, 한 본부장의 포스는 어마어마했다.

하긴, 이렇게 큰 회사의 본부장이 될 정도의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카리스마가 없어서는 올라오기가 힘들었겠지만 말이다.

그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등을 기댄 채, 내게 물었다.

“이번에 끝난 드라마도 희성 씨가 밀어붙여서 들어갔다면서?”

한 본부장의 옅은 미소.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자세, 말투, 표정에서는 여유로움이 뚝뚝 묻어나왔다.

쉽게 보일 수 없는 저 자태에 나는 자연스레 두 팔이 무릎 위로 모였고.

긴장을 한 채 그에게 답했다.

“네, 맞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고 싶은 말을 참거나 주춤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설득을 당하기 위해 본부장실까지 올라온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는 음료를 한 모금 들이켜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 봤어. 시청률도 잘 나왔고, MBS에서 보너스까지 준다던데. 고생했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음료가 담긴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기 위해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고.

앞으로 몸을 당겨 고개를 빼꼼 들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희성 씨가 상 하나 받아오나 했더니만, 블랙맨에 대타로 들어가겠다고?”

한 본부장은 정색한 얼굴도, 그렇다고 웃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처음부터 옅은 미소를 유지한 채 내게 말했고.

그 오묘한 표정이 오히려 내게 한층 더 긴장감을 조성했다.

“네, 제가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드라마의 스토리도 좋고….”

한 본부장은 왼쪽 손바닥을 뻗어 자신의 앞에 사뿐히 올렸고.

그 손짓에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공들여온 게 무너질 수도 있어. 그 생각까지는 한 거 맞고?”

모든 게 무너진다라….

사실 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드라마 대타로 내가 투입된다고 해서, 내가 지금껏 쌓아온 모든 것이 허물어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절대 그렇게 가만히 두고 보지도 않을뿐더러.

혹여나 드라마가 실패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따뜻하게 보낼 연말을 조금은 쓸쓸하게 보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나는 최서빈에게 보은을 하고 싶었다.

내가 가장 깊은 수렁에 빠질 뻔했던 그때.

그 수렁을 아주 작은 웅덩이로 만들어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최서빈이었고.

그에게 이렇게라도 마음을 표하고 싶었다.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은 그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지.

나는 한 본부장을 향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말씀하신 대로 각오는 했습니다. 다만,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할 거고요.”

내 눈은 의지를 그대로 투영한 듯 부릅뜨고 있었고.

한 본부장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숨 막히는 몇 초의 시간이 지나자.

한 본부장이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전화를 집어 들었다.

“어, 난데. 최서빈 지금 바로 올라오라고 해.”

그는 짧은 지시를 보낸 뒤.

다시금 여유로운 표정으로 돌아와 음료를 들이켰다.

고요함이 잠시 흐르던 순간.

똑똑.

본부장실의 문이 다시 한번 두드려졌고.

곧이어 최서빈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어, 우선 앉아.”

“네.”

최서빈도 한 본부장과는 어려운 사이인지, 꽤 쭈뼛대는 모습으로 걸어와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고.

한 본부장은 턱을 들며 최서빈을 향해 말했다.

“서빈아.”

“네, 본부장님.”

“블랙맨 임하준의 그 빈자리, 희성이 어떠냐?”

최서빈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고.

그대로 눈만 깜빡이며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나는 허공에서 부딪친 최서빈의 눈빛을 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희성이가 블랙맨에 들어온다는 말씀이십니까?”

최서빈이 재빨리 시선을 옮겨 한 본부장을 향해 물었고.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답했다.

“응, 어때?”

일말의 고민도 없이 최서빈이 크게 외쳤다.

“저야 좋죠!”

그제야 한 본부장은 나를 바라보았다.

“아까 했던 말, 다 지킬 수 있는 거지?”

회사의 우려대로 내 모든 걸 잃지 않겠다는 말.

미래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를 믿었고, 장담할 수 있었다.

내 노력으로 모든 걸 이뤄낼 수 있을 거라고.

한 본부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드라마도 저도 성공해 보겠습니다.”

그의 입꼬리가 휘어졌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퇴근하지 말고 기다려. 내가 블랙맨 측이랑 이야기해볼 테니까.”

“네!”

한 본부장의 말에 곧장 소리쳤고.

그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나와 최서빈을 바라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뭐 해. 둘 다 이제 나가봐.”

“아, 네.”

최서빈과 나는 서로를 마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희성아, 나랑 이야기 좀 하자.”

“네, 선배님.”

본부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우리는 곧장 테라스로 향했고.

최서빈은 테라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뒤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갑자기 왜 대타로 온다는 거야?”

그의 물음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듯 힘을 준 채 답했다.

“블랙맨, 작품 보고요. 스토리 좋지 않습니까?”

내 말에 최서빈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야, 인마. 너 저번에 내가 같이하자고 하니까, 드라마 별로라며.”

나는 코를 찡긋거리며 그에게 답했다.

“에이, 선배님. 제가 언제 별로라고 했습니까, 제가 역할이 안 어울리는 것 같다고 했죠.”

“그러니까. 그때는 거절하더니 이제 와서 그냥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임하준 대타를 네가 왜 하는데?”

최서빈의 말에 나는 그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고.

그는 입술을 잘끈 깨물며 눈을 가늘게 뜨고 내게 물었다.

“너 설마… 나한테 뭐 은혜라도 갚으려고 들어오는 거냐?”

최서빈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워낸 얼굴로 답했다.

“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야, 진희성.”

“예, 선배님.”

최서빈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내게 말했다.

“나… 너 이렇게 망해도 책임 못 져. 잘 생각해.”

최서빈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선배님, 저도 제 한 몸 책임질 수 있습니다. 저 이제 그 정도는 돼요.”

“…이 자식, 다 컸네.”

그는 실소를 터트렸고.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채 큰 손바닥으로 내 앞머리를 헝클였다.

“…고맙다, 인마.”

최서빈이 입꼬리를 올린 나를 빤히 바라보고는 그대로 나를 지나쳐 테라스 문으로 향했고.

손잡이를 잡던 그때.

뒤를 돌아 소리쳤다.

“아, 참고로.”

그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려 최서빈을 바라보았고.

“네?”

“감독님이 안 된다고 해도 내가 너 들어오게 할게.”

“…예?”

그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고.

최서빈은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네가 이 드라마에 들어오고 싶다며. 내가 어떻게든 들어오게 하겠다고.”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문을 열고 나갔고.

나는 그런 최서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

김 실장과 함께 회의실에 도착했다.

블랙맨의 촬영 중단으로 쉬고 있는 상황이기에.

그 관계자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WG 엔터로 찾아올 수 있었다.

“그럼 오늘 블랙맨 감독님이랑 스태프 면담하고 결정하는 거지?”

내 질문에 김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어, 그쪽에서 지금 상황을 알고 오는 거니까, 이야기해 보고 큰 방해물 없으면 바로 될 거야.”

“후우, 떨린다.”

그때.

문이 열리며 블랙맨의 스태프 몇 명과 감독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짧은 인사를 나누며 자리가 만들어졌고.

“오시느라 고생하셨죠.”

“아이고, 아닙니다.”

풍채가 좋은 차현종 감독은 호탕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가장 먼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희성 씨, 최근 작품 잘 봤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바쁘실 텐데, 제 작품도 챙겨봐 주시고 영광입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차 감독은 부리부리한 눈 탓에 사납게 생겼지만.

부드럽고 차분한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

“경쟁 드라마라면 안 봤을 텐데, 월화 드라마여서 챙겨 봤습니다. 하하.”

그의 말에 회의실은 금세 어색함이 풀렸고.

궁금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대타로 오시는 게 쉽지 않은 결정이셨을 텐데….”

그의 말에 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작품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으니까, 수목 드라마 동 시간 1위를 기록하고 있었을 거고요. 이대로 작품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말에 차 감독은 미소를 지었고.

“그렇지 않아도, 하루빨리 촬영을 시작해서 흐름이 끊기지 않게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우선, 결심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밝은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사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던 중.

드디어 드라마 현장 투입에 대한 본론이 시작되었다.

“저희 블랙맨이 아직 6화까지밖에 방영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투입하시게 되면, 7화부터 촬영이 시작될 거고요.”

“네.”

“이미 찍어둔 7화부터는 다 날려야 하니까….”

나는 블랙맨 스태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기존 배역이 다른 배역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그 역할의 배우만 바뀌는 거로 가려고 합니다.”

보통 한 명의 배우가 어떠한 이유에서든 하차를 하게 되면.

급히 대본을 수정해 그 배역을 사라지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 배역 자리에 다른 역할을 끼워 넣어 새로 시작하기도 하지.

하지만 지금 블랙맨 측에서 원하는 대로, 그 배역을 그대로 가져가면서.

배우만 바뀌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초반에 혼란을 줄 수가 있다.

당연히 앞 회차에서는 임하준이 하던 역할이었는데.

다음 회차에서 갑자기 내가 임하준의 역을 하고 있으니, 혼선을 빚을 수밖에.

그렇지만 그만큼 임하준이 하던 배역을 버려서는 안 되는 대본이었다.

그가 최서빈과 함께 드라마의 주연이었으니까.

잠시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보며 주춤할 순 있지만, 임하준이 범죄를 저질러 하차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고.

그 혼란을 최대한 빨리 사라지게 하려면, 연기하는 내 몫이 가장 크다.

즉, 내게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뜻이지.

그만큼 부담감을 느끼는 자리가 바로 대타 자리이다.

“그래서 저희 측에서 말씀드리는 건….”

스태프가 출력해온 서류를 보며 내게 말을 이어갔다.

한참 동안 블랙맨 측에서 내게 원하는 것들을 설명했고.

나와 김 실장은 그들의 말을 끝까지 경청했다.

“이렇게 해주시면 됩니다. 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나를 바라보며 묻는 그의 말에 나는 곧장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럼요. 가능합니다.”

옆에 있던 차 감독이 활짝 입꼬리를 올리며 내게 말했다.

“페이는 높게 쳐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안 좋은 이슈도 나올 거고, 분명 시청률도 지난 회차보다는 낮아질 거예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고.

차 감독은 한숨을 삼켜내며 말을 이어갔다.

“그건 희성 씨 책임이 전혀 아니니까, 절대 걱정하지 마시고요.”

그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고.

“전부 괜찮으니까, 희성 씨는 멘탈만 잘 지켜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희성 씨 연기야 뭐, 잘하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하하.”

“아유, 아닙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독님.”

“네,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그렇게 눈을 마주 보며 손을 맞잡았다.

그들이 떠난 후.

한 시간이 채 지나지도 않아, 기사 하나가 올라왔다.

[진희성, ‘블랙맨’ 출연 확정… ‘대마초’ 흡연으로 구속된 임하준의 빈자리 채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