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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34)화 (134/303)

134화 #25 – 누군가에게는 위기, 누군가에게는 기회 (3)

“형, 그거 대타 안 구해졌으면, 내가 해도 돼?”

내 말이 끝나자마자 김 실장은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야, 진희성!

소리친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재차 말을 이었다.

-장난해? 그걸 네가 왜 해.

“형, 안 좋게만 생각하지 말고, 차분히 들어봐.”

-아니, 듣고 말고 할 것도 없어. 안 돼.

김 실장의 단호한 말투.

처음 들어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확고하게 단칼에 자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지난 ‘상간녀의 유혹’ 드라마 때는 내가 하고 싶은 이유라도 들어주던 그였으니까.

그렇지만 이대로 포기할 생각은 나 역시 추호도 없었다.

“그렇게만 생각하지 말고….”

-희성아, 정말로 그 드라마는 안 돼. 너도 알잖아.

도저히 좁혀지지 않는 이야기.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에게 말했다.

“형, 회사야?”

-어, 왜?

“그럼 나 지금 회사로 갈게. 이러지 말고, 만나서 이야기하자.”

-알겠어. 그게 낫겠다.

전화를 끊자마자 부리나케 준비를 시작했고.

서둘러 회사로 향했다.

***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김 실장의 모습.

그는 나를 만난 반가움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왔어?”

“어, 형 기다리고 있었어?”

“당연하지. 얼른 들어가자.”

김 실장이 양손에 커피를 들고 내게 턱짓을 보냈다.

“회의실?”

“아니, 지금 다 회의 중이라 자리 없더라고. 테라스로 가자.”

“그래.”

나는 그에게 커피를 건네받은 뒤, 테라스로 발길을 옮겼다.

그렇게 도착한 테라스에는 우리 외에 그 누구도 없었고.

테라스에 있는 테이블 하나에 커피를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기도 전에, 김 실장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희성아, 대타로 들어가는 거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아.”

안부를 묻고 할 시간도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김 실장의 말에.

나 역시 커피를 내려놓으며 답했다.

“형, 블랙맨 시청률도 잘 나오잖아. 대본도 봐서 알겠지만, 스토리도 탄탄하고.”

“스토리 탄탄한 거 나도 알지. 그래서 시청률 잘 나왔던 것도. 근데 그건 임하준이 빠지기 전이잖아. 이젠 상황이 바뀌었고.”

“나도 알지만, 그래도 그 드라마가 중단되는 거 아니고. 누군가는 대타를 구해서 재개하는 거잖아.”

김 실장은 한숨을 참으며 말했다.

“근데 그 대타가 네가 될 수는 없어. 아니, 네가 돼서는 안 돼.”

“왜 안 되는 건데?”

“희성아… 너도 알잖아. 들어가서 득 될 거 없을 거라는 거.”

나를 위해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의 말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았다.

“실이 될 것도 확신할 수는 없는 거 아니야?”

팽팽하게 대립한 우리 둘.

누구 하나 의견을 물릴 생각은 없었다.

잠시 정적이 찾아왔고.

우리는 차분히 커피를 들이켜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다 김 실장이 어깨를 들썩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원래 임하준 소속사에서 책임지고 대타를 구하는 게 암묵적인 룰이야. 무조건 그렇게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게 이 세계의 룰이라고.”

김 실장의 말.

그러니까, 최서빈이 속한 우리 회사 WG 엔터가 아닌.

임하준의 소속사에서 대타를 찾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대타를 구하지 못했다는 건.

임하준의 소속사에서도 마땅한 사람을 드라마에 넣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드라마 촬영이 재개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그러니 우리 회사에서, 즉 내가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임하준의 회사에서 사람을 구하는 걸 막연히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대타로 들어가면 될 테니까.

우리의 의견은 재차 충돌했고.

나는 김 실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 그럼 서빈 선배는?”

“그걸 네가 왜 걱정하는데.”

“형도 알잖아. 서빈 선배, 항상 톱을 찍던 사람인 거.”

내 말에 그는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최근 영화에서 성적이 주춤했잖아. 그래서 연예계에서도 말이 많았는데, 이번에 겨우 다시 잘 돼서 올라가는 중이고….”

그는 내 말에 손을 뻗어 막으며 말했다.

“네 마음은 충분히 알겠어. 근데 희성아.”

“응?”

“잘 생각해봐.”

김 실장이 입술을 잘근 깨물며 말을 이었다.

“너 이번 드라마 ‘상간녀의 유혹’이 엄청나게 잘됐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김 실장은 열변을 토하듯 말했다.

“시청률도 20% 돌파하고, 잘 마무리했어. 그래서 너 처음으로 연기 대상에 갈 기회가 생겼잖아.”

“형, 그건….”

“아니, 가는 것뿐이야? 상을 받을 수도 있어. 굉장히 가능성이 높다고.”

그의 말에 나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답했다.

“아직 정해진 거 아니니까.”

“거의 기정사실화나 다름없어. 정말이야. 근데 괜히 블랙맨 대타로 그 망한 판에 네가 들어갔다가….”

김 실장이 한숨을 몰아쉬며 재차 입을 열었다.

“아니지, 거기는 누가 들어간다고 해도 시청률 회복 못 해.”

“…….”

그의 말에 쉽게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나 역시 잘 나올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으니까.

“근데 대중들은 수치만 본다고. 너 투입되고 시청률이 반 토막 나잖아? 그럼 너, 상 절대 못 받아.”

“맞지. 근데 형, 상은 확정도 아니고 상 때문에 대타 못 하게 하는 거라면 생각을 좀 해보자.”

김 실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상은 둘째 치더라도, 희성이 네 커리어가 문제야.”

그의 진심 어린 조언에 나는 그저 입을 닫고 귀를 열었다.

“안 그래도 지금 막장 드라마 해서 앞으로 캐릭터를 어떻게 받을지가 문제잖아.”

김 실장의 말에는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인정하기가 싫을 뿐.

지난 드라마의 주제 자체가 불륜, 치정 멜로이다 보니.

자극적인 소재에 시청률이 잘 나왔고, 탄탄한 스토리라 호평을 많이 받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팬덤이 늘어났지.

하지만 김 실장이 우려하는 것은 시청률이 아니었다.

시청률과 내 커리어는 별개의 문제.

사랑받는 드라마를 했다고 해서, 앞으로의 내 배우 생활이 탄탄대로가 되면 좋겠지만.

배우라는 직업의 특성상 캐릭터가 굳혀지는 것에 대한 불안함이 있었다.

대중들에게 나는 지금 불륜남, 바람남이라는 호칭이 강하게 붙었고.

그 캐릭터가 잡혀 있기에, 다음 드라마에서 쉽게 나를 캐스팅하기는 힘들다는 것이지.

비슷한 캐릭터의 배역이 내게 캐스팅이 온다면?

나를 포함해 김 실장과 회사에서도 그 제안을 거절할 것이다.

왜냐, 두 번이나 연속으로 그런 역할을 맡게 되면 나는 정말 그 캐릭터로 자리매김이 될 테니까.

그렇다고 순진한 역할, 순수한 배역으로 캐스팅을 하는 것 또한 감독 입장에서는 고민이 될 터.

막장 드라마의 시청률이 높았다는 건, 그만큼 본 사람이 많다는 것인데.

그 모든 이들의 눈에 나는 이미 순수하지 않은 캐릭터로 남아 있을 테니까.

내 캐릭터를 뒤집기 위해 다음 작품이 정말 중요하다는 건, 김 실장을 비롯해 나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김 실장은 대타로 들어가야 하는 블랙맨을 끝까지 말리는 것이지.

나 역시 그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도 김 실장과 같은 생각을 했고.

수많은 고민 끝에 이 드라마를 하기로 결론을 낸 것이었기에.

그에게 내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김 실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형, 근데 난 이 드라마 꼭 하고 싶어.”

“희성아, 이건 아니야. 내가 막무가내로 막는 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알지.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도 당연히 알고.”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네가 얻을 수 있는 게 단 하나도 없는데, 대체 왜 하겠다는 거야?”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그의 모습.

확고한 얼굴의 김 실장을 보며 말했다.

“형, 그럼 나 서빈 선배랑 이야기 한번 해봐도 될까?”

김 실장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답했다.

“서빈 씨랑 이야기한다고 해서 달라질….”

그때.

“나랑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데?”

우리의 뒤로 다가와 말하는 목소리에.

김 실장과 나는 화들짝 놀라 입을 떡 벌렸다.

최서빈이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바라보며 어깨를 들썩였고.

“뭔데, 나랑 뭘 해야 하는데?”

김 실장의 뒤에 서 있는 최서빈은 궁금하다는 듯 재차 내게 물었다.

나는 놀란 마음을 삼키고, 애써 미소 지으며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선배님, 블랙맨 임하준 자리, 대타 구하셨어요?”

내 말에 최서빈은 곧장 대답했다.

“아직.”

“그….”

최서빈을 향해 입을 열려던 순간.

앞에 앉은 김 실장이 나를 향해 간절한 얼굴로 눈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꽉 다문 입술을 말아 넣은 채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었다.

그 제스처는 서 있던 최서빈이 당연히 볼 수가 없었고.

나는 결국 말을 끝맺지 못했다.

덜컥 최서빈에게 대타를 하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아무리 내가 하고 싶다고 해도, 나를 케어해주고 담당하는 매니저가 있기에.

그와 이야기해서 결론을 짓는 게 먼저였다.

매니저의 말을 대놓고 거부할 수도 없을 터.

최서빈은 말끝을 흐리는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뭐라고?”

그때, 최서빈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아, 잠깐만.”

“네, 선배님.”

“여보세요? 어, 왔어. 지금 올라갈게.”

그에게 걸려온 전화에, 최서빈은 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따가 다시 이야기하자. 나 급하게 올라가 봐야겠네.”

“예, 선배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최서빈은 곧장 테라스를 벗어났고.

다시 김 실장과 나, 단둘만이 이곳에 남았다.

그가 뒤돌아 최서빈이 나간 것을 확인하고는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희성아, 진짜로 하지 말자.”

그러나 최서빈의 지친 얼굴을 보니, 나는 다시금 확신하듯 마음을 먹었고.

“형, 근데 내가 진짜 잘할 수 있을 거 같아. 한 번만 믿어봐 줘.”

김 실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조심스레 물었다.

“희성아, 혹시… 서빈 씨가 너한테 따로 부탁한 거야?”

그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지자.

“그래서 그런 거야?”

재차 묻는 김 실장을 보며 나는 실소를 터트렸다.

“아, 형. 내가 무슨 선배 말 듣고 생떼 쓰는 것 같아?”

“아니면 대체 왜 그러는데.”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서빈 선배한테 받은 은혜가 많아. 그래서 이 기회에 갚고 싶은 마음도 있고.”

“그거 때문이라면….”

김 실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단순히 일의 영역이 아니라, 남자 대 남자로 이야기하는 건데.”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고.

“형도 알잖아. 나 힘들 때, 서빈 선배가 HS 엔터에서 나 여기로 데려와준 거.”

“그건 알지.”

“나도 그 은혜를 한 번은 갚아야지 않겠어?”

내 말이 끝나자 김 실장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허공을 바라보며 숨을 길게 마시고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내가 HS 엔터에서 계약 해지로 법정 공방까지 갈 때.

누구보다 힘들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김 실장이니까.

그리고 그 속에서 구출해준 건, 최서빈이었고.

그로 인해 김 실장까지 WG 엔터로 오게 되었지.

그때의 일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김 실장은 내 말을 천천히 곱씹는 듯 보였다.

김 실장과 나는 각자의 사색에 잠겼고.

몇 분의 시간이 흐른 뒤.

김 실장이 숨을 뱉듯 한숨을 내쉬었다.

“…형.”

내 부름에 고개를 돌린 김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기다려봐. 본부장님이랑 이야기 좀 해보고 올게.”

김 실장은 굳은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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