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31)화 (131/303)

131화 #24 – 두 얼굴의 그녀 (8)

“하아… 아직도 멀었대?”

블랙맨의 차 감독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얼굴로 스태프를 향해 소리쳤다.

“다시 한번 더 전화해 보겠습니다.”

“어, 대체 이게 몇 번째냐.”

차 감독이 일그러진 얼굴로 한숨을 푹 쉬고는 최서빈을 향해 걸어갔다.

“서빈 씨, 잠깐만 기다렸다가 안 되면, 다음 신부터 찍읍시다.”

그의 말에 최서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준이 오면 저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요즘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그러게 말이야. 하준 씨 요즘 지각이 너무 잦다.”

그때.

“죄송합니다!”

허리를 꾸벅 숙이며 달려오는 임하준의 모습.

그 모습에 차 감독은 한숨을 겨우 참아내며 입을 열었다.

“하준 씨, 지금 시간이 대체…!”

그때 임하준의 매니저가 달려와 차 감독을 향해 깊게 허리를 접었다.

“감독님, 정말 죄송합니다. 차가 너무 밀려서….”

“매니저님, 다들 같은 도로로 오는데,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차마 임하준에게 소리치지 못한 차 감독은 그의 매니저에게 호통을 쳤고.

임하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매니저 옆을 지나 촬영 준비를 시작했다.

임하준 탓에 늦어진 촬영 시간.

서둘러 준비를 마친 뒤에야 촬영을 시작할 수 있었다.

“레디, 액션!”

차 감독의 외침에 최서빈과 임하준은 서로를 마주 보았고.

임하준이 눈에 힘을 준 채 입을 열었다.

“제가 다 처리하겠습니다. 저에게만 맡…겨 주신다면….”

시작하자마자 대사를 틀려버린 임하준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아… 죄송합니다.”

“컷, NG.”

차 감독은 그런 임하준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고.

재차 메가폰을 쥐고 소리쳤다.

“다시 갈게요. 레디, 액션!”

“제가 다 처리하겠습니다. 저에게만 맡겨 주신다면, 틀림없이 해내… 아, 죄송합니다.”

또다시 터진 임하준의 실수.

첫 번째 대사부터 계속되는 실수에 차 감독이 그를 향해 외쳤다.

“잠깐 쉬었다가 갑시다. 하준 씨, 대사 다시 숙지하고 갈게요.”

차 감독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메가폰을 꺼버렸다.

그리고 상대 배역인 최서빈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임하준을 향해 걸어갔다.

“하준아.”

잔뜩 올라간 눈썹으로 최서빈의 심기 불편한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임하준은 그의 부름에도 코를 찡긋거리며 장난스레 답했다.

“네, 선배님.”

“하아… 요즘 왜 그러냐, 대체.”

“아, 죄송합니다.”

헤실거리며 답하는 임하준의 태도에 최서빈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답했다.

“제대로 좀 해라.”

그래도 임하준은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넵!”

그리고 최서빈에게 몸을 붙이며 너스레를 떨고 말했다.

“선배님, 그래도 저희 시청률은 잘 나오잖아요. 하하.”

그의 말에 최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고.

살기 어린 눈빛으로 그에게 소리쳤다.

“너 때문에 그 시청률 떨어지게 하고 싶지 않으면, 정신 차리고 똑바로 해.”

소리친 최서빈은 임하준을 지나쳐 현장을 빠져나갔다.

***

며칠간의 짧았던 휴식.

마지막 촬영 이후, 일주일도 쉬지 않았지만.

그동안 못 잤던 잠을 길게 청했다.

이번 드라마 촬영을 하며, 끝나자마자 짧은 여행이라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끝이 나자 그 생각은 고이 접어두게 되었다.

마지막 회 방영이 끝나지 않았기에, 막상 마음 편하게 어디론가 떠날 수가 없었지.

더군다나 오늘 16화, 마지막 회를 모두가 함께 보며 회식하기로 했기에.

느지막이 일어나 천천히 준비하기 시작했다.

오늘 역시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시청률 확인이었다.

전날 방송한 15화는 18.9%.

첫 화 시청률 14%에서 시작한 것을 보면, 이후로 한 번도 주춤하지 않고 상승세를 보였다.

물론 다들 기대하는 마의 20%를 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아직 마지막 화가 남았기에, 오늘 방영할 16화에 기대를 걸어보며 서둘러 샤워실로 향했다.

한 시간이 지난 후, 집에서 내려오자 이미 도착해 있던 김 실장이 나를 반겼다.

“희성아.”

그는 차량 문을 활짝 열며 환하게 웃었고.

나는 손을 흔들며 차에 올라탔다.

“형, 오랜만이네.”

“하하, 그러네. 우리 한… 3일 만인가?”

“벌써 그렇게 됐다고?”

김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저번에 마지막 촬영 끝나고 다음 날인가… 너네 집에서 술 마신 게 토요일이었으니까.”

“형 얼굴을 매일 보다가 3일 못 봤다고 되게 새롭다. 하하.”

“그러니까. 우리 너무 자주 본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렇게 웃으며 회식 장소로 이동했다.

“형, 시청률 18.9% 나왔더라?”

“어, 나도 아침에 봤어. 조금만 더 올라서 19% 됐으면 좋았을 텐데.”

“맞아. 오늘 마지막 화인데, 20% 넘었으면 좋겠다.”

나는 기대 반, 긴장 반으로 눈을 지그시 감으며 양손을 맞잡았다.

“넘을 거야. 다들 마지막 화에서 너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다고 난리더라.”

“그래?”

“응, 결말에 주인공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인터넷에서 각자 추측하면서 댓글이 장난 아니야.”

“하아… 떨린다.”

내 모습에 김 실장은 미소를 보내며 안심시켰고.

나는 휴대 전화를 열어 인터넷을 클릭했다.

드라마 ‘상간녀의 유혹’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검색을 했고.

몇 개의 글을 읽은 뒤, 눈에 들어오는 드라마.

‘블랙맨’이었다.

최서빈이 주연으로 방영하고 있는 드라마.

현재 6화까지 방영된 블랙맨의 시청자 반응은 꽤 뜨거운 편이었다.

아니, 내가 출연한 상간녀의 유혹에 비해 훨씬 더 폭발적이었지.

나와는 다른 방송사, 다른 날짜였기에 경쟁 드라마가 아니었고.

그렇기에 나는 마음 편히 그 드라마의 반응을 살필 수 있었다.

“형, 서빈 선배 드라마 시청률 잘 나온다.”

김 실장은 룸 미러로 나를 바라보며 눈썹을 들썩였다.

“어, 나도 봤는데, 재밌기는 하더라.”

“그래? 나도 쉴 때 집에서 한번 봐야겠네.”

그는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블랙맨 시청률은 얼마나 나와?”

“지난주에 6화까지 나왔는데, 벌써 17%야.”

“이야… 엄청나게 높네.”

김 실장은 탄성을 내질렀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1화보다 반응이 점점 더 많아져서, 블랙맨은 20%. 아니, 25%까지 노려볼 만하겠는데?”

“응, 갑자기 내용이 산으로 가지만 않으면 잘되겠더라.”

“그러겠다. 중간에 드라마에서 시청률 떨어질 게, 스토리 빼고 더 있겠어?”

“맞지. 배우들 연기력이 갑자기 이상해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김 실장이 아랫입술을 내밀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 드라마 잘 되면… 서빈 씨도 이번에 연말이 따뜻하겠던데?”

최서빈에게 일어날 수 있는 좋은 소식.

조금의 질투나 배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김 실장의 말에 최서빈을 떠올리며 미소가 지어졌다.

그의 위치라면 충분했다.

더군다나 최서빈은 매년 빠지지 않고 연말 시상식에 초대되었으니까.

“이번에 서빈 선배는 연기 대상을 노려봐도 되겠다.”

“응, PBC 연기 대상 후보로 올라올 사람들 벌써 보이잖아.”

“맞아. 서빈 선배 블랙맨 잘 되면, 이번에 연기 대상 받을 수 있겠다.”

김 실장과 최서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세 회식 장소에 도착했고.

“딱 맞게 도착했다. 얼른 가자.”

“응.”

우리는 서둘러 차에서 내려 식당 안으로 향했다.

회식 장소에 도착한 뒤, 많은 이들과 인사를 나눴고.

자리를 잡고 술잔을 기울이기를 30여 분이 흘렀다.

어쩌다 보니 송 감독 주변으로 주연 배우들과 주연 급 조연 배우들이 자리를 잡았고.

내 옆에는 서인우, 맞은편에는 신민영이 착석했다.

송 감독은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이야, 우리 드라마 주역들이 다 모였네. 얼른 한잔하고, 방송 봅시다.”

“네, 감독님.”

챙-.

우리의 잔은 허공에서 세차게 부딪쳤고.

그 짧은 찰나에도 신민영의 술잔은 내 앞을 스치지 않았다.

여전히 신민영과 나 사이에는 냉랭한 기운이 흘렀고.

그 감정을 느낀 것은 다행히도 오로지 우리 둘뿐이었다.

아니, 이 관계를 알고 있는 서인우까지.

“민영 씨는 촬영 끝나고 푹 쉬었나?”

송 감독의 질문에 신민영이 밝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 저는 집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가 나와 허공에서 눈빛이 부딪칠 때면.

그녀의 말은 어색하게 끊겼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서둘러 눈길을 피했다.

서인우는 여전히 나와 신민영의 관계를 풀고 싶은지, 연신 내게 말을 걸었다.

“아, 어제 15화에서 민영 씨랑 희성 선배 애틋한 장면 나왔던 신 있잖아요.”

그의 말에 내가 아닌 송 감독이 흥분하며 입을 열었다.

“이야, 그거 반응 아주 뜨겁던데?”

“맞습니다. 둘의 케미가 장난 아니라고 난리더라고요.”

“하하, 그래. 우리 안사람도 민영 씨랑 희성 씨가 실제로 무슨 관계냐고 물어보더라니까?”

송 감독은 나와 신민영을 번갈아 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둘이 나 몰래 그렇고 그렇게 된 건 아니지?”

그의 말에 신민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소리쳤다.

“아, 감독님!”

나는 송 감독을 향해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전혀 아닙니다.”

그녀의 실제 남자 친구가 된 서인우는 이미 나와 신민영의 사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질투는커녕 관계 회복을 위해 미소로 나를 바라보았고.

서인우를 곁눈질로 쏘아보는 신민영의 시선이 나에게까지 느껴졌다.

그와 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했던 신민영이니까.

그때.

“드라마 시작합니다!”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TV의 볼륨이 높여지자, 이곳은 언제 떠들었냐는 듯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그렇게 우리는 술잔, 젓가락을 모두 내려놓은 채 마지막 화.

16화의 시작을 함께했다.

“하아… 저기서 희성 씨 연기 미쳤어요.”

드라마를 보던 중 내 독백 연기가 화면에 비쳤고.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야, 희성 씨 감정, 진짜 장난 아니네.”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고.

서인우는 뚫어져라 보던 휴대 전화를 내게 내밀었다.

“선배, 이거 봐. 우리 마지막 화 시청률 잘 나오지 않을까?”

그가 내민 화면에는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는 실시간 시청자 반응이었고.

서인우와 나는 TV가 아닌, 휴대 전화에 시선을 고정했다.

-우리 희성이 연기 좀 봐ㅠㅠ.

-설마… 오늘 마지막 화 실화?

-드라마 끝나면 내 월요병은 누가 고쳐주냐ㅜㅜ.

-안 돼. 이렇게 끝나지 마.

-진희성이랑 신민영 그냥 사랑하게 놔둬주라.

-드라마 보면서 불륜남 진희성한테 열 받았는데, 결국 애증의 관계로 팬이 되어버림ㅋㅋ.

-님들, 진희성 불륜남되기 전에는 좀비였음ㅋㅋ.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 영화 꼭 봐. 개 존잼.

-상간녀의 유혹, 인생 드라마다. 나 다시 1화부터 정주행 시작!

-진희성수기♡ 오빠 불륜 드라마 찍는다고 할 때, 진희비수기 될 뻔했는데, 오빠 안목 존중하기로 했어요. 오빠 하고 싶은 작품 다 해!

나와 서인우는 댓글을 하나하나 읽으며 키득대고 있었고.

송 감독은 TV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집중하고 있었다.

“봐봐. 댓글 반응 장난 아니지?”

“그러네.”

서인우는 뿌듯한 얼굴로 댓글을 새로 고침 했다.

몇 분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이 끝이 났다.

짝짝짝.

식당 안에 있던 우리는 눈치 볼 것 없이,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손이 부서져라 손뼉을 부딪치며 환호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몇몇은 지난 일들을 회상하며 부둥켜안았고.

나는 크레딧이 올라가는 마지막 신을 바라보며 온몸에 전율이 돋았다.

그리고 앞에 있던 송 감독은 옅은 미소를 보이며.

황급히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렇게 인사를 주고받던 그때.

짧은 전화 통화를 마친 송 감독이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우리 마지막 회, 시청률 떴다!”

그의 한마디에 전 스태프와 배우는 고개를 돌려 송 감독에게 주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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