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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30)화 (130/303)

130화 #24 – 두 얼굴의 그녀 (7)

시상식.

배우 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나와 상관없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시상식에 갈 만한 작품이나 배역을 하지도 못했을뿐더러.

조금 인지도가 알려졌다고 해서 바로 시상식에 초대받을 수 있는 것 또한 아니었으니까.

작년부터 서서히 알려진 인지도.

그럼에도 나는 시상식에 대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유명해지지 않아서?

톱을 찍은 드라마에 출연하지 못해서?

모두 아니었다.

그저 나와 거리가 먼 곳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지.

지금처럼.

하지만 김 실장의 입에서 ‘시상식’이라는 단어 하나에 순간 온몸에 전율이 돋았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내게도 시상식에 초대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니까.

“나한테 시상식이라니, 진짜 꿈만 같다.”

내 말에 김 실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꿈이라니. 잘 하면 후보에도 이름 올릴 수 있을 거야.”

“에이, 김칫국 마시기는 싫으니까, 기대는 안 해야겠다. 하하.”

김 실장이 입꼬리를 올리며 내게 말했다.

“왜, 상도 받을지 모르잖아.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형, 자꾸 나 비행기 태우지 마. 설렌다고.”

그의 말에 나 역시 웃음을 터트렸다.

시상식에서 받는 상이라….

물론 상상만으로도 미소가 번졌다.

배우에게 시상식에서 받는 상이라는 건.

누구나 꿈꾸는 장면일 것이다.

당연히 카메라 앞에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쁜 일이지만.

상이라는 건, 해당 연도에 그 분야에서 내가 대표로 받았다는 그 자부심.

그리고 많은 이들의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니까.

말 그대로 배우에게 있어 꿈의 무대가 시상식인 거지.

시상식을 안 본 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배우를 꿈꾸던 시절.

연기를 하고 유명해지면 매년 연말에 나도 저곳에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TV를 통해 흐뭇하게 시상식을 보았다.

그러다 배우가 되고, 그 꿈의 무대는 쉽게 가지 못하는 곳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어느새 연말마다 시상식 채널을 틀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내가 하기에 따라서, 나도 연말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많은 사람들과 함께 꿈의 무대를 밟을 수 있다는 생각에, 얼굴 가득 웃음이 피었다.

“희성이 너도 올해는 꼭 가보자, 시상식.”

“그랬으면 좋겠다.”

“이번 드라마 잘 되면, 연말에 MBS에서 초대해 주겠지.”

입구에 넓게 깔린 레드 카펫.

머릿속으로 그 레드 카펫 위를 사뿐히 걸어가며 플래시가 터지는 카메라를 상상했고.

어느샌가 내 두 주먹은 불끈 쥐어졌다.

…가고 싶다.

곧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생각을 떨쳐냈고.

기대감에만 부풀지 않고, 현실로 이끌어내기 위해 서둘러 대본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대본을 따라 읽어가는 내 두 눈이 어느 때보다 반짝였다.

***

눈을 지그시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상간녀의 유혹, 그 마지막 신 촬영을 앞두고 있었고.

이 신은 내 감정이 바닥까지 치닫는 촬영이었기에, 긴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끌어 올렸다.

“자, 이제 우리 드라마 마지막 신 갈게요.”

송 감독은 입술을 말아 넣은 채 긴장한 듯 소리쳤고.

그의 말 한마디에 모든 스태프들이 자신의 자리로 이동했다.

나 역시 차분한 마음으로 카메라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희성 씨, 준비됐어요?”

송 감독이 카메라에 비친 나를 바라보며 물었고.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오케이, 그럼 첫 번째 테이크, 가볼게요.”

송 감독의 사인에 모든 이가 집중한 순간.

“레디, 액션!”

메가폰을 너머로 울려 퍼지는 송 감독의 목소리.

나는 그 소리에 재빠르게 배역에 몰입했다.

불 꺼진 방 안.

기운이 쭉 빠진 몸을 이끌고 스위치를 찾기 위해 벽을 더듬거렸다.

챙-.

그때 발에 걸리는 무언가.

“아악.”

나는 재빨리 손으로 발을 감싸 안았고.

굴러간 것은 다름 아닌, 소주병이었다.

수십 개의 소주병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 병들을 밀어내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젠장….”

이제야 정신이 들며 숙취로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았고.

“하아… 내가 뭘 잘못한 건데. 그냥 사랑한 죄밖에 없는 거잖아!”

쾅-.

바닥을 주먹으로 세게 내려치며 한탄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내가 그런 마음을 가졌던 건, 내 잘못이 아니야. 걔가 꼬신 거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내 인생이. 내가 뭘….”

분노로 가득 찼던 마음은 술기운 때문인지, 지친 몸 때문인지.

어느샌가 두 뺨을 적시는 눈물.

한 방울씩 떨어지던 눈물은 이내 턱 끝에서 떨어지고 있었고.

그러다 이 어둠 속에 갇힌 내 모습에, 가슴팍을 내려치며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어두운 방 안에 들리는 소리는 오로지 내 한숨과 후회가 섞인 눈물 소리뿐.

바닥까지 떨어진 내 위치를 떠올리며 나는 이곳이 떠나가라 울부짖었다.

“다 돌려놓고 싶어. 전부….”

바닥에 있던 짐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여기저기에 던졌고.

쨍그랑-.

퍽.

부딪치는 커다란 소리는 내 울부짖는 소리에 묻히고 있었다.

그때.

팟-!

방에 불이 켜지고, 순간 며칠간 빛을 보지 못했던 사람처럼 눈을 팔로 급히 감쌌다.

“악, 내 눈.”

그제야 보이는 벽에 걸린 거울.

내가 집어던져 버린 것들에 의해 거울은 깨져 조각이 나 있었고.

그럼에도 그 깨진 조각들 사이로 보이는 내 모습.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진 머리칼.

언제 밀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덥수룩한 수염.

한껏 목이 늘어난 카키색 티셔츠와.

넋이 나가 풀려 있는 동공, 그리고 세상의 벼랑 끝에 서 있는 듯한 얼굴까지.

그 처참한 모습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당신… 진짜 이대로 망가져 있기만 할 거야?”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

지하 바닥을 뚫고 아래에 있던 내게 들려오는 한 줄기의 빛 같은 것.

나는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들었고.

그 위에는 내 아내인, 아니 아내였던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이 여기에 어떻게….”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고.

나를 한심스레 바라보던 그녀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내가 정말 미안해.”

그녀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잘근 깨물고 있었고.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입술과 안면 근육이 파르르 떨려왔다.

나는 서둘러 그녀의 다리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소희야, 내가 정말 미안해….”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야?”

“나는… 당신 없으면… 흐흑….”

그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내 모습을 보며 눈물을 연신 떨어뜨리는 아내.

나는 이곳이 떠나가라 소리치며 울부짖었다.

쾅쾅-.

그러고는 바닥에 머리를 연신 세차게 부딪쳤고.

그 탓에 이마는 벌겋게 달아올랐다.

“됐어, 그만해. 그러다가 당신 진짜 다쳐.”

그녀의 만류에도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머리를 바닥에 쾅쾅! 내리박았고.

그 모습은 현장의 스태프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기 충분했다.

차가워진 공기의 현장 안을 내 후회가 섞인 소리가 가득 메웠다.

“컷, 오케이!”

그때 들려오는 송 감독의 목소리.

그 소리에 순간 나는 온몸의 힘이 스르륵 풀려 바닥에 풀썩 몸을 떨어트렸다.

온 힘을 다해 몰입했기에.

힘이 잔뜩 풀려버렸고.

현장에는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짝짝짝.

“와아! 진짜 연기 미쳤어요.”

“희성 씨,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마지막 신에서 시청자 반응 난리 나겠는데요?”

“이야, 이번 장면 가지고 여러 번 회자될 것 같은데.”

그때 내게 다가오는 송 감독의 모습.

“희성 씨, 고생 많았어.”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붙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독님.”

전 스태프를 비롯해 현장에 있던 배우들이 한곳에 모였고.

우리는 박수와 함성으로 드라마의 마무리를 지었다.

“너무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고생 많았어요.”

그렇게 한참이나 인사를 주고받던 현장.

우리는 마지막 단체 사진을 끝으로 드라마를 놓아주었다.

곳곳에는 눈물을 흘리는 배우와 스태프들이 있었고.

송 감독은 손뼉을 부딪치며 소리쳤다.

“그동안 밤샘 촬영도 많았고, 생방송처럼 달렸던 화도 있는데. 불평불만 없이 잘 따라와 줘서 고맙고, 고생 많았어요.”

“아닙니다.”

그때 조감독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우리 쫑파티, 그러니까 마지막 회식은 드라마 16화, 마지막 회 방영 날에 맞춰서 하려고 합니다. 그날 다 함께 방송을 보는 거로 합시다.”

“네!”

우리는 합창하듯 소리쳤고.

그렇게 아쉬움 속 마지막 인사는 이후 1시간이나 더 이어졌다.

***

♪♬.

거리를 가득 채운 강한 비트의 음악 소리.

그리고 그 앞에 멈춰 선 차 한 대.

정장을 입은 큰 덩치의 남성들이 차량 입구로 다가와 시선을 빼앗았고.

그 가운데로 임하준이 다급히 내렸다.

“오셨습니까, 안에 다 와계십니다.”

정장을 입은 남성은 임하준에게 깍듯하게 인사한 뒤, 손을 뻗어 안내했고.

찰칵-.

찰칵찰칵.

저 멀리서 덩치 큰 남성들 사이로 작게 보이는 임하준을 조준해 사진 찍는 누군가.

길 건너편에서 임하준을 기다렸다는 듯 핫바를 입에 문 채, 대포 카메라 셔터를 연이어 눌렀다.

“오케이, 임하준 등장.”

임하준의 모습이 드러나자 그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졌고.

그는 서둘러 노트북을 열었다.

타닥타닥.

무언가를 빠르게 써내려갔고.

지이잉.

그때 울리는 그의 휴대 전화.

“네, 연예부 이영민 기자입니다. 예, 안 그래도 특종 하나 물어갈 것 같습니다. 그럼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이영민은 연신 미소를 지으며 노트북과 앞에 보이는 클럽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클럽 안.

임하준은 여느 때처럼 세팅이 된 룸 안에서 친구들을 만났고.

“야, 왜 이렇게 늦게 왔냐.”

그들은 임하준을 향해 핀잔을 늘어놓았다.

“우리 너 기다리다가 먼저 하려고 했다고.”

“아, 미안하다. 촬영이 늦게 끝났는데 어떻게 하냐.”

임하준이 자리에 털썩 앉으며, 그의 친구인 장재혁의 가방을 가리켰다.

“재혁아, 얼른 꺼내봐.”

“야, 너 내일도 촬영이라며. 근데 이거 해도 되냐?”

걱정스레 묻는 장재혁의 말에 임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소리쳤다.

“그럼 이 새끼야, 나 지금 그거 하려고 무슨 짓까지 하면서 촬영장에서 나온 건데.”

“너는 그래도 연예인….”

“꺼져. 얼른 꺼내기나 해. 나 지금 미칠 것 같으니까.”

장재혁은 임하준의 반응에 피식 웃음을 보인 뒤, 가방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이 자식, 벌써 프로포폴에 미쳤네.”

그의 말에도 임하준은 헐떡이는 숨을 내쉬며 소리쳤다.

“됐고, 빨리 열어.”

장재혁이 문 근처에 서 있는 직원을 향해 외쳤다.

“야, 문 닫고 앞에 감시나 똑바로 해.”

정장을 입은 큰 덩치의 직원은 허리를 접으며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그들만이 남겨진 룸 안에서는 점점 더 극도의 어둠이 드리워졌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클럽 밖, 편의점에 앉아 있는 이영민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하암….”

하품을 쩌억 하며 클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아, 임하준 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임하준만을 기다리며 이곳에서 기다리기를 5시간째.

“3시간 전에 들어갔으면 이제 나올 때도 됐는데….”

그때.

입구에서 끌리듯이 직원의 몸에 자신을 지탱한 채 걸어 나오는 임하준이 보였다.

이영민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서둘러 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잡았다.”

찰칵,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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