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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28)화 (128/303)

128화 #24 – 두 얼굴의 그녀 (5)

눈앞에 다양한 음식이 세팅되었지만.

그 누구 하나 마음껏 먹지 못하고 있었다.

첫 방송 시작 1시간 전.

다들 1화가 방송될 그 시간만을 기다리며 애를 태우고 있었다.

“하아… 방송 끝날 때까지는 밥 못 먹겠는데요?”

조감독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그의 말에 나는 크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송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 배우와 스태프들을 향해 외쳤다.

“다 잘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배 채우고 편안히 봅시다!”

편하게 하자는 말과는 달리, 유독 긴장되어 보이는 사람이 송 감독이었지만.

그의 말에 우리는 합창하듯 소리쳤다.

“네.”

여느 드라마보다 더 떨리는 첫 방송.

많은 관심과 함께 걱정,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 드라마였기에.

더욱 긴장되는 마음으로 밥과 시계를 번갈아가며 초조함과 기대감으로 시간을 보내었다.

그렇게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식당은 음식을 씹는 소리.

젓가락 소리도 들려오지 않을 정도로 고요해졌고.

우리는 하나같이 시선을 TV에 고정한 채 드라마를 시청했다.

시청자 실시간 반응을 살피는 건, 일부였고.

전부 숨을 죽인 채 드라마에 집중했다.

사랑과 배신, 불륜, 치정으로 치닫는 드라마는 한시도 한눈을 팔 수 없게끔 만들어져 있었고.

이미 스토리를 알고 있지만, 나오는 신 하나하나에 놀란 얼굴로 드라마를 시청했다.

“이야, 저기 연기 진짜 좋았다.”

“그러게요. 드라마 끝나면 희성 씨한테 반응 난리 나겠는데요? 하하.”

중간중간 연기에 대한 이야기가 터져 나왔고.

드라마에서 불륜남 역할을 맡은 내 이야기가 주된 화젯거리였다.

“연기를 너무 잘하니까, 진짜 불륜 저지르는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주먹까지 쥐었잖아요.”

나와 친분을 쌓은 스태프가 내 옆으로 다가와 웃으며 말했고.

“하하, 그거 칭찬이죠?”

나는 너스레를 떨며 현장의 분위기를 띄웠다.

“드라마가 유명해지면 이제 밖에 못 돌아다니겠는데요?”

송 감독은 내 말에 너털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럼. 이제 식당에 가면, 서비스는커녕 푸대접 받을지도 모르지. 허허.”

“아이, 감독님. 이제 저 큰일 났습니다.”

긴장감으로 가득하던 식당 분위기는 어느새 화기애애해졌고.

벽에 걸린 커다란 시계를 바라보니, 어느덧 1화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몇 분의 시간이 흐르고.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으로 끝이 나자, 식당 안은 커다란 박수 소리가 가득 메워졌다.

짝짝짝-.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고.

드디어 회식에서의 첫 술잔을 높이 들었다.

“생각한 것보다 더 잘 나온 것 같고, 앞으로도 이렇게 쭉 열심히 촬영해 봅시다.”

“네!”

“‘상간녀의 유혹’ 드라마 대박을 위하여.”

송 감독의 외침에 우리는 식당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위하여!”

한 명도 빠짐없이 술잔을 입에 털어 부은 후.

그제야 식당은 떠들썩해졌다.

그리고 모든 테이블의 주제는 전부 드라마에 대한 평이었다.

“와아, 진짜 재밌지 않아요?”

“그러니까요. 역시 치정 멜로, 이런 게 자극적이라 시선을 뗄 수가 없잖아요.”

드라마 스토리와 배우들의 연기에 감탄하고 있던 그때.

내 시선 끝에는 초조해하고 있는 송 감독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첫 잔을 털어 부은 후,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있었고.

입술을 잘근 깨무는 모습이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왔고.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시청률이 잘 나왔다는 것을.

인터넷을 통해 바로 알 수 없는 시청률.

그렇기에 송 감독은 방송사와 통화한 끝에 시청률을 확인했을 터.

초조해하던 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는 건, 당연히 시청률이 생각한 만큼 나왔다는 소리지.

여전히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이내 송 감독이 술잔에 술을 넘실거리게 채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흠.”

그의 소리에 각자 하던 이야기를 멈춘 후, 그에게 주목했다.

“방금 확인했더니, 우리 시청률이 14%가 나왔다고 합니다.”

“와아!”

“정말요?”

1화에 14%.

꽤 높은 수치였다.

특히 1화의 숫자는 10%를 넘기가 힘든 시대.

동 시간대 방영하는 드라마의 기존 시청자들이 있기에,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에 넘어오기가 힘들기 때문이지.

타 방송사의 드라마들은 이미 중반부가 넘어가고 있었고.

그런 와중에도 1화 시청률이 14%라는 것은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송 감독의 얼굴은 어느새 벌겋게 달아올랐고.

그는 흥분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표출하며 소리쳤다.

“우리 이대로 더 열심히 달려서 최고 시청률 한번 찍어봅시다!”

송 감독의 말에 우리는 술잔을 들이켰고.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입꼬리를 길게 휘었다.

아직 1화밖에 방영되지는 않았지만.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이 증명되는 것만 같은 시청률에,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시작보다는 끝이 더 성대하게 마무리되려면, 내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컷, 오케이!”

“고생하셨습니다.”

인사를 끝으로 허리를 접으며 현장을 벗어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김 실장이 내게 음료수를 건네며 말했다.

“희성아, 피곤하지?”

“아니야. 괜찮아. 그래도 오늘은 일찍 끝났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몸을 스트레칭하며 답했고.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새벽 1시.

창밖은 깜깜하다 못해 까만 어둠이 뒤덮고 있었다.

“내일 야외 촬영인데, 오전에 비가 온다기에 늦게 시작하기로 했어.”

“그럼 내일 늦게 나와도 되는 건가?”

“응, 집에 가서 잠 좀 자다가 나와도 돼.”

나는 그의 말에 몸을 의자에 푹 기댔고.

번뜩 떠오르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며 그에게 물었다.

“형, 오늘 무슨 요일이지?”

“오늘 화요일. 아니지, 12시 넘었으니까 수요일. 왜?”

“그럼 아까 4화 방영했겠네.”

내 말에 김 실장이 룸 미러를 통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어, 안 그래도 확인했지. 이번 주도 반응 좋아.”

“시청률은?”

“오늘 거는 아직 모르고, 어제 3화는 16% 넘었어.”

그의 말에 나는 지쳤던 몸을 단번에 일으켰다.

첫 방송에 14%.

그리고 2화에는 단숨에 15.8%를 찍었고.

3화는 김 실장의 말대로 16%, 그리고 조금 전 방영이 끝난 4화의 시청률 또한 오를 거라는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힘들고 고된 촬영이었지만, 성공적으로 드라마가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왔다.

차는 그대로 집을 향해 출발했지만.

나는 눈을 감지 않은 채, 서둘러 휴대 전화를 열었다.

방송이 끝난 지 2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고.

서둘러 시청자들의 반응을 살폈다.

역시나 방송 게시판을 가득 메운 글들.

-아, 벌써 화요일 끝났어. 언제 월요일까지 기다리냐.

└이 드라마 때문에, 월요병 극복함ㅋㅋ

└인정. 회사 가기 싫은 월요일인데, 이거 보고 싶어서 월요일 기다리는 중. 아이러니하네.

-진희성이 처음에 불륜 드라마 한다고 해서 진짜 싫었는데, 드라마 고르는 안목 인정한다.

-와, 오늘 연기 지렸다.

└그러니까. 연기 잘하니까 보는데 더 화나. 진짜 내 남편이 바람피우는 것 같음.

└남편 얼굴이 진희성이잖아? 나 같으면, 불안해서 집 밖에 안 내보낸다.

└맞지. 남편이 진희성인데, 어떻게 내보내. 절대 집 밖에 못 보내ㅋㅋ

-나 진희성 찐팬인데, 배역 연기 너무 잘해서 진짜 얄미워. 어캄?

-진희성 연기 개잘해서 화나ㅡㅡ

-희성 오빠, 순수한 얼굴로 저런 역 소화해내는 거 미친 거 아니냐?

잠은커녕, 댓글을 하나하나 다 읽어 내려갔고.

집에 도착하는 길 내내 그 댓글들로 인해 힘을 얻었다.

나는 휴식이 아닌, 다음 날 촬영 대본을 집어 들었다.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지금은 잠보다 연습이 더 중요했으니까.

그리고 외웠던 대사들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

“희성 씨, 어제 방송 반응 봤어?”

송 감독이 밝은 얼굴로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네, 반응 너무 좋던데요. 시청률도 잘 나오고요.”

그는 내 말에 어깨를 두드리며 답했다.

“희성 씨 연기가 좋아서 그렇지, 뭐.”

“아유, 아닙니다. 감독님이 잘 찍어주신 덕분에 제가 잘 나와 보이는 거죠.”

송 감독은 호탕하게 웃으며 나와 함께 현장으로 걸어갔다.

“희성 씨는 연기도 잘해, 사회생활도 잘해. 못하는 게 대체 뭐야? 하하.”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시작된 촬영.

“안녕하세요.”

현장에 있던 신민영이 송 감독을 향해 인사를 건넸고.

옆에 있던 나 역시 그녀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녀 또한 아무 말 없이 내 인사에 눈빛을 보내며 인사했지만.

신민영과 나 사이에는 차가운 기운이 맴돌았다.

그 싸늘함에 송 감독이 우리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뭐야, 둘이 무슨 일 있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신민영이 어깨를 들썩이며 답했다.

“아니요.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러고는 홱 뒤돌아 촬영 준비를 시작하는 그녀의 모습.

굳이 그녀와 이런 사이를 풀기 위해 노력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텐트에서 내게 했던 행동들은 누가 봐도 고의였지만.

끝까지 발뺌하는 그녀에게 따져 물으며 사과 받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고.

그렇다고 내가 먼저 다가가 그녀와 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지금껏 친분을 쌓아왔던 그녀의 반전 행동에 놀라고 피해를 받은 건 나였으니까.

촬영을 하는 데 불편한 요소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사적인 감정이 연기를 할 때 영향을 받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신민영 역시, 카메라가 돌면 곧장 배역에 몰입해 밝은 얼굴로 내게 다가왔고.

우리는 그렇게 비즈니스로 연기에 임했다.

애초에 친분이 쌓였을 때도, 사적인 친함이 연기에 묻어나지는 않았지.

그래서 이 상황과 관계가 그렇게 불편하지만은 않았다.

단지, 삼총사라고 불렸던 우리가 사라졌을 뿐.

점점 바빠지는 촬영에, 그런 여유로운 대기마저 사라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레디, 액션!”

촬영이 시작되자마자 역시나 신민영과 나는 누구보다 애틋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연기를 이어나갔다.

한참의 촬영이 이어진 후.

“컷, 오케이.”

송 감독의 사인으로 신이 마무리되었고.

“쉬었다가 다음 신 시작할게요.”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현장을 걸어 나왔다.

그때.

“희성 선배!”

서인우가 나를 기다렸다는 듯 내게 다가오며 불렀고.

“어, 인우야. 촬영은?”

“나는 오늘 무한 대기야. 완전 저녁에 촬영 있어.”

“아이고, 오늘 고생이겠네.”

서인우는 나를 따라 걸으며 답했다.

“선배는?”

“나도 지금은 한참 기다려야 해서 차에서 좀 쉬려고.”

“그럼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나?”

평소 서인우와는 조금 다른 반응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수다를 떨던 그가, 갑자기 시간을 갖고 이야기를 하자는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무슨 일 있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에게 묻자, 서인우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뭐 심각한 일은 아닌데….”

“이 자체가 심각한데?”

나는 발걸음을 빠르게 옮겨 차로 이동했고.

함께 차에 올라탄 서인우를 확인하자마자, 문을 닫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차 안.

나는 덩달아 심각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왜, 뭔데. 무슨 일이야?”

“흐음…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싶었는데, 그래도 선배한테는 먼저 말하고 싶어서.”

뜸을 들이는 서인우를 바라보며, 나는 마른침을 삼켜냈다.

그리고 눈에 힘을 준 채 고개를 끄덕이자, 서인우가 긴 심호흡을 하며 내 눈을 피했다.

“선배, 나 사실… 얼마 전부터 만나는 여자 생겼어.”

서인우의 말에 나는 그 긴장감이 확 풀어졌다.

“뭐야, 그걸 무슨 큰일 난 것처럼….”

그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재차 입을 열었다.

“민영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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