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27)화 (127/303)

127화 #24 – 두 얼굴의 그녀 (4)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래요?”

신민영을 향해 휴대 전화를 내밀었지만.

그녀는 보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게 뭐든 제가 왜 봐야 하죠?”

신민영이 팔짱을 끼고 몸까지 옆으로 돌린 채, 나를 곁눈질로 훑어보았고.

나는 영상을 재생시킨 뒤, 그녀의 얼굴에 내밀었다.

“민영 씨,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요?”

미간에 힘을 준 채 그녀를 바라보았고.

신민영은 누그러진 얼굴로 영상을 슬쩍 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

변명조차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

너무나 선명하게 찍힌 영상에 신민영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재차 들려오는 영상 소리에 나는 심장이 다시 쿵쾅대기 시작했고.

영상 속 신민영의 모습을 생각하면, 여전히 온몸에 소름이 쫘악 돋아났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신민영의 얼굴을 바라보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웃고 떠들던 그녀와 나.

반려묘를 키우는 그녀의 잘못됨을 꼬집어 주려다 이렇게까지 멀어져버린 우리의 관계가 머릿속에 스쳤고.

그렇지만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잘못된 생각을 눈감고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건 단순한 의견 충돌이 아닌, 신민영이 잘못한 것이니까.

모르는 사람이라면 굳이 언쟁을 펼치지 않아도 됐지만.

오히려 친한 사이였기에, 그녀에게 올바른 행동을 알려주려 했던 것이지.

그리고 나는 한껏 당황한 신민영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녀가 내게 사과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의로 내 몸에 물건을 떨어뜨려 다치게 한 이 행동을 그저 사과 한마디로 넘어가는 게 맞을까?

그렇다고 해서 신민영에게 그 어떤 보상을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말이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신민영이 이렇게 무서운 사람이었던 건지.

오만 가지의 생각이 머릿속을 뒤흔들고 있을 때.

신민영이 어깨를 들썩이며 입을 열었다.

그것도 아주 태연한 말투로.

“저거 실수로 그런 거예요.”

이 상황에서 당황한 건 그녀가 아닌, 바로 나였다.

“예? 실수요?”

“네, 저렇게 옆에서 자고 있는 줄 몰랐어요.”

“그게 무슨….”

텐트에 들어오자마자 그녀의 몸과 눈은 나를 향해 있었고.

나를 확인한 뒤, 내 몸 쪽으로 물건을 떨어트린 게 꽤 선명하게 찍혀 있는데.

어떻게 사과를 할까 싶었던 그녀가, 오히려 당당하게 실수라고 외치는 모습에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민영 씨, 이런 거 한 번 아니잖아요.”

“한 번 맞는데요?”

뻔뻔한 그녀의 태도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쉰 뒤,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 몸에 멍 개수가 한 개가 아니에요.”

“그거 제가 그런 거 아니잖아요. 증거 있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따져 묻는 그녀에게, 결국 다음 영상.

그리고 그다음 영상까지 재생시켜 그녀의 얼굴로 내밀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그녀의 대답은 더욱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혼자 자다가 몸부림쳐서 다친 거 아니에요?”

“이거 영상 안 보여요?”

“뭐… 한 번 실수로 음료수 캔 떨어뜨린 건, 제가 모르고 한 건데. 이렇게까지 화내시니까 사과할게요.”

“민영 씨, 진짜 이런 사람이었어요?”

내 말에 그녀는 팔짱을 풀며 눈을 아래로 내린 채 말했다.

“하아… 그럼 미안하게 됐네요.”

그러고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홱 뒤돌아 매니저에게로 향했다.

신민영의 사과와 태도에 나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얼얼했고.

저 멀리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민영… 진짜 미쳤네….”

***

“이번 신 아주 중요한 장면이니까, 감정 최대한 잘 표현해야 돼.”

송 감독이 대본을 가리키며 말했고.

나 역시 꽤 많이 연습한 신이었기에, 눈에 힘을 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상대역으로 등장하는 신민영 역시 진지한 얼굴로 머리를 흔들었다.

오전에 그녀와 일이 있었지만.

그 감정을 연기에 담아낼 수는 없는 노릇.

그렇다고 그녀에 대한 마음을 온전히 버릴 수는 없었지만.

연기에서 만큼은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극 중 신민영에게 몰입해야 했다.

그녀 역시 카메라가 돌기 시작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내게 웃으며 다가왔다.

“이번에도 우리 희성 씨랑 민영 씨 케미 잘 보여줘. 하하.”

아무것도 모르는 송 감독은 양손으로 우리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고.

신민영과 나 사이에는 미묘한 싸늘함이 흐르고 있었다.

송 감독이 메가폰을 쥐고 소리쳤다.

“레디, 액션!”

그의 한마디로 현장은 바람 소리도 들려오지 않을 정도로 조용해졌고.

나는 재빠르게 극 중 역할에 몰입했다.

내 앞에 서 있는 신민영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 조금 전과 달리 밝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 왔어요?”

신민영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겼고.

나는 그녀의 말에 곧장 입을 열었다.

“어.”

짧은 내 대답에 그녀는 내게로 다가와 겉옷을 붙잡았다.

“옷은 내가 치울게, 당신은 얼른 씻고 밥 먹어요.”

나는 그녀의 손을 차갑게 뿌리치며 답했다.

“아니, 나 다시 나가봐야 해. 잠깐 옷 갈아입으러 왔어.”

“어제는 야근한다고 아침에 들어와서 씻고 옷만 갈아입고 나가더니, 오늘은 또 약속이야?”

신민영이 짜증 섞인 말투로 내게 소리쳤고.

그런 그녀를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각자 하고 싶은 대로 살자. 그게 네가 원하는 거 아니었어?”

신민영을 뒤로한 채, 드레스 룸으로 걸어가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고.

그녀는 내가 벗어 바닥에 내려놓은 옷을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신민영의 태도에 미간이 일그러졌고.

“뭐 해. 왜 냄새를 맡고 있어?”

순간.

신민영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갔고.

그녀는 움직이던 내 몸을 가로막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너… 정말 바람피우니?”

신민영의 눈이 찡긋거렸지만.

나는 그녀를 곁눈질로 쓰윽 훑은 뒤.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옷을 입었고.

“이거 여자 향수 냄새잖아.”

그녀의 얼굴은 점점 붉어지더니, 내 곁으로 다가와 옷을 집어 던졌다.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생사람 잡지 마.”

나는 눈에 힘을 주며 그녀에게 소리쳤고.

신민영은 입술을 꽉 깨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당신… 어제 아리 호텔에서 나온 거 본 사람이 한둘인 줄 알아?”

그녀의 말에 내 동공이 살짝 흔들렸지만.

그 감정마저 컨트롤하며 대답했다.

“그게 뭐.”

“그게 뭐냐고?”

신민영이 뒷목을 손으로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당신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주방으로 걸어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녀는 흥분한 상태로 내 뒤를 따라오며 외쳤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랑 바람을 피우지 그랬어….”

나를 따라오던 신민영은 바닥에 주저앉았고.

그런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물 잔을 내려놓으며 읊조렸다.

“그게 마음대로 되면, 사랑이야?”

“…뭐?”

신민영이 기가 차다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고.

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사람 마음이 그게 어디 컨트롤되는 거냐고.”

내 말에 신민영은 스르르 자리에서 일어났고.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 사람… 내 동생 와이프잖아.”

그녀와 나 사이에 차가운 공기가 맴돌았고.

잠시 아무런 대화가 오고 가지 않았지만.

허공에서 마주친 우리 둘의 눈빛에서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게 왜, 그럼 사랑에 빠지면 안 되는 거야?”

“당신… 정말 그런 사람이었어?”

내 입술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고.

주체할 수 없는 마음에 몸을 들썩일 정도로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다.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내 사랑이 움직이는 대로 한 게 잘못이야?”

결국 터져버린 외침.

울부짖듯 소리친 뒤, 잔뜩 헝클어져 버린 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렸고.

신민영이 목 놓아 소리치며 울기 시작했다.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래. 나만 사랑한다며….”

그녀의 눈물은 어느새 얼굴을 가득 적셨고.

그런 신민아를 보는 내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갔다.

마치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는 여자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울지 마. 더 정떨어져.”

“…….”

조금 전까지 흥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나는 세상 가장 차갑고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급격히 변하는 내 표정은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고.

가늘게 뜬 눈으로 신민영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혼하고 싶으면 어디 한번 해봐. 당신이 그렇게 할 수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입술은 옅게 올라갔고.

내 얼굴로 줌 인되는 카메라.

독기 어린 눈빛을 가득 담아낸 뒤.

“컷, 오케이!”

송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그리고 이내 터져 나온 박수 소리.

“이야.”

“와아….”

여기저기서 스태프들의 감탄이 터져 나왔고.

송 감독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희성 씨, 뭐야. 연습을 얼마나 한 거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영 씨도 연기 아주 좋았어.”

그녀는 언제 울었냐는 듯 밝게 웃으며 일어났고.

송 감독은 재차 입을 벌리고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희성 씨, 뭐… 바람 많이 피워봤어?”

“예?”

“왜 이렇게 잘 살리는 거야. 보는데 연기인 걸 알면서도 화를 불러일으키더라니까?”

“하하, 칭찬이신 거죠?”

우리의 대화에 조감독은 옆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드라마 방영하고 나면, 길거리에서 다들 희성 씨한테 한 소리들 하겠는데요?”

그의 말에 현장에 있던 스태프들은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국민 바람남 되는 거 아닙니까? 하하.”

송 감독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답했다.

“그만큼 연기를 너무 잘했다는 뜻이지. 배역으로 밖에서 욕먹는 거, 그거 배우한테는 칭찬이야.”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촬영은 계속 이어졌다.

***

회식 장소 앞에 하나둘 차량이 도착하기 시작했고.

나는 차에서 내리기 전,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기다리던 드라마 1화 방송 날.

시청자 반응을 함께 살피기 위해 드라마 시작 2시간 전에 회식 장소로 모두 모였고.

시간이 다가올수록 점차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득 떠오른 한 사람.

최서빈이었다.

“형, 그 블랙맨 1화는 아직 시작 안 했지?”

내 물음에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한 달 정도 있다가 시작이야. 우리 드라마 8화 정도 나가면, 거기 1화 나갈 거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휴대 전화를 든 채 생각에 잠겼다.

“희성아, 안 내릴 거야?”

멍하니 휴대 전화를 보는 내게 김 실장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고.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그에게 답했다.

“형 먼저 가 있을래?”

“무슨 일 있어?”

“아니. 나 잠깐 뭐 좀 하고 내리려고.”

내 말에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서 내렸고.

홀로 남은 차 안.

나는 최서빈의 전화번호를 누른 채, 발신 버튼 위에서 손을 움찔거렸다.

“선배님 아직 나한테 화가 많이 나 있으려나?”

그를 떠올리며 고민하던 그때.

결국, 발신 버튼을 꾹 눌렀다.

짧은 신호음이 울리고.

이내 들려오는 최서빈의 목소리.

-여보세요?

“선배님, 저 희성이에요. 통화 가능하십니까?”

-아… 어.

여전히 딱딱한 그의 말투.

나는 그에게 공손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배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뭔데?

“드라마요. 선배님과 작품을 같이 못 하게 된 거,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에이, 됐어. 저번에 사과했잖냐.

“그래도요. 정말 죄송합니다. 선배님과 작품을 하기 싫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니거든요. 작품이나 배역이 저랑 맞지 않은 거라….”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수화기 너머로 최서빈의 옅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말인지 알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좋은 작품으로 선배님과 꼭 같이 연기하고 싶습니다.”

-그래. 연락 줘서 고맙다, 희성아.

예전으로 돌아온 듯한 최서빈의 목소리.

다시 살갑게 나를 챙기던 그의 말투에 나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닙니다. 촬영 중이십니까?”

-응, 너는 오늘 첫 방송 아니야?

“네, 맞습니다. 알고 계셨어요?”

-당연하지. 드라마 잘 될 거야. 응원할게.

“감사합니다.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선배님.”

-그래, 조만간 얼굴 보자.

“예, 들어가세요.”

전화가 끊어진 후.

나는 계속 얹혔던 가슴속이 사이다를 벌컥벌컥 들이켠 듯 쏴아 풀리는 느낌이었다.

“하아….”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던 마음.

그 마음이 이 한 통의 통화로 풀어졌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차 문을 벌컥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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