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26)화 (126/303)

126화 #24 – 두 얼굴의 그녀 (3)

“그게… 신민영 씨가요….”

박 PD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네, 무슨 일 있었나요?”

“음… 이걸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그의 말에 나는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신민영이 지금 내게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까.

그녀가 혹시 박 PD에게 와서 내 뒷이야기를 한 건가?

아니면, 내 다큐멘터리에 인터뷰라도 했나?

여러 가지의 상황을 떠올리며 눈동자를 굴렸지만, 확신을 할 수는 없었다.

다만 짐작하건대 그녀가 내게 안 좋은 말이나 행동을 했을 거라는 것.

그것만은 박 PD의 다음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눈치챌 수 있었다.

물론 그녀가 내게 좋지 않은 무언가를 했다는 게,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당황스럽기는 해도 그저 그러려니 넘어가고 싶었다.

뭐… 누구나 뒷담화 정도는 할 수 있는 거니까.

그게 신민아였다는 게 슬프기는 하지만 말이다.

씁쓸함을 삼켜내며, 나는 박 PD를 향해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혹시 민영 씨가 제 안 좋은 이야기를 하던가요?”

내 말에 박 PD는 입술을 말아 넣은 채 답을 망설였고.

나는 서둘러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런 거라면, 제게 알려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누구나 뒤에서 이야기는 할 수 있잖습니까?”

애써 미소를 짓는 내게, 박 PD는 더욱 심각해진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저도 그런 수준이었다면, 굳이 희성 씨에게 와서 전달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예상 밖의 대답에 나는 순간 미간이 찌푸려졌고.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은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단순히 뒷담화와 같은 수준을 넘었더라고요. 꼭 아셔야 할 것 같아서….”

그는 곧장 휴대 전화를 열어 무언가를 연신 클릭했다.

그리고 울리는 알람 소리.

딩동.

딩동.

딩동.

쉴 새 없이 울리는 내 휴대 전화의 알람.

연속해 울리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머니 속 휴대 전화를 꺼냈고.

다름 아닌, 박 PD가 보낸 메시지들이었다.

하나도 아닌 몇 개의 메시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메시지를 클릭했고.

그것들은 모두 몇 분짜리의 영상들이었다.

“이게 뭡니까?”

나는 휴대 전화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박 PD를 향해 물었고.

그는 걱정 가득한 표정과 낮게 깔린 목소리로 답했다.

“우선 차에 타셔서 꼭 한 번 확인해 보세요.”

“…네.”

박 PD는 내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고.

우리는 그렇게 인사를 나눈 뒤, 각자의 차로 이동했다.

***

‘재생.’

화면은 어두운 촬영 현장이 보였고.

“희성 씨가 여기서 쉬시는 거죠?”

박 PD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다음 촬영이 새벽이라 몇 시간 자다가 나올 겁니다.”

“그럼 카메라만 설치해 두겠습니다.”

화면은 박 PD의 손에 들린 것처럼 흔들거리고 있었고.

김 실장과 박 PD의 대화 소리만이 오디오를 가득 메웠다.

“그냥 잠만 자는 건데, 여기도 찍으시는 거예요?”

“예, 카메라가 돌지 않을 때의 장면들을 연출하는 거니까요. 뭐, 무대의 뒷면 같은 거죠.”

“그렇겠네요. 시청자분들은 배우의 쉬는 시간을 아실 수가 없으니까.”

“네, 희성 씨 쉬시니까, 저도 카메라만 설치해 두고 빠지겠습니다.”

“그럼 고생하십시오.”

“넵.”

그 대화를 끝으로 어디론가 걸어가는 김 실장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투둑.

박 PD는 텐트의 문을 열고 조심스레 들어왔고.

카메라에는 내가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이 찍히고 있었다.

이 영상이 아마 첫 번째 영상인 듯 보였다.

저 옷으로 봐서 내가 처음으로 텐트에서 잔 날이었던 것 같으니까.

박 PD 역시 텐트에 처음 들어왔는지, 여기저기에서 나를 비추며 카메라 고정할 자리를 찾는 듯 보였다.

바스락-.

그의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카메라는 내 전신이 보이는 곳에 설치가 되었다.

띠리리.

그때, 영상 속 박 PD의 휴대 전화가 울렸고.

“여보세요. 어, 나 지금 카메라 설치했어. 그래? 알겠어, 바로 갈게.”

그 통화를 끝으로 박 PD는 곧장 텐트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텐트에 홀로 남은 나.

영상 속에서 나는 깊은 잠에 빠졌는지, 미세한 뒤척임도 미동도 없이 잠을 자고 있었다.

이어지는 정적인 영상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무려 5분짜리 영상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기에는 별다른 특이점이 보이지 않았다.

손으로 영상을 빠르게 넘기던 도중.

잠깐만.

박 PD가 나간 지 3분 정도가 지났을까.

재차 텐트의 문이 열렸다.

나는 눈에 힘을 준 채, 들어온 사람에게 집중했고.

긴 머리를 손으로 넘기며 들어오는 사람.

한눈에 보아도 신민영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휴대 전화 카메라가 아닌, 방송용 카메라였기에.

화질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너무나도 선명하게 신민영이었다.

평소 텐트에 여배우가 들어온 적이 없었기에, 그녀의 등장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고.

심지어 내가 자고 있는 것을 확인한 뒤에도 나가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숨을 죽인 채 계속 영상을 지켜보았다.

신민영은 나를 보고 놀라기는커녕, 이미 있는 것을 알고 왔다는 듯이 내 움직임을 살폈고.

이어 그녀의 행동에 나는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툭툭.

텐트를 고정하는 지지대를 발로 차기 시작했고.

꽤나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는 지지대가 무너지지 않자, 짜증을 내는 표정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다.

다큐멘터리 카메라가 텐트 천장에 달려 있었지만,

신민영은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그걸 알았다면 그녀가 이런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터.

의미심장한 그녀의 행동에 영상을 보던 나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설마.”

그리고 이내 그녀의 손이 움직였다.

툭-.

텐트 안 선반에 놓여 있던 작은 캔을 손으로 밀어냈고.

음료가 들어 있던 캔은 그대로 내 다리 위로 떨어졌다.

“미친…!”

영상을 보던 내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입을 틀어막은 채 영상을 바라보았다.

서둘러 텐트 밖으로 몸을 피해 내 동태를 살피고 있는 신민영의 모습.

너무 깊은 잠에 빠졌는지, 나는 곧장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첫 번째 영상이 끊겼고.

곧장 재생되는 두 번째 영상.

같은 텐트 안.

첫 번째 영상과 다른 점은 단 하나였다.

그저 신민영과 내 옷이 첫 영상과 다르다는 것.

다른 날이다.

달라진 점은 하나도 없었다.

잠을 자고 있는 나.

그리고 고의적으로 물건을 내 몸 위로 떨어뜨리는 신민영의 악랄한 모습.

그런 영상들이 쭉 이어졌고.

나는 영상을 보는 내내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분노가 차오르는 것을 떠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현장에서 하하 호호 웃던 신민영에게 저런 모습이 있었다는 게.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다.

지금까지 함께 지내온 그녀가 맞는 건가?

그러고 보니.

항상 텐트에서 자고 나면 다리나 팔에 멍이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어디서 부딪쳤나, 라는 생각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계속해서 하나둘 생겨나는 멍 자국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텐트에서 쪽잠을 청하고 난 뒤에 몸이 뻐근하던 것.

그것 역시 야외에서 잠을 자고, 무척이나 부족한 수면 시간 탓을 했는데.

이 모든 게 신민영의 이런 행동 때문이었다니.

지금까지 알던 그녀의 모습과 너무나도 괴리감 있는 영상 속 그녀의 행동에,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영상을 모두 확인하고 난 뒤에도.

잔상처럼 떠오르는 그녀의 모습에 자꾸만 쿵쾅거리는 심장은 좀처럼 진정될 줄을 몰랐다.

“희성아, 무슨 일 있어?”

내 모습을 본 김 실장은 놀란 얼굴로 물었고.

아직 상황 파악이 끝나지 않았기에, 그가 걱정할세라 말을 돌렸다.

“아니야. 그냥 SNS 구경하고 있어.”

“아, 난 또. 무슨 일 있는 줄 알았네.”

“그런 거 없어.”

김 실장은 다시금 시선을 돌려 운전에 집중했고.

나는 표정을 감추며 생각에 잠겼다.

대체 신민영이 내게 왜….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건 지난 고양이 일밖에 없었다.

그날 나와 고양이 이야기를 나눈 뒤.

내게 쌀쌀맞은 태도로 대한 그녀였기에.

그 일로 내게 이런 행동을 보인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잠을 자고 있는 내게 이런 행위는 선을 넘어도 충분히 넘은 모습이었고.

도무지 그녀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박 PD가 보낸 영상을 모두 휴대 전화에 저장했다.

이거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은데?

***

다음 날, 촬영장에 도착할 때까지.

머릿속은 온통 신민영 생각으로 가득했다.

아직 김 실장이나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이 일을 굳이 공론화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직 그녀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고.

물론 듣는다고 해서 그녀의 잘못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신민영의 입에서 직접 이 일에 대해 듣고 싶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게 그런 짓을 한 건지에 대해.

끼익.

깊은 생각에 잠겼던 터라, 생각보다 금방 촬영장에 도착했고.

“희성아, 도착했어.”

“응.”

김 실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맞다. 이번 촬영하고, 월요일에 바로 첫 방송인 거 알지?”

“오늘 일요일이잖아.”

“어, 내일이네. 첫 방송.”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을 이어갔다.

“내일 촬영은 몇 신 없을 거야. 촬영 일찍 마무리하고 회식하면서, 같이 1화 방송 본다고 하더라고.”

“좋네.”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그를 따라 내리며 촬영 준비를 시작했고.

그때.

옆으로 도착한 익숙한 차량 한 대.

신민영을 태운 차량이었다.

드르륵.

곧이어 문이 열리고, 신민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예전과는 다른 차가운 인사.

하지만 영상에서 본 것처럼 나를 향한 분노가 가득해 보이지는 않았다.

나에게 아무 감정도 없는 것처럼 대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미간을 찌푸렸고.

“형, 나 잠깐만 민영 씨랑 이야기 조금만 하고 현장으로 갈게.”

평소 신민영과 친분이 두터웠기에, 김 실장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돌았다.

나는 서둘러 신민영에게로 향했고.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민영 씨.”

“네?”

“잠깐 저랑 이야기 좀 하시죠.”

신민영은 내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무슨 얘기요?”

그녀의 태도에 신민영의 매니저가 내게로 다가왔고.

나는 목소리를 낮춰 그녀에게 답했다.

“둘이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데, 잠깐 저쪽 가서 얘기 좀 하죠.”

내 말에 그녀는 탄식을 내뱉었다.

“그냥 여기서 해요. 나는 별로 희성 씨랑 할 말 없는데.”

텐트에서 자신이 찍혔다는 걸 전혀 모르는 태도.

하긴, 알고도 그랬을 리가 없으니까.

나는 그녀의 귓가로 다가가 작게 읊조렸다.

“텐트에서 있었던 일인데, 여기서 크게 얘기해도 됩니까?”

“…….”

내 말에 신민영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고.

그녀는 재빨리 자신의 매니저를 향해 외쳤다.

“매니저님, 저 잠깐만 희성 씨랑 얘기할 게 있어서, 다녀올게요.”

“무슨 일인데?”

“그냥 얘기요. 잠깐이면 돼요.”

“알겠어, 빨리 와야 한다.”

그녀의 매니저 역시 어깨를 으쓱이며 우리를 보냈고.

나와 신민영은 차량 뒤쪽으로 다가가 주변을 살핀 뒤, 입을 열었다.

“민영 씨, 촬영장 뒤에 텐트 알죠?”

내 말에 그녀는 전혀 모른다는 얼굴로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아니요?”

뻔뻔한 그녀의 말에 나는 실소가 터졌고.

“근데 왜 방금 텐트 일 이야기하자니까 따라온 건데요?”

“…그야, 희성 씨가 할 말이 있다고 하니까 온 거죠.”

“다 알고 왔습니다. 저 텐트에서 잘 때, 대체 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신민영이 잔뜩 찡그린 얼굴로 몸을 뒤로 빼며 답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게 설명해요. 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발뺌을 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거짓이라고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고.

나는 결국 신민영에게 휴대 전화를 내밀었다.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