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25)화 (125/303)

125화 #24 – 두 얼굴의 그녀 (2)

“컷, 오케이!”

송 감독은 연기에 흡족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야, 희성 씨. 이번 연기 너무 좋았어.”

그는 내 옆으로 다가오며 어깨를 두드렸고.

“감사합니다, 감독님.”

나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민영 씨도 분노하는 연기가 일품이던데, 다음 신도 감정 이어서 가보자고.”

그의 말에 신민영 역시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답했다.

“네, 걱정 마세요.”

“내가 캐스팅을 아주 잘했지. 이렇게 민영 씨랑 희성 씨가 사적으로도 케미가 좋으니까, 연기가 이렇게 잘 나오는 거 아니야. 하하.”

나와 신민영 또한 그를 따라 웃고는 있지만, 어색한 기류가 뿜어져 나왔다.

며칠 전.

그녀의 반려묘에 대한 이야기로 작은 논쟁이 있었던 날.

그날 이후, 신민영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달라졌다.

벌써 두 번째 작품을 함께하는 우리는 사소한 의견 충돌이 일어날 때도 가볍게 넘어가고는 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신민영은 내게 꽤나 쌀쌀맞았고.

그럼에도 최대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나를 아예 무시하지는 않는 듯 보였다.

다만, 내게 먼저 사적인 대화를 걸지 않는다는 것일 뿐.

“그럼 다음 신으로 바로 이어가 볼게요.”

송 감독은 나와 신민영의 어깨를 두드린 후.

다시 카메라 밖으로 걸어갔고.

우리는 허공에서 눈을 마주치며, 곧장 감정을 잡았다.

“레디, 액션!”

몇 번의 테이크가 이어진 후.

우리는 오전 촬영을 끝냈고.

“고생하셨습니다.”

신민영과도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나눈 뒤.

따뜻한 밥 냄새가 풍기는 밥차로 향했다.

김 실장과 함께 밥차에 줄을 서 있던 그때.

“선배!”

소리치며 손을 흔드는 서인우의 모습.

“어, 인우야.”

그는 저 멀리서 달려오며 내게 인사했고.

나는 그런 서인우를 향해 수저를 뜨는 제스처를 취하며 물었다.

“밥은 먹었어?”

“응, 밥차 오자마자 매니저님이랑 먹었지. 선배도 다음 촬영 오후 늦게 있지?”

매일 붙어 있다 보니, 내가 나오는 신이 언제 촬영인지 빠삭하게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그의 말에 피식 웃으며 답했다.

“내 촬영까지 다 꿰고 있네?”

“당연하지.”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대단하네. 근데 밥도 다 먹었다면서, 여기는 왜 왔어?”

“아, 맞다.”

서인우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선배, 그저께 내가 말했던 게임 기억나?”

배우가 현장에 와서 하는 일 중에 절반은 대기다.

그래서 대기하는 와중에 연기 연습을 하고도 남는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방법 중 하나가 배우들과 노는 것이었지.

나와 서인우, 그리고 신민영까지 우리 셋은 늘 함께 모여 수다를 떨기도 했지만.

각자 승부욕이 강해 게임으로 내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가장 장난기가 많고 활발한 서인우가 늘 게임 종류를 가지고 오고는 했지.

“그럼, 이번 게임도 준비했어?”

“응, 이번에는 아마 쉽지 않을걸?”

서인우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눈썹을 올렸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오오, 이번에 나한테 또 지겠는데?”

“아니야. 이번 게임에는 아마 민영 씨랑 희성 선배가 커피 쏴야 할 거야. 기대해.”

“하하, 알겠어. 그럼 나 밥 먹고 갈게.”

서인우는 머리를 흔들며 답했다.

“응, 민영 씨도 온다고 했으니까, 밥 먹고 바로 와.”

“알겠어.”

“밥 맛있게 먹어.”

서인우는 내 옆에 있는 김 실장을 향해서도 고개를 숙였다.

“김 실장님도 식사 맛있게 하세요.”

“네.”

서인우는 힘찬 발걸음으로 돌아갔고.

김 실장이 그런 서인우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인우 씨 참 성격 좋아.”

“맞아. 엄청 밝고 착해.”

나 역시 달려가는 서인우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식사를 마친 뒤.

기다리고 있을 서인우와 신민영에게 곧장 다가갔고.

모퉁이를 돌기 직전, 신민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나 불편해. 싫어요.”

…뭐지?

신민영의 심통 난 듯한 목소리.

그녀의 목소리에 급히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이어 들려오는 서인우의 대답.

“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해요.”

“그럼 저 갈래요.”

“민영 씨, 그래도…”

가려는 신민영을 붙잡는 서인우의 간절한 대화.

무슨 일인가 싶은 마음에, 나는 멈췄던 걸음을 서둘러 옮겼고.

“그러지 말고 같이 놀아요. 우리 삼총사가 같이 놀아야 재밌죠. 희성 선배도 바로 오기로 했는데.”

재차 들려오는 서인우의 말에 이내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내가 불편해 같이 있지 못하겠다는 신민영의 말.

그날 일 이후, 나와 함께하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다.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뒤를 돌았다.

굳이 그녀와 그날 일을 언급하며 다시 언쟁을 펼치기도 싫었고.

그때 신민영이 내뱉었던 말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녀에게 반감이 드는 마음이 컸으니까.

바로 휴대 전화를 열어 서인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인우야, 나 연습하느라 못 갈 것 같아. 이따가 현장에서 보자, 미안.

***

“오늘 잠 못 잘 텐데, 틈나는 대로 눈 좀 붙여.”

김 실장이 촬영 준비를 하는 내게 피로 회복제를 건네며 말했다.

“하아… 그러네. 오늘 밤샘 촬영이지?”

“응, 이제 방영 날짜 잡혀서, 앞으로 계속 바쁠 것 같아.”

그는 스케줄 다이어리를 펼쳐 보며 내게 설명했다.

“우리 방영은 다음 주라고 했나?”

“어, 이번 주에 찍는 게 5화 분량이고. 다음 주부터 1화 방송될 거야.”

그의 말에 나는 숨을 길게 마시고 내뱉었다.

“드디어 시작이네.”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작한 드라마였기에.

그 어느 때보다 긴장이 됐다.

그러니까 반대할 때 말을 듣지 그랬냐, 그러게 왜 그 드라마를 선택했냐, 같은 말을 듣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내 손에 들린 대본을 보며, 다시 한번 확신했다.

내가 이 작품을 선택한 게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반대했던 모두가 이 드라마의 1화를 시청하고, 박수 쳐주리라는 것을 기대했다.

걱정과 동시에 설레고 긴장되는 마음을 읽었는지, 김 실장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반응, 엄청 궁금하지?”

그의 말에 나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응, 이번 작품은 특히나 더 기대되네.”

“이번 주까지 바쁘게 촬영하고, 1화 방영 때까지는 천천히 진행될 거야.”

김 실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청자 반응 때문이지?”

“어, 반응 보고 그대로 가거나, 대본을 조금이라도 즉각 수정할 수도 있으니까.”

마지막 화까지 모두 찍은 뒤에 1화가 시작되는 사전 제작 드라마와는 달리.

방영을 하면서 제작하는 드라마의 장점이 바로 이 점이다.

시청자의 반응을 살피며 찍을 수 있다는 것.

사전 제작처럼 마지막 화까지 차분히 찍은 드라마는 작품성이 더 나은 편이지만.

곧바로 대중의 반응을 살피기가 어렵지.

그래서 더더욱 이 작품의 1화가 방영된 후의 반응은 나뿐만 아니라,

온 스태프가 귀와 눈을 활짝 열고 기다릴 터.

나는 떨리는 마음에 어깨를 들썩이며 대본을 꽉 쥐었다.

“다음 신 연습 좀 해야겠다.”

김 실장은 내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지금까지 연습했잖아. 희성아, 오늘 새벽에 촬영 많더라. 좀 쉬어.”

“그래도….”

그는 나를 등 떠밀며 입을 열었다.

“대신 미리 깨워줄게. 조금만 눈 붙이고 일어나서 연습하자. 너 지금 눈도 빨개.”

김 실장의 말에 창문에 비친 눈을 바라보자,

그의 말대로 내 눈에는 실핏줄이 터져 있었다.

며칠간 연달아 제대로 된 잠을 자지 못했기에, 이 지경이 된 모양이다.

그는 영양제를 챙겨주며 내게 말했다.

“컨디션 조절하면서 하자. 막바지로 가면 고생해.”

“알겠어. 대신 일어나서 연습하게 미리 깨워줘.”

“그럴게.”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대었고.

김 실장은 차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번에 거기 가서 자. 거기가 다리도 뻗을 수 있고, 토퍼도 다 깔려 있잖아.”

“맞네.”

며칠 전부터 자주 찾던 임시 텐트.

그곳을 이용하는 배우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매니저가 없는 배우들은 버스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고.

대부분은 촬영이 끝나고 단체로 이동했기에, 텐트에 오지 않았다.

그리고 여배우들 중 그 누구도 텐트에서 잠을 청하지 않았지.

그래서인지 항상 이 텐트에는 나뿐이었다.

“오늘도 아무도 없네.”

텅 빈 텐트 안에서 다리를 쭉 뻗으며 눈을 스르르 감았다.

홀로 이곳에서 쉬는 게 심심할 법도 했지만.

너무나도 피곤한 탓에, 눈을 감으면 딴생각을 하기도 전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혼자만 머무르는 이곳이 오히려 좋았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희성아, 일어나.”

김 실장이 내 몸을 흔들며 깨웠고.

그의 목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텐트에는 나 홀로뿐이었고.

김 실장이 내게 물을 건네며 말했다.

“촬영 준비하자.”

“응.”

잠긴 목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난 뒤.

뻐근한 몸을 일으켜 스트레칭을 했다.

“하아… 진짜 피곤하다.”

김 실장이 자연스레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꾹꾹 누르며 안마를 해주었고.

“형도 피곤할 텐데, 괜찮아.”

“아냐. 나도 쉬었어.”

밀어내는 손을 뿌리치며 김 실장은 내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그의 안마에도 찌뿌둥한 몸.

NG도 많이 나지 않고, 내가 생각한 방향과 송 감독의 방향이 같았기에.

다른 작품과 달리 크게 스트레스를 받을 일은 없었다.

수면 시간도 기존 작품들과 마찬가지였고.

그런데 유독 피곤한 몸에 나는 입술을 움찔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야외 촬영할 때마다 이상하게 몸 컨디션이 안 좋은 거 같은데?

푹 못 자서 그런 건가….

“촬영 준비, 하실게요.”

그때.

스태프의 외침이 들려왔고.

고민을 떨쳐낸 뒤,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루의 촬영이 모두 끝이 났고.

인사를 나누며 차로 돌아오던 그때.

“희성 씨.”

다큐멘터리 팀이 우르르 내게 다가왔다.

“아, 박 PD님. 오늘도 저 찍어 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김 실장이 내 옆에서 박 PD를 향해 물었다.

“PD님, 오늘은 그럼 촬영 끝이시죠?”

“네, 이후에 일정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 바로 집으로 가시는 거죠?”

“맞습니다.”

박 PD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그럼 저희도 철수하겠습니다. 내일 촬영 때 뵙겠습니다.”

“네, 내일 봬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 역시 박 PD를 향해 허리를 접었고.

박 PD는 내 팔을 붙잡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희성 씨.”

“예?”

“잠시 저랑 이야기 좀….”

그의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와 나는 차량 뒤쪽으로 향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심각한 그의 얼굴에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고.

박 PD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내 쪽으로 몸을 당겨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희성 씨, 제가 본의 아니게 뭘 하나 목격해서요.”

“목격이요?”

나는 턱을 당긴 채 눈이 휘둥그레지며 물었고.

박 PD는 쓰읍, 소리를 내고 입술을 잘근 뜯으며 답했다.

“당연히 다큐 영상에는 담지 않을 거기는 한데요….”

무슨 말이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지?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에게 말했다.

“네, 괜찮습니다. 말씀해 주세요.”

“그게… 신민영 씨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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