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24 – 두 얼굴의 그녀 (1)
첫 촬영 준비로 북적거리고 정신없는 분위기가 가득한 이곳.
‘상간녀의 유혹’ 크랭크 인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대본을 꽉 쥔 채로 심호흡을 길게 내뱉었다.
그리고 차 문을 열어 스태프들과 송 감독을 향해 다가가던 그때.
“희성 씨!”
카메라를 들고 내 앞으로 다가오는 사람들.
다큐멘터리 팀이었다.
“안녕하세요.”
“네, 잘 지내셨죠?”
“그럼요. 오늘부터 촬영하시는 거죠?”
내 물음에 박 PD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희는 조금 전에 도착해서 송 감독님께 이야기 드려뒀어요.”
“그러셨구나. 그럼 제가 할 일은….”
박 PD는 손을 가로저으며 답했다.
“희성 씨가 따로 해주실 건 없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을 거라 최대한 카메라 신경 안 쓰시고 평소대로 해주시면 됩니다.”
하루 내내 나를 찍고 있는 카메라가 있는데, 그걸 의식하지 않는다는 게 더 어려울 것만 같았지만.
의식하지 않기 위해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해 보겠습니다. 하하.”
“처음에는 불편하실 수도 있지만, 저희가 잠깐 하루 이틀 찍는 게 아니라서. 조금만 지나면 익숙해지실 거예요.”
그는 나를 안심시키며 미소를 지었고.
나는 박 PD를 향해 밝게 웃어 보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지금부터 계속 촬영할 테니까, 그대로 드라마 촬영 시작하시면 됩니다.”
“넵.”
김 실장은 곧장 내게로 다가와 함께 촬영 현장으로 걸어갔다.
첫 촬영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정리되고.
드디어 시작된 첫 신.
“우리 드라마 첫 신이니까, 열심히 한번 해봅시다.”
송 감독의 말에 너 나 할 것 없이 합창하듯 소리쳤다.
“네!”
“레디, 액션!”
이내 주변은 쥐 죽은 듯 조용해지고.
모든 시선과 카메라가 내 얼굴에 집중했다.
“하아… 이렇게 사는 것도 지겨워….”
세상의 힘든 일은 모두 내가 가지고 있다는 듯한 얼굴과 말투.
나는 양쪽 머리를 손으로 쥐어뜯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 집, 일, 집… 반복하는 것도 당신이 이렇게만 있는 것도….”
눈을 질끈 감은 채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고.
쾅-.
절로 나오는 한숨을 연속으로 내쉬며 의자를 주먹으로 세게 내려쳤다.
같은 장면을 연달아 세 번 시도했고.
“컷, 오케이!”
세 번 만에 송 감독의 입에서는 오케이 사인이 터져 나왔다.
생각보다 아주 빠른 진행이었다.
드라마든 영화든 첫 신은 말 그대로 처음이기에.
분위기와 톤, 표정 등 잡고 가야 할 것이 많다.
첫 신부터 잡아두지 않으면, 뒤로 갈수록 고치기가 힘들기 때문이지.
그래서 10번 이상의 NG가 나더라도 감안을 해야 하는데, 무려 세 번의 트라이 만에 오케이를 받았다는 사실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과 달리 무난하고 빠르게 진행이 됐기에.
현장 분위기 역시 굳어 있지 않고, 훈훈함 속에 첫 신이 마무리되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스태프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 뒤, 곧장 다음 신을 준비했다.
***
“컷, 오케이!”
송 감독의 우렁찬 목소리가 현장에 울려 퍼졌고.
나는 활짝 웃으며 허리를 접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희성 씨도 고생했어요.”
조감독이 내게로 다가오며 말을 이어갔다.
“아니구나. 희성 씨, 야간 신 하나 더 남았죠?”
“네, 맞습니다.”
“그건… 아마 몇 시간 뒤에나 시작할 것 같은데?”
그는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눈동자를 굴렸고.
나는 웃으며 그에게 답했다.
“예, 뭐 기다리는 건 익숙하죠. 하하.”
“그래요. 그럼 쉬다가 이따 봅시다.”
“넵.”
그는 곧장 현장으로 달려갔고.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카메라 밖으로 걸어 나오던 중.
“민영 씨.”
한쪽 구석에 서 있는 신민영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희성 씨!”
그녀는 활짝 웃으며 내게 손짓했고, 곧장 그녀에게로 다가가자 나를 반기는 또 한 사람.
서인우였다.
“희성 선배, 촬영 끝났어?”
“어, 인우도 있었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응, 선배. 촬영은?”
“나 이따가 저녁에 촬영 있어서, 몇 시간 대기야.”
서인우는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의자를 가리켰다.
“잘됐다. 우리도 지금 내내 대기 중인데, 같이 쉬자.”
“좋지.”
우리는 늘 그렇듯 함께 자리에 앉았고.
“희성 씨도 이거 드세요.”
신민영이 내게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고마워요.”
“매니저님이 방금 사다 주셨거든요.”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커피를 들이켰다.
“잘 마실게요.”
“네.”
그때, 조감독이 우리 옆을 지나가며 한마디를 붙였다.
“아이고, 우리 삼총사 또 모이셨네? 하하.”
“조감독님도 오실래요?”
우리의 권유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삼총사끼리 수다 떨면서 대기하고 계세요. 이따가 부를게요.”
“넵.”
그는 웃으며 우리 곁을 지나쳤고.
항상 현장 분위기는 밝았다.
삼총사라고 불리는 우리 셋은 늘 촬영이 끝나면 붙어서 수다를 떨기에 바빴고.
여러 스태프들은 우리에게 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그렇게 떠들면서 항상 할 말이 남았냐고.
하지만 우리는 몇 달 만에 만난 친구들처럼 매일 웃고 떠들었다.
“그래서 고양이는 어머님이 보고 계신 거예요?”
서인우는 커피를 마시며 신민영을 향해 물었다.
“네, 촬영 때는 엄마가 저희 집에 가서 한 번씩 봐주세요.”
그들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에게 물었다.
“민영 씨, 고양이 집사셨어요?”
내 말에 그녀는 방긋 웃으며 답했다.
“네, 저 저번 영화 끝나고 집에 계속 있으면서 조금 심심하더라고요. 그때부터 고양이 키우고 있어요.”
“원래 고양이를 좋아하셨나 봐요.”
“음… 고양이 귀엽잖아요.”
집에 있는 고양이를 생각하는지, 그녀는 눈동자를 위로 올리며 밝게 웃었고.
“아, 보여 드릴까요?”
그녀는 급히 휴대 전화를 열어 고양이 사진을 클릭했다.
“우와! 엄청 귀여운데요?”
“헐… 진짜 귀엽다.”
나와 서인우는 고양이 사진을 보며 감탄했고.
그녀의 갤러리는 온통 고양이 사진으로 가득했다.
서인우는 그녀의 휴대 전화를 받아들고,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겼고.
그러다 영상 하나가 재생되었다.
“우리 두부, 아이구 잘 먹네.”
영상 속 신민영은 고양이에게 무언가를 먹이고 있었고.
가까이 찍힌 영상 덕에 그 음식이 포도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이, 예뻐. 또 줄까?”
신민영은 영상에서 고양이에게 포도를 연신 먹였고.
나는 순간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영상이 중지되자마자 나는 그녀를 향해 물었다.
“혹시… 고양이한테 포도 먹이신 거예요?”
내 물음에 신민영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먹는 거 너무 귀엽죠?”
그녀의 말에 나는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민영 씨, 저… 포도는 고양이한테 치명적인 음식이라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내 말에 놀란 건, 신민영이 아닌 서인우였다.
신민영은 어깨를 들썩이며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내게 답했다.
“아, 그래요?”
그런 그녀의 태도에 당황한 건 오히려 나였다.
자신의 고양이에게 먹이면 안 되는 음식이라는 말에도 놀라기는커녕, 눈길을 돌려 버렸으니까.
나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친한 친구가 고양이를 키워서 들었거든요. 고양이한테 포도를 먹이면, 구토나 발작….”
신민영이 내 말을 툭 잘라 버린 채 말했다.
“아, 괜찮아요.”
“…….”
그녀의 반응에 내 눈동자는 방향을 잃고 말았다.
자신의 반려묘에게 위험하다는데, 이렇게 태연할 수가 있다니.
그러고는 오히려 다른 사진을 보이며 밝게 입을 열었다.
“저는 우리 두부가 좋다고 하면 그냥 주는데?”
악의가 없다는 순수한 얼굴로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입을 벌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반려묘를 키우려면, 먹이면 안 되는 건 상식으로 알고 있어야 해요. 제 친구는 고양이가 포도 근처에만 와도 치우거든요. 그래서 아예 집에서 포도도 안 먹고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건, 역시나 신민영이 아닌 서인우였다.
“게다가 건포도는 정말 안 좋다고 하니까, 조심하세요.”
내 권유 같은 경고에 신민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저 모카빵 먹을 때, 고양이가 달려들길래 건포도 빼서 먹이고는 하는데. 그냥 우리 두부가 좋아하는 건 그 정도로 먹어도 괜찮아요.”
“네?”
그녀의 말에 결국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고.
“민영 씨, 그러다가 정말 큰일 나요. 오늘이라도 알았으니까 꼭 조심하세요. 키우려면 그런 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신민영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고.
그녀는 기분이 나쁘다는 듯 커피를 내려놓으며 답했다.
“근데 희성 씨.”
신민영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고양이 키우는데, 제 마음대로 해도 되잖아요. 고양이 제 거잖아요.”
그녀의 말에 나는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반려동물이 아닌, 그저 소유물로 생각하는 듯한 그녀의 말투.
그런 그녀의 말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아니죠. 아무리 반려묘라고 해도 생명체를 키우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잘 알고 키워야죠. 잘못하면, 그건 동물 학대나 마찬가지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뭐라고요, 제가 그럼 동물 학대를 한다는 말이에요?”
신민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 소리쳤다.
나 또한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민영 씨가 동물 학대를 했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계속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을 주고….”
그녀는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 보였고.
말을 잘라낸 신민영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말했다.
“희성 씨가 뭘 안다고 그래요. 내 동물, 내가 알아서 키운다는데, 그냥 집에서 심심해서 키우는 건데 공부까지 해서 까다롭게 키워야 해요?”
신민영…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섭고 과격한 모습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좀 안 좋은 거 먹으면 뭐 어때?”
그녀는 계속해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을 이어갔고.
더는 그녀와 대화가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자, 서인우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 그러지 말고 우리 좋게, 좋게 이야기해요.”
그는 흥분한 신민영을 달래며 자리에 앉히려 했지만.
그녀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
자신의 반려묘를 위한 말에 저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가?
더군다나 위험할 수 있다는 말에도 그저 상관없다는 식의 반응에,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걸어가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
“오늘 새벽 촬영이 있으니까, 차에서 자고 있어. 내가 이따가 깨울게.”
김 실장이 하품을 참으며 내게 말했고.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에게 답했다.
“어제 차에서 잤더니 조금 답답하더라. 아까 인우한테 들으니까, 촬영장에 잘 수 있게 텐트를 설치해 뒀다던데?”
내 말에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었다.
“응, 저기에 임시 텐트 설치해 뒀다고 들었어. 거기서 자도 괜찮겠어?”
“그럼. 쉬라고 만들어둔 거 아니야?”
김 실장이 미소를 지으며 발길을 옮겼다.
“같이 가자. 안에 사람 없으면, 거기서 눈 좀 붙여.”
그렇게 우리는 텐트로 향했고.
늦은 밤이라 집으로 돌아간 배우들이 많아, 텐트는 텅텅 비어 있었다.
“오오, 여기 좋은데?”
나는 바닥에 펼쳐진 넓은 토퍼에 몸을 뉘었고.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답했다.
“그래, 여기는 다리도 뻗을 수 있으니까, 여기서 한숨 자기는 좋겠네.”
“앞으로 이 텐트에 와서 쉬면 되겠다.”
“그러자. 희성아, 그럼 두 시간 정도 자고 있어. 깨우러 올게.”
“형은?”
김 실장이 코를 찡긋거리며 말했다.
“아침까지 보내야 할 게 있어서, 난 차에서 작업 좀 하고 있을게.”
“알겠어.”
그렇게 나는 커다란 텐트 안에서 홀로 편하게 눈을 붙였다.
몇 시간, 아니 몇 분이나 지났을까?
스르르 떠진 눈.
손을 더듬어 휴대 전화를 바라보니, 아직 촬영 한 시간 전이었고.
재차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았지만.
이미 깨버린 탓에 다시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일어나서 연습하고 촬영에 들어가야겠다.”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아야.”
찌뿌듯한 몸에 절로 소리가 터져 나왔고.
상체를 일으켜 다리를 바라보았다.
온몸이 찌뿌둥한 게 아니라, 왜 다리가 아프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지를 걷었고.
눈에 들어오는 맨다리.
뭐지?
낮에는 보지 못했던 파란 자국.
…왜 다리에 멍이 들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