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23 – 막장과 작품 사이 (6)
“안녕하십니까.”
푹 눌러쓴 모자.
눈 아래까지 올라오는 커다란 마스크를 쓴 채 사무실로 들어왔고.
내 인사에 직원들은 미소로 화답한 뒤.
다시금 업무를 시작했다.
그대로 연습실로 향했고, 김 실장이 서둘러 나를 따라오며 어깨에 손을 올렸다.
“희성아, 왔어?”
“응, 형 오늘 바빠?”
내 물음에 김 실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계속 회사에 있지. 왜?”
“대본 좀 같이 맞춰줄 수 있어?”
김 실장은 내 부탁에 웃음 대신 무표정으로 답했다.
“그걸 뭘 정중하게 부탁하냐, 당연히 해줘야지.”
그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재차 입을 열었다.
“가서 연습하고 있어. 나 오전에 회의 있어서, 갔다가 바로 연습실로 갈게.”
“알겠어.”
그대로 김 실장은 뒤돌아 자리를 떠났고.
나는 서둘러 연습실로 향했다.
이른 오전부터 연습실에는 WG 엔터의 배우들이 각자 연습에 매진하고 있었고.
그들을 빠르게 훑으며 눈을 반짝였다.
각자 다른 생각과 연습, 다양한 준비를 하고 있지만.
결국, 꿈은 다 같을 테니까.
나와 같은 미래를 꿈꾸는 이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던 그때.
살짝 열린 문틈으로 들려오는 소리.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고.
그곳에서는 울부짖듯 연기하고 있는 한 배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가에 연신 흐르는 눈물.
애처롭게 소리치며 대사를 읊고 있는 그녀는.
다름 아닌, 옆집에 살고 있다는 김하나였다.
WG 엔터에서 차근차근 성장해 나가고 있는 그녀를 응원하면서도,
이렇게 직접 얼굴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바로 옆집에 사는데도 말이다.
엘리베이터에서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던 그녀를 이렇게 연습실에서 볼 줄이야.
나와 같이 단역에서부터 한 계단씩 올라가는 그녀를 보며,
마주치면 응원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지금까지 만난 적이 없었다.
연습실에서 만났지만, 지금도 그 이야기는 못 할 것 같았다.
너무나도 몰입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
그 모습에 나는 넋을 놓은 채 잠시 바라보았고.
김하나의 연기에 감탄을 하며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내 인사 한마디로 그녀의 연기 몰입을 깨트릴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 그녀를 뒤로한 채, 나는 연습실로 향했고.
다른 연습실의 배우들처럼.
나 또한 대본을 펼쳐들고 배역에 빠르게 몰입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오전에 일찍 나온 회사였는데.
어느덧 창밖에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고.
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다시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당신이 여기에 어떻게….”
어느새 대본을 내려놓은 채.
허공을 바라보며 상대역을 상상해갔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야. 단지….”
똑똑.
그때, 김 실장이 환한 얼굴로 연습실 문을 두드렸다.
미간을 찌푸린 채 연기를 하던 나는 그의 모습에 표정을 풀며 그를 반겼다.
“형, 회의 끝났어?”
김 실장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손을 모았다.
“너무 늦었지, 미안.”
“아니야. 연습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
그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바깥으로 턱짓하듯 입을 열었다.
“커피나 한잔하고 올까?”
김 실장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지.”
김 실장과 도착한 회사 내부의 카페.
우리는 커피를 한잔 마시며 휴식을 취했고.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 뒤.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희성아, 할 말 있어.”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김 실장의 얼굴을 보며 나는 눈썹을 들썩였다.
“뭔데, 좋은 소식인 것 같은데?”
내 말에 김 실장이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새로운 제안이 하나 들어왔거든.”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데?”
“희성이, 너를 다큐멘터리에 담고 싶대.”
“나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너. 이번에 PBC에서 특별 기획 다큐를 제작한다고 하더라고.”
어느새 커피도 내려놓은 채 그의 말에 경청했고.
“5부작인데, ‘연예계의 삶’이라는 다큐래.”
“연예계의 삶이면… 근데 5부작을 나 혼자 다 찍는 거야?”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방송과 관련된 다양한 직업으로 다큐를 만드는 거야.”
김 실장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치며 말을 이어갔다.
“배우, 가수, 희극인, PD, 작가 이렇게 다섯 가지의 방송과 관련된 직업. 이걸 5부작으로 만드는 거지.”
“오오, 배우는 누구누구 찍는 거야?”
내 말에 김 실장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답했다.
“너 혼자.”
“정말?”
“응, 다섯 가지의 직업 중에 배우는 진희성, 너로 하고 싶대.”
그의 말에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다큐멘터리에서 배우라는 직업의 대표가 나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예계는 다 가려져 있는 직업이잖아. 그만큼 다들 궁금해하는 직업이고. 그 호기심과 궁금증을 해소할 다큐.”
“그런 기획… 좋은데?”
“그치? 게다가 배우 직업의 대표를 꼭 네가 해줬으면 하더라고. 어때?”
김 실장의 말에 나는 흥미롭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더군다나 내가 배우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듣고.
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나는 김 실장을 바라보며 답했다.
“그럼 만나보자.”
내 말에 김 실장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미팅 날짜 잡아볼게.”
***
PBC 방송국, 미팅실.
똑똑.
문을 열자, 인자한 미소로 나를 반기는 사람.
박무찬 PD였다.
50대 전후로 보이는 박 PD는 온화한 얼굴로 웃으며 내게 다가왔고.
“아이고, 희성 배우님. 처음 뵙겠습니다.”
두툼한 손을 내밀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십니까, 박무찬 PD님.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아이, 당연히 알죠.”
그는 나와 맞잡은 손을 흔들며 답했고.
김 실장과도 짧은 인사를 나눴다.
“오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어서 앉으시죠.”
그의 말에 김 실장과 나는 박 PD의 맞은편에 착석했고.
우리의 앞에는 박 PD와 작가, 스태프 몇몇이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저희 다큐 이야기는 다 들으신 겁니까?”
박 PD의 질문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예, 기획 의도가 너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배우 자리에 저를 찍고 싶다고 해주셔서, 정말 영광스럽고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내 말에 박 PD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딸이 어찌나 희성 씨를 적극 추천하던지. 저희 딸내미가 희성 씨의 무지한 팬이거든요.”
그의 말에 나는 활짝 웃었고.
“따님이 보는 눈이 있으신데요? 하하.”
내 너스레에 미팅실은 금세 어색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화기애애해진 채 미팅을 이어갔다.
“그러게요. 딸아이의 영업에 저도 금방 희성 씨 팬이 됐다니까요. 허허.”
“너무 감사하네요.”
“어유, 아닙니다. 대신 가실 때, 저랑 사진 하나만 찍어주시면 됩니다.”
박 PD의 말에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게 무슨 부탁이라고요. 몇 번이고 찍어드리죠.”
우리는 그렇게 밝은 분위기 속에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가벼운 이야기들을 나누며 어색함이 온전히 사라질 때쯤.
본격적인 다큐멘터리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실장님께 들으셨겠지만, 저희가 이번에 만들 다큐 ‘연예계의 삶’은 방송계의 각 분야에….”
박 PD는 내게 방송의 주제와 목적을 설명했고.
그의 말에 눈 한번 깜빡이지 않은 채 집중했다.
한참을 이어진 그의 설명.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눈에 힘을 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너무 좋습니다. 해보고 싶어요.”
내 말에 박 PD를 포함한 작가와 스태프들은 한시름 놓은 듯 머리를 흔들었고.
나는 박 PD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근데 제가 어떤 삶인지 담기 위해 항상 따라오시는 거죠?”
“그렇죠. 연기를 하는 장면을 담기 위해 도는 카메라가 꺼진 후, 그 이후의 모습을 담기 위해서니까요.”
“그럼 제가 곧 드라마 촬영이 시작되는데, 그 스케줄 때도 계속 찍으시는 건가요?”
내 물음에 김 실장은 부연 설명을 하듯 입을 열었다.
“제가 저번에 작가님께 보내드렸던 드라마 스케줄이 있습니다.”
김 실장의 말에 메인 작가는 펜을 끄적여 박 PD에게 보였고.
그는 입을 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희성 씨 스케줄은 실장님 통해서 확인했고요. 오히려 드라마 촬영 때라 더 좋은 것 같더라고요.”
“아… 그렇겠네요.”
배우가 연기를 하지 않을 때의 모습.
그러니까, 내가 연기를 하는 스케줄이 있어야 그 모습을 더 잘 찍어낼 수 있을 터.
그렇기에 지금 이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이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 PD가 코를 찡긋거리며 입을 열었다.
“근데 그 드라마 측에서 저희 다큐멘터리 촬영을 OK 해줘야, 가능하거든요.”
그의 말에 나는 입을 벌린 채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리 내가 이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 들어갈 ‘상간녀의 유혹’ 감독의 촬영 허가가 있어야 할 터.
그렇지 않으면, 그 드라마를 찍을 시기에 다큐멘터리 촬영은 찍을 분량이 없을 테니까.
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눈썹을 늘어뜨린 채.
김 실장을 바라보자, 그는 다이어리에 펜을 끄적이며 입을 열었다.
“그건 체크해서 바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확인하고 연락 주시면 저희가 스케줄을 조정하겠습니다.”
***
“형, 만약에 드라마 측에서 다큐 촬영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나는 눈썹을 늘어뜨린 채 걱정스러운 얼굴로 김 실장에게 물었고.
그는 코를 찡긋거리며 답했다.
“혹시 안 된다고 하면, 드라마 촬영 외의 시간에만 찍는 건데… 솔직히 우리 드라마 일정이 길다 보니까, 다큐를 못 한다고 봐야지.”
“아….”
“다큐에서 우리 드라마 촬영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지는 못할 거야. 거기도 일정이 있을 테니까.”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말아 넣었다.
“그래도 너무 걱정 마. 얘기는 잘 해뒀….”
그때, 김 실장의 휴대 전화가 울렸고.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내게 전화기를 보였다.
김 실장에게 전화가 온 곳은 다름 아닌, 드라마 관계자였다.
“네, 여보세요. 맞습니다. 네, 네. 그럼요. 다큐멘터리 방송 일정이 드라마 1화 방영 시기랑 비슷해서, 홍보 효과도 분명 있을 겁니다. 예.”
통화를 하는 김 실장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고.
검지와 엄지를 이용해 OK 표시를 하며 내게 보였다.
나는 그의 제스처에 안심하며 통화에 집중했고.
“예, 그럼 제가 자세한 건 회사 들어가서 내용 전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은 김 실장은 통화가 종료된 것을 확인하자마자 내게 소리쳤다.
“희성아, 됐다!”
“와아… 된 거야?”
“어, 감독님이 흔쾌히 오케이 하셨대. 네가 주연에다가 다큐 방영으로 드라마 홍보까지 톡톡히 될 테니까.”
“그러네. 다행히 바로 오케이 해주셔서 다행이다.”
그는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신 프리프로덕션은 제외고, 크랭크 인부터 찍기로 했어.”
“그럼 다큐 촬영은 언제까지 진행되는 거야?”
김 실장이 눈썹을 들썩이며 답했다.
“우리 드라마 촬영 끝날 때까지.”
그의 말에 나는 입술을 잘끈 깨물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내 배우 인생을 고스란히 담는 첫 다큐멘터리.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