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19)화 (119/303)

119화 #23 – 막장과 작품 사이 (2)

팟-!

눈을 뜨자마자 나는 양 뺨을 손으로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꿈에서 너무나도 선명히 느꼈던 그 느낌.

난 분명 윤설하, 그러니까 여자였다.

꿈에서 성별이 바뀐 것은 처음이었는데….

더군다나 꿈에서 두 명의 시점을 꾼 것 역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남자인 유부남 최석현.

그의 시점일 때와 윤설하의 시점일 때 느꼈던 감정들은 매우 또렷했다.

최석현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

유부남이지만 윤설하에게 유혹을 당하며 느꼈던,

그 이상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짜릿했던 감정들.

그러면서도 배덕감이 들었던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었다.

지금 또한 그런 감정들을 느꼈다는 자체에 대한 비도덕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럼에도 윤설하와의 짧은 만남이 눈앞에서 선명하게 떠올랐고.

꿈에서 보지 않았던 그녀와의 일들이 영화 필름처럼 빠르게 머리에 각인되었다.

그랬다.

결국, 나는 유부남이었지만 그녀와의 일탈이 있었고.

그 일탈은 결코 깨끗하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이유가 어찌 됐든 바람이라는 건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지만.

자꾸만 떠오르는 윤설하의 얼굴에.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서재에 있던 대본을 뒤적였다.

며칠 전 집으로 가지고 왔던 대본.

‘상간녀의 유혹.’

거기서 읽었던 내용과 매우 흡사했다.

말 그대로 상간녀의 유혹에 넘어간 유부남의 이야기였으니까.

너무나 매혹적이던 그녀에게 넘어가지 않은 남자는 없었다.

대학생, 직장인, 하물며 결혼 생활을 하고 있던 나까지.

마치 범죄를 저지른 듯 심장이 떨려왔지만.

이것들은 꿈에서의 일이었고.

게다가 눈앞에 있는 대본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떠오른 꿈속 윤설하의 모습.

내내 꿈에서의 나는 최석현이었지만.

어느 순간에 눈을 뜨자, 눈앞에는 윤설하가 아닌 최석현이 보였다.

그러니까, 내가 윤설하였다는 것이지.

내가 윤설하로 꿈을 꾸었을 때, 역시 상대를 유혹할 때의 그 떨림이 고스란히 생각났다.

윤설하인 나를 바라보는 상대방의 야릇한 눈빛.

내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던 최석현의 얼굴까지.

꿈속의 나, 윤설하는 최석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의 모든 것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그가 유부남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최석현이 내 마음을 뒤흔들었으니까.

이런 꿈은 처음이었기에.

혼란스러운 마음이 가득했다.

‘상간녀의 유혹’ 대본을 보고 나서 꿈을 꾸었다는 건 알지만.

이렇게 두 명의 몸을 느껴본 적은 처음이었기에.

대체 이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대본을 꽉 붙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인지, 다른 의미인지.

정체를 알 수가 없는 꿈이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렇게 생생하게 떨리는 마음과 서로에게 닿던 손길까지.

모든 촉감이 선명했고, 그것을 떠올리면 지금도 심장이 쿵쾅거리는 꿈은,

이번이 가장 강력했다.

이 드라마… 끌리는데?

***

드르륵.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한 사람.

차현종 감독이었다.

“아이고, 벌써 왔어?”

그는 탄탄한 살집, 둥글둥글한 인상을 풍기며 룸으로 들어섰고.

룸 안에 앉아 있던 최서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차 감독님, 오셨습니까?”

“서빈 씨, 잘 지냈지?”

차 감독은 최서빈에게 악수를 청했고.

“그럼요. 감독님도 잘 지내셨죠?”

“당연하지. 일개 감독한테 무슨 일이 있겠나. 하하.”

그의 손을 맞잡아 흔든 최서빈이 재빨리 옆에 있던 임하준을 소개했다.

“감독님, 여기는 제가 전화로 말씀드렸던, 임하준 배우입니다.”

최서빈의 말에 임하준은 활짝 웃으며 허리를 깊게 접었다.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임하준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우렁찬 그의 목소리가 넓은 룸 안에 울렸고.

그의 말에 차 감독은 호탕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하하하, 젊은 친구가 아주 패기가 넘치네. 오랜만에 보네요.”

그의 말에 임하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 저를 아십니까?”

“그럼. 임하준 배우를 모르는 사람도 있나?”

차 감독은 눈썹을 들썩이며 말을 이어갔다.

“한때 여기저기에 안 나온 곳이 없었잖아.”

프로포폴 중독으로 연예계와 뉴스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장본인.

그런 그를 차 감독이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심각하거나 거부감이 드는 듯한 모습이 아닌.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기는 차 감독의 말투에, 임하준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아, 맞습니다. 이제 정신 차리고, 좋은 작품으로 복귀하고 싶습니다.”

그는 한껏 낮춘 자세로 차 감독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예를 들어 대단하신 차 감독님의 작품으로 복귀하게 된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임하준의 능글거리는 말투에, 차 감독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준 씨 성격이 아주 기가 막히는데요?”

“아, 감독님. 말씀 편하게 해주십시오.”

최서빈이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서둘러 입을 열었다.

“우선 앉아서 천천히 작품 이야기하시죠, 감독님.”

“그러자고.”

시간이 흐르고,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때쯤.

고급 일식집에서의 코스 중 메인인 회가 테이블에 올라왔다.

나무로 만들어진 커다란 배 모양.

그 위에 얇게 썬 갖가지의 회들이 나란히 펼쳐져 있었고.

그걸 뒤로한 채, 임하준은 차 감독에게 사케를 따라 부었다.

“감독님, 이제 메인도 나왔는데, 한 잔 받으시죠.”

“그럴까?”

어느새 차 감독은 임하준에게 편히 말을 놓았고.

챙-.

술잔이 부딪친 뒤.

셋은 술을 한 번에 털어 마셨다.

그렇게 가까워진 그들은 드디어 본론인, 작품 이야기로 들어갔다.

“그래서 블랙맨 대본은 다 읽어본 건가?”

차 감독의 시선은 임하준을 향했고.

그는 정자세로 고쳐 앉으며 그를 향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네, 캐릭터도 마음에 들고, 특히 대본이 너무 좋았습니다.”

“음… 안 그래도 그 주연 자리 하나에 누구를 넣어야 하나 고민을 하기는 했지.”

차 감독은 시선을 최서빈에게 돌리며 말을 이어갔다.

“아무래도 서빈 씨 주연으로 가는 드라마이다 보니까, 서빈 씨가 추천한다고 해서 기대를 많이 했어.”

“하준이가 연기는 정말 잘합니다, 감독님.”

최서빈의 말에 차 감독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응, 안 그래도 예전 작품 보면서 연기를 곧잘 하는 친구라고 생각은 했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임하준이 테이블에 머리가 닿도록 고개를 숙였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서빈 씨가 그 배역에 추천까지 하는데, 내가 어떻게 거절하겠나. 하하.”

차 감독은 호탕하게 웃으며 술을 들이켰고.

“제 안목을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서빈 씨가 하는 드라마가 망한 적이 없잖아. 물론 연기를 너무 잘하는 것도 있지만, 안목이 좋아서 그러는 거야.”

최서빈은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답했다.

“맞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번 블랙맨을 고른 거겠죠? 하하.”

그의 말로 룸 안은 더욱 화기애애해졌고.

차 감독은 임하준을 바라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이번 드라마… 무조건 잘돼야 해.”

“네,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자 차 감독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임하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나도 이번 드라마가 성공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지만, 그것보다 하준 씨가 복귀작으로 빵 터져야 할 이유는 나보다 분명하지 않겠어?”

자숙 후 돌아오는 복귀작.

임하준이야말로 드라마의 시청률이 대박 나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복귀작의 성공 여부에 따라, 앞으로의 배우 생활이 정해질 테니까.

임하준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눈을 부릅떴다.

그러고는 차 감독을 향해 굳은 얼굴로 외쳤다.

“믿고 맡겨 주시기만 한다면, 죽을힘을 다해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차 감독이 눈썹을 들썩이며 그에게 읊조렸다.

“미친 듯이 해야 해. 아무래도 복귀작이라는 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는 할 테니까.”

그는 허리를 펴고 앉으며, 최서빈과 임하준에게 술을 따르며 말했다.

“우리 이번에 아주 좋은 작품 하나 만들어 보자고!”

“네, 감독님!”

임하준이 곧장 소리쳤고.

최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위하여!”

그들의 잔은 그렇게 허공에서 부딪쳤고.

각기 다른 이유지만, 성공이라는 바람이 담긴 술잔이 머리 위 높은 곳에서 넘실거렸다.

술을 넘긴 최서빈이 차 감독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감독님, 그럼 드라마 편성은 정해진 겁니까?”

“어, 수목 드라마로 갈 거야.”

“좋네요. 그럼 크랭크 인은….”

그들의 대화는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른 채.

더욱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

탁-.

김 실장은 내가 올려놓은 대본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대본은 또 왜?”

“형, 아무래도 나 이거 해야겠어.”

이내 김 실장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고는 내가 올려둔 대본을 손으로 밀어냈다.

‘상간녀의 유혹’이 적힌 대본은 다시금 내 앞으로 다가왔고.

나는 대본이 아닌, 김 실장을 바라보았다.

“형….”

“희성아, 이건 아닌 거 같아.”

“형, 이 대본 끝까지 한 번만 읽어봐. 진짜로 몰입이….”

김 실장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네가 그때 하고 싶다고 해서, 바로 다 읽어봤어. 나도 재밌어. 굉장히 자극적이고 사람을 빨려들게 하는 소재잖아.”

“응, 그럼 그게 대박인 거잖아.”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서 안 돼. 이건 막장이야. 알잖아. 희성이 너는 지금 이미지도 좋은데, 굳이 이 드라마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

김 실장은 하나하나 따지며, 내가 이 작품을 하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그의 말에도 결심한 마음은 아주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형, 내 이미지만 좋은 작품을 하면서 성장하고 싶지는 않아. 불륜이든, 범죄든, 악역이든 뭐든 소화하면서 해보고 싶어.”

그러자 김 실장은 내 시선을 피했고.

대본을 빤히 바라보며 계속 듣기만 했다.

“특히 이 드라마 대본은 역대급이야. 안 할 이유가 정말 하나도 없다고.”

어느새 내 언성이 높아졌고.

목이 벌게지도록 핏대를 세우며 어필하자, 그제야 그는 나를 향해 물었다.

“이 작품… 정말 하고 싶은 거야?”

김 실장의 말에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

“응, 너무 하고 싶은 작품이야.”

“하아….”

그는 깊은 고민에 빠진 듯 답을 망설였고.

“형이 왜 이 드라마를 말리는지 나도 알아.”

“그런데 왜 이렇게 이 드라마를 하고 싶어 하는 거야….”

김 실장이 반대하는 이유는 자신을 위하거나, 김한나 작가가 저질렀던 불륜 때문이 아니다.

그저 내 미래를 위한 것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무작정 그의 말을 무시한 채 내 멋대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반대를 따라, 이 드라마를 포기하고 싶은 생각 또한 없었지.

오히려 내 편인 김 실장을 설득하고 싶었다.

내가 왜 이 작품을 선택했고, 왜 잘될 것 같은지에 대해.

그래서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형, 그럼 나 최소한 미팅이라도 하게 해줘.”

내 말에 그제야 김 실장은 나를 바라보았다.

“김한나 작가님이랑 이야기해 보고 싶어. 미팅하고 나서 결정할게.”

그러자 무작정 반대를 하던 김 실장이 처음으로 고민하는 표정을 보였고.

나는 연이어 그에게 말을 이었다.

“미팅만 해볼게. 그래서 아니면, 나도 이 작품 안 할 거야. 미팅… 잡아줘.”

김 실장과 허공에서 눈빛이 부딪쳤고.

몇 초의 정적이 흐른 뒤.

김 실장은 어깨를 들썩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겠어. 우선 미팅 날짜 잡아둘게.”

그의 말에 나는 그제야 입꼬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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