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23 – 막장과 작품 사이 (1)
벌컥벌컥.
머그잔에 가득 담긴 물을 한 번에 들이켜 마신 뒤.
쾅.
테이블 위에 세차게 내려놓은 최서빈.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쉰 최서빈은 그대로 걸어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거실로 향했고.
뷰를 감상할 수 있게 통유리 앞에 세팅해둔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희성이, 이거 생각할수록 괘씸하네?”
그는 소파에 널브러진 ‘블랙맨’ 대본을 곁눈질로 살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지랑 같이하고 싶어서 얼마나 찾아본 작품인데, 이걸 거절한다고?”
최서빈은 눈을 질끈 감으며 뜨거운 김을 코로 쏟아냈다.
“더 생각해 본다는 것도 아니고, 단번에 거절을 하면….”
띠리리리.
그때 울리는 그의 휴대 전화.
최서빈은 순간 놀라 몸을 움찔거리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벽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시간에 누가 전화한 거지?”
시계는 밤 11시를 향하고 있었고.
그는 어둠이 내려 여러 불빛에 반짝이는 한강.
그 주변을 달리는 수십 대의 자동차 라이트를 바라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
최서빈은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발신인: 임하준 후배]
그는 발신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임하준이 이 시간에는 무슨 일로….”
수신 버튼을 누른 최서빈은 곧장 자리를 옮겨 다시금 몸을 의자에 기댔다.
“여보세요?”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저 하준이입니다.
밝은 임하준의 목소리.
최서빈이 눈썹을 들썩이며 그에게 답했다.
“어, 알지.”
-제가 너무 늦게 전화드렸죠?
“아니야.”
-선배님 생각이 나서 불쑥 전화 드렸습니다. 잘 지내고 계십니까?
“그럼. 너는 잘 지내고?”
-예, 그때 복귀작으로 선배님과 함께 작품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판에 취소가 되는 바람에, 너무 아쉬웠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선배님은 요즘 뭐 하고 지내십니까?
“나야, 작품 준비하고 있지.”
-얼마 전에 작품을 하셨는데, 바로 하시네요. 역시 대단하십니다.
“하하, 대단하긴.”
-그럼 작품은 정하신 겁니까?
임하준의 말에 최서빈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고.
“정했….”
시선 끝에 보이는 ‘블랙맨’의 대본.
그 대본 탓에 최서빈은 멈칫했다.
그러고는 임하준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하준아, 너는 뭐 해?”
-저야 지금 백수죠. 아직 복귀작을 못 골랐습니다. 빨리 복귀해야 하는데, 열심히 고르는 중입니다.
임하준의 말에 최서빈의 한쪽 입꼬리가 옅게 올라갔고.
“너 다음 주에 시간 좀 내라.”
단호하게 말하는 최서빈의 말에 임하준은 적잖이 놀란 듯 목소리를 높였다.
-예?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나랑 감독님 보러 가자.”
이내 최서빈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
“그래서 서빈 씨하고 이야기는 잘 끝난 거야?”
김 실장이 ‘블랙맨’ 작품에 대해 물었고.
나는 입술을 내민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될 것 같더라고. 형도 그렇게 생각했잖아.”
“그렇지. 서빈 씨랑 작품 한다는 자체는 너무 좋은데, 아무리 그래도 작품이랑 네 배역을 안 볼 수는 없으니까.”
김 실장의 말에 나는 머리를 흔들며 답했다.
“서빈 선배가 내가 거절했다는 이유로 서운해할 것 같기는 한데… 어쩔 수가 없었어.”
“그래, 정으로 부탁을 다 응할 수만은 없지.”
김 실장은 테이블에 올려둔 대본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특히 그 작품에 들어가는 건 좀 무리야.”
그렇게 우리 사이에는 잠깐의 정적이 찾아왔고.
김 실장과 내 시선은 테이블에 널브러진 대본들을 향해 있었다.
수많은 대본.
어쨌든, 이제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새로운 대본을 보며 작품을 찾는 것.
최서빈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다.
결국은 다음 일을 하기 위해, 신작을 찾아야 했으니까.
“그럼 빨리 대본 찾아볼까?”
대본의 제목들을 훑으며 김 실장에게 말했고.
그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답했다.
“응, 이제 얼른 찾아서 시작해야지.”
김 실장은 제멋대로 널브러진 대본들을 하나씩 보며 장르별로 정리했고.
나는 그가 정리하기에 앞서, 맨 앞에 있는 대본을 집어 들었다.
“우선 이거부터 읽어볼게.”
“알겠어.”
십여 분의 시간이 흐르고.
대본의 페이지가 쭉쭉 넘어가고 있지만.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그저 넋을 놓은 채 책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
소설을 읽고는 있지만, 흥미로움은 없고 그저 진도만 쭉쭉 나가는 기분.
더 진도를 나가지 않은 채.
그 대본을 덮었다.
그렇게 벌써 내 기준에 부합하지 않은 대본이 한 권씩 쌓여갔다.
“다음 거 읽어야겠다.”
책상 위에 놓인 다음 대본을 집어 들자, 김 실장 역시 나와 다른 대본 하나를 집었다.
그 역시 첫 번째 대본에는 흥미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후 우리는 한마디의 대화도 주고받지 않은 채.
한참을 대본에만 집중했다.
어느덧 어둑해진 창밖.
하지만 밝은 조명이 있는 연습실 안에는 언제 시간이 많이 흘렀는지도 모를 만큼.
좋은 작품을 찾기에 정신이 없었다.
더군다나 마음에 꼭 드는 작품을 찾지 못한 나는, 한껏 찌푸려진 얼굴과 굳은 몸을 풀기에 바빴고.
김 실장 역시 몸이 뻐근했는지 어깨와 목을 스트레칭하며 대본의 페이지를 넘겼다.
어느새 한쪽에 높게 쌓아올려진 대본들.
이미 내 마음속에서 탈락한 작품들이었다.
우리 둘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그렇다고 해서 이 과정을 포기할 수는 없을 터.
시간이 간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닌, 작품을 찾을 때까지 진행되는 것이었기에.
서둘러 다음 대본을 펼쳤다.
어깨를 한차례 들썩인 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첫 장을 읽어 내려갔다.
“어?”
첫 장을 읽으며 순간 눈썹을 움찔거렸다.
그리고 홀린 듯 넘기는 페이지.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너무나도 몰입하게 만드는 이 대본.
영상이 아닌, 텍스트로만 보이는 대본의 특성상.
머릿속에서 그 내용들을 그려냈고.
실감 나는 상황에 어느새 내 손에는 땀이 맺혔다.
“와아….”
어느 페이지에서는 팔은 물론이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경험까지 하게 만들었다.
가빠오는 숨.
조마조마한 느낌으로 순식간에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고.
서둘러 대본을 처음으로 돌려, 작품을 확인했다.
‘상간녀의 유혹.’
송동규 감독과 김한나 작가가 만난 드라마였다.
내가 넋을 놓은 채 대본 첫 페이지를 보고 있자, 김 실장이 미간에 힘을 준 채 물었다.
“뭐야, 좋은 작품 발견했어?”
그의 말이 채 끝나자마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흥분된 얼굴로 대본을 툭툭 치며 말했다.
“형, 이거 대박이야.”
“오오, 뭔데?”
“내용이 대박인데, 그나저나 이거 쓴 분이 김한나 작가거든. 이 작가, 되게 유명한 분 아니야?”
한껏 설레는 얼굴로 그에게 물었지만.
김 실장은 내 말에 순간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지?
그의 표정에 고개를 갸웃거렸고.
김 실장은 턱을 들어 대본의 제목을 바라보았다.
“그렇기는 한데….”
오묘한 그의 표정.
김 실장은 쓰읍, 소리를 내며 고개를 잘게 가로저었다.
“근데 그 작품, 좀 별로지 않아?”
몇 시간 동안 읽은 작품들 중 유일하게 마음에 든 대본이었기에.
나는 손사래를 치며 대본을 내밀었다.
“이거 대박이야, 형. 형도 읽어봤어?”
“아니, 나는 그냥 그 대본 패스했어.”
“왜?”
김 실장은 손가락으로 ‘김한나 작가’ 글자를 가리키며 답했다.
“그 작가가 논란이 좀 됐던 사람이잖아.”
“처음 들어봤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럴 수 있겠다. 희성이 너 데뷔하기 전이었으니까.”
김 실장은 입술을 움찔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때 김한나 작가가 바람피워서 말이 좀 있었어.”
“아….”
그의 말에 나는 탄식을 쏟아냈고, 다시금 대본을 펼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본의 내용은 내 온 마음을 앗아갔다.
“형, 근데 이거 다시 읽어도 대박이야. 진짜 미쳤어, 이건.”
반짝이는 눈으로 그에게 말하자, 김 실장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야, 정신 차려.”
“무슨 말이야?”
그의 말에 내 눈은 휘둥그레졌고.
“희성아, 제대로 봐. 그거 막장 드라마야.”
김 실장의 단호한 목소리에 나는 입술을 깨물며 답했다.
“그렇긴 한데….”
***
코를 타고 들어오는 구수한 된장찌개의 냄새.
넥타이를 여미며 나는 그 냄새에 코를 벌름거렸다.
킁킁.
여러 음식의 냄새가 코 주변을 맴돌았고.
잠깐만.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지금 이곳은 꿈속이라는 것을.
“여보, 밥 먹고 가요.”
나는 거울을 바라보며 넥타이를 맨 뒤.
재킷을 걸치고 가방을 들었다.
“안 돼. 나 오늘 아침부터 큰 재판 있다고 했잖아.”
“그래도, 한 수저라도 뜨고 가지.”
그런 아내에게 미간을 찌푸린 채 답했다.
“어제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아침 먹을 시간 없다고.”
“그래서 일부러 일찍 차린 건데, 당신이 좋아하는 된장찌개에….”
그녀의 말에 나는 연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당신 혼자 먹어. 아침부터 실랑이할 힘없어. 그만해.”
이른 아침부터 아내와 아주 작은 언쟁이 오간 뒤.
안방 문을 열자, 눈앞에 펼쳐진 거실의 풍경.
소파에 널브러진 옷가지.
바닥에 굴러다니는 쿠션과 먼지.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시무룩한 얼굴로 식탁 앞에 서 있었고.
그런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침부터 날 위해서 음식 해준 건 고마운데. 집 청소라도 해. 못하겠으면 내가 전문가라도 부르자고 했잖아.”
“어우, 내가 치우면 되잖아. 뭐 하러 그런 데 돈을 써.”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고.
“우리가 애 있는 집도 아니고, 대체 집을 왜 이렇게 어지르는 거야. 퇴근하고 집 들어와서 내가 치우는 것도 한계가 있지.”
“에이, 우리 여보가 청소를 잘하니까 그렇지.”
그녀의 말에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오늘 나 동창들 만나는데, 당신 저녁 먹고 들어오는 거죠?”
“하아… 또 동창들 만나?”
“응, 그래서 말인데….”
아내와의 언쟁이 싫었던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카드를 건넸다.
“동창들 만나서 당신이 다 사지 좀 마. 집 청소에 전문가 부르는 돈은 아깝다면서, 당신 노는 돈, 명품 사는 돈은 안 아까워?”
“당신이 잘나가는 남편이니까… 아무튼 오늘은 안 그럴게. 늦겠다, 얼른 출근해.”
아침부터 이어진 아내와의 다툼에, 상쾌하지 못한 기분으로 출근길에 나섰다.
“하아….”
연달아 나오는 한숨.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 대중교통에 몸을 실었다.
가장 빠른 건, 자차나 택시가 아닌 대중교통이었으니까.
옆자리에 앉은 긴 웨이브 머리의 여성.
그녀는 연신 나를 힐끔거렸다.
뭐지, 나를 보는 건가?
아니면 내 손에 들린 서류를 보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선을 돌리던 그때.
“저….”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거는 그녀.
“네, 저요?”
“혹시 최석현 검사님이신가요?”
“그걸 어떻게….”
“어머, 안녕하세요. 예전에 일화 여대에 강의 나오신 적이 있죠?”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 그녀는 손뼉을 부딪치며 나를 반가워했다.
“아, 맞습니다.”
“제가 그때 검사님 오신다고 해서, 아는 분께 부탁해서 보러 갔거든요. 이렇게 뵙다니, 너무 반가워요.”
눈웃음을 활짝 지은 그녀는 가방을 뒤적여 내게 명함을 건넸다.
“저는 윤설하라고 해요. 이렇게 뵌 것도 신기한데, 제가 정말 팬이거든요. 다음에 검사님 뵈러 한번 가도 될까요?”
“하하,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를 찾아오신다고요?”
윤설하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여쭤볼 것도 있고, 드리고 싶은 말씀도 있어서요.”
그때.
법원 앞에 도착한 버스.
서둘러 그녀의 명함을 받으며 대답했다.
“네, 그럼 다음에 뵙죠.”
“꼭 봐요, 우리.”
윤설하는 새빨간 입술을 길게 올리며 말했다.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는 내내,
윤설하의 미소와 고풍스럽게 풍기던 향기가 코에 맴돌았고.
어디선가 본 듯한 그녀의 얼굴.
그 해맑고 부드러운 인상은 자꾸만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서둘러 고개를 가로저었다.
빠르게 뛰어대는 심장.
계단을 오르기에 뛰는 것인지, 자꾸만 떠오르는 윤설하 때문인지.
처음 느껴보는 이 이상한 감정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고는 주머니 속 윤설하의 명함을 꺼내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법원의 글씨를 읽은 뒤,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스르륵 감긴 눈을 떴고.
눈앞에는 술잔을 들고 있는 최석현이 보였다.
어둑한 이곳.
중간중간 보이는 작은 조명은 이곳의 분위기를 더 고조시켰고.
내 앞에 놓인 위스키.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
거기에 최석현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저 미소까지.
딱 내가 원한 느낌이었다.
“설하 씨, 그때 우리 버스에서 처음 봤을 때 말이야….”
나는 검지를 최석현의 입에 가져다 댔고.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으며 최석현에게 답했다.
“우리 검사님… 정말로 내가 검사님을 처음 본 게 그 버스였던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붉은 입술로 옅게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어깨부터 팔을 천천히 쓰윽 쓸어내렸다.
“검사님… 아니, 이제 오빠라고 불러도 되는 거지?”
내 말에 최석현은 혀로 자신의 입술을 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나… 오빠한테 길게 할 말이 좀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