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17)화 (117/303)

117화 #22 – 새로운 곳에 내리는 뿌리 (5)

화창한 하늘.

양 볼을 스치는 살랑거리는 바람까지.

이보다 완벽한 날씨가 또 있을까?

뭉게구름이 하늘을 가득 메웠고, 그 구름의 색은 마치 도화지처럼 새하얗고 뽀얀 자태.

새파란 하늘을 쳐다보며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이야, 날씨 진짜 너무 좋네.”

제자리에 멈춰 선 채로 고개를 끝까지 들었다.

그리고 바람을 느끼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흐음….”

잠깐만.

산뜻한 바람이 코를 가득 채워야 하는데….

아무런 공기도 코로 들어오지 않았고.

서둘러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한 이 느낌.

여기는… 꿈속이다.

빵빵-!

세차게 울리는 클랙슨 소리.

하늘을 쳐다보던 고개를 돌려 클랙슨 소리가 나는 차들을 바라보았다.

“양보 좀 하면 되지, 왜 저렇게 빵빵대는 거야?”

검지로 귀를 막으며 걸어갔고.

목적지를 향해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오래된 육교.

저곳을 건너야만 했기에, 나는 높은 계단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멀다.”

헥헥거리며 계단을 올라가자,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한 사람.

183 정도로 보이는 커다란 키.

새까만 머리는 그의 피부와 상반되어 더욱 까맣고 선명하게 보였다.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 스타일에 감탄할 새도 없이.

그의 피부에 눈이 갔다.

이렇게 하얀 피부를 태어나 본 적이 있던가?

밀가루보다 더 하얗고 뽀얀 피부.

어딘가 아프기라도 한 사람처럼 너무나 밝은 피부색에 시선이 자꾸만 갔고.

까만 머리 덕에 더욱 눈길이 가는 그 피부. 하지만 그는 전혀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큰 키에 넓은 어깨, 거기에 탄탄한 근육질까지 겸비한 것 같았으니까.

쫙 빼입은 검은 정장은 그의 비율 좋은 체형에 잘 맞아 단연 돋보였다.

또한 당당한 그의 발걸음은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남자인 내가 봐도 그는 다시 뒤돌아보게 만드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헬스 트레이너인가?

얼굴까지 잘생겼는데, 모델이나 연예인?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주시했고.

나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그를 나도 모르게 뒤돌아 뒷모습까지 바라보았다.

순간.

내 발걸음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대로 자연스레 그를 따라갔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큰 키의 호감상인 남자에게 향했고.

다시 처음 있던 그 육교 아래로 내려갔다.

빵빵-!

재차 들려오는 클랙슨 소리.

하지만 조금 전과는 느낌이 달랐다.

빵빵빵!!

커다란 클랙슨을 연속으로 울리는 소리에 나는 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고.

그 차는 시속 120은 되는 속도로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이런 시내에서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120을 밟는단 말인가.

끼이익-.

쾅!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였다.

그 차는 길가에 있던 지팡이를 짚은 노인을 들이박았고.

그제야 멈춰 선 차량은 몇십 미터 전부터야 브레이크를 밟았는지.

길게 검정 두 줄의 선, 스키드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어머, 어떡해!”

“미쳤나 봐. 할머니가 치였잖아.”

사람들이 웅성대며 차에 치인 노인에게로 달려갔고.

스키드 마크 끝자락에 멈춰 선 차는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핸들에 몸이 널브러진 채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나 역시 차에 치여 바닥에서 피를 흘리는 노인에게로 달려갔고.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악!”

그 처참한 모습에 공포감에 휩싸였고.

사람들은 차 앞에 누워 있는 할머니, 차 안의 남성에게 나뉘어 있었고.

나는 사고를 낸 남성이 아닌, 할머니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그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할머니… 돌아가셨나 봐.”

“하긴, 저렇게 세게 와서 박았는데… 살았을 리가 없잖아.”

그런데.

아까 육교에서 보았던 남성, 그 또한 나와 같이 할머니의 앞에 서 있었고.

그의 표정이 오묘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은 처참한 광경에 미간을 찌푸리거나,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심지어 몇몇은 눈물까지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새하얀 피부의 남성은 달랐다.

아무 감정이 없는 얼굴로 그 노인을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옅은 미소가 곁들여진 것처럼 보였다.

살짝 벌린 입, 어딘가를 주시하는 눈빛.

‘대체 저 사람은 뭐지?’

내 시선은 할머니에게서 그에게로 옮겨졌고.

그의 눈빛은 할머니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팟-!

그때, 떠져버린 눈.

천장을 확인하고 곧장 숨을 몰아쉬었다.

이게 무슨 꿈이지?

자리에서 일어나 골똘히 생각에 잠겼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 상황을 인지할 수 있었다.

며칠 전.

최서빈이 내게 전달해 주었던 대본.

‘블랙맨’.

그 대본에 나오는 장면과 너무나 흡사했다.

“맞다, 저승사자!”

순간 떠오른 생각에 손뼉을 부딪쳤고.

서둘러 거실에 올려둔 대본을 펼쳐들었다.

꿈에서 봤던, 키가 크고 얼굴이 새하얗던 그 남자.

그 사람이 바로 저승사자였다.

어쩐지….

차에 치인 할머니를 바라보며 슬픈 표정을 짓지 않았어.

영혼을 흡수하려는 듯 살짝 벌어진 입술까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재차 꿈에서의 장면을 떠올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분명, 그 꿈에서 나는 저승사자가 아니었다.

그저 아무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던 평범한 인간.

대본에서의 내 역할은 최서빈과 함께 주연인 저승사자였는데….

하지만 꿈속에서의 난 그저 노인이 죽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 틈에 휩쓸려 소리를 지르는 일반인이었다.

배역으로 따지자면, 한 화에 잠깐 등장하는 엑스트라1 정도랄까.

즉, 주연인가 조연인가를 따질 것도 없이 비중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지.

이 드라마… 내가 해도 되는 거야?

그렇다고 최서빈에게 못 하겠다고 말하면, 분명 안 좋아할 것 같은데….

***

“형, 내가 말한 대본은 다 읽어봤어?”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회사 연습실.

나는 김 실장 앞에 놓인 ‘블랙맨’ 대본을 보며 물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날 바로 읽었지.”

“어때?”

김 실장은 내 말에 대본에 대한 대답이 아닌, 다른 질문을 던졌다.

“이게 서빈 씨가 함께하자고 준 대본이라고 했지?”

“맞아.”

“여기서 역할은?”

나는 대본에 있는 역할을 손으로 가리키며 답했다.

“주연. 근데 서빈 선배가 메인 주연이고, 나는 주연이기는 한데 서빈 선배보다는 비중이 조금 작지.”

그는 내 말에 턱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김 실장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그런 그에게 곧장 내 생각을 늘어놓았다.

“형, 이거 캐릭터가 좀 애매하지?”

내 말에 김 실장은 곧장 입술을 내밀었다.

“음… 우선 드라마 내용 자체는 재밌기는 해.”

그는 쓰읍, 소리를 내며 자신의 의견을 내기 위해 말을 이어갔다.

“근데 뭐랄까… 이 역할이 희성이 네 이미지에 조금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김 실장의 말에 백번 공감이 됐다.

나 역시 가장 먼저 이 드라마에서 애매하다고 느꼈던 것이 내 캐릭터였다.

물론 모든 역할을 다 소화해내야 좋은 배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만큼 자신이 잘 살릴 수 있는 역할을 골라내는 것 또한 그 배우의 능력이지.

이 역할을 잘 살리고, 못 살리고를 떠나.

이 배역에 내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꿈속에서 보았던, 엑스트라 같던 내 모습 또한 잊을 수도 없었지.

주연치고 마치 조연과 다를 바 없는 비중 또한 한몫했다.

“게다가 지금 희성이 너 주가가 한창 올랐잖아. 근데 이런 로코는 오히려 악수일지도 몰라.”

내가 배우 업계에서 여러 영화와 드라마를 찍으며 자리를 잡은 장르들.

로코, 로맨틱 코미디는 단 하나도 없었다.

당연히 로맨틱 코미디도 찍어보고 싶기는 했지만.

김 실장의 말처럼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도 형 생각이랑 같아.”

“네가 이 드라마를 하고 싶어 한다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나랑 생각이 똑같아서 다행이네.”

김 실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나는 대본을 바라보며 김 실장을 향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다른 작품 좀 찾아보자.”

***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때쯤.

나는 오늘도 연습실에 홀로 남아 대본을 펼쳐 연기 연습을 이어갔다.

“제게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대체 뭡니까!”

감정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리고, 앞에 설치해둔 작은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아니요. 저는 당신과 똑같이 살지는 않을 겁니다. 절대….”

카메라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눈빛 연기를 하던 그때.

똑똑.

연습실 문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깊은 감정을 사그라트리며, 고개를 돌리니.

최서빈이 활짝 웃으며 문 앞에 서 있었다.

“선배님!”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흔들어 보이며 문을 열었다.

“오늘도 열심히 연습하고 있네?”

“하하, 그냥 매일 나오고 있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기며 말했다.

“선배님이 회사에는 어쩐 일이세요?”

회사에 계약 외에는 오지 않던 최서빈이기에, 나는 놀란 얼굴로 그에게 물었고.

최서빈은 턱으로 나를 가리키며 답했다.

“놀러왔지. 너랑 커피도 한잔하고.”

“이야, 감동입니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빨대로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럼 이번 달에는 계속 쉬시는 겁니까?”

내 말에 그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작품 들어가기 전까지는 좀 쉬어야지. 너도 좀 쉬면서 일해, 인마. 왜 이렇게 워커홀릭이야?”

“저는 계속 일할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합니다. 하하.”

어느덧 테이크아웃 컵에 담긴 커피가 바닥이 났고.

우리는 일상 대화를 이어나가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최서빈이 앞에 놓인 대본을 바라보더니, 무언가를 찾는 듯한 눈빛.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가 찾는 대본이 ‘블랙맨’이라는 것을.

나와 이야기하며 놀기 위해 회사에 온 것도 있을 테지만.

함께 드라마에 출연하자는 답을 듣기 위해 온 것일 터.

어떤 말로 거절을 해야, 그가 기분이 나쁘지 않을까 수없이 고민했지만.

딱히 그렇다 할 해답을 찾지는 못했다.

어쨌든 그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 자체에 서운함을 느낄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게 가장 중요한 시기인 지금.

최서빈의 부탁을 승낙하기 위해, 이 드라마에 출연할 수는 없었다.

아직 내 위치는 드라마 하나로 좌지우지될 수 있으니까.

“희성아, 그건 생각해봤어?”

역시나.

최서빈은 곧바로 내게 드라마 출연 여부에 대해 질문을 던졌고.

나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선배님.”

“응, 편하게 말해.”

“보내주신 대본, 작품은 너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저랑은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서요.”

내 말에 순간 최서빈의 눈이 움찔거렸다.

내가 거절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모양이다.

그러고는 침을 꿀꺽 삼키며 내게 물었다.

“왜, 어떤 게 마음에 안 드는데?”

“마음에 안 든다기보다, 제가 해야 할 그 배역이 저랑 어울리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사실을 고했다.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고민했는데, 거짓으로 둘러대는 것보다 솔직히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그는 내 말에 자신의 턱을 어루만졌다.

“네가 나한테 고맙다고 해서, 네가 내 작품에 출연하겠다고 했잖아. 그래서 고른 작품이 그거였는데.”

서운함이 뚝뚝 묻어나오는 말투였다.

더불어 그의 표정에서는 서운함을 넘어 살짝 기분이 나쁘다는 듯한 얼굴도 엿보였다.

“신경 써서 말씀해주신 건데, 이렇게 답해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눈을 내리깔며 그에게 미안함을 표했고.

그는 한숨을 삼켜내며 내게 답했다.

“뭐… 네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이미 생각이 끝난 거겠지.”

“죄송합니다, 선배님. 다음에 다른 작품에서….”

그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음에 기회 되면 같이 작품을 하든지 하자. 뭐… 내가 고른 작품이 네 마음에 안 들었다는데, 내가 뭐라 하겠냐.”

최서빈은 볼에 바람을 가득 넣은 채, 숨을 깊게 내쉬었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연습해라, 나 먼저 간다.”

“선배님 벌써 가시게요?”

나는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내게 답했다.

“너 얼른 다음 작품 골라야 할 거 아니야. 내가 방해되는 것 같네.”

“아닙니다.”

나는 서둘러 그에게 답했지만.

최서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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