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22 – 새로운 곳에 내리는 뿌리 (4)
“내가 하자는 작품으로, 같이 하나 하자.”
최서빈은 눈썹을 들썩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의 제안을 거절할 리가 없었지.
물론 최서빈과 작업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지만.
흥행 보증 수표인 그와의 작품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었으니까.
어떤 배우든 최서빈과 함께하는 작품은 영광일 것이다.
그런 제안을 해준 최서빈에게 나는 오히려 고마운 마음이었다.
활짝 입꼬리를 올리며 그에게 답했다.
“당연히 콜이죠.”
최서빈은 그제야 미소를 지었고.
나는 얼굴에서 황급히 웃음기를 지워내며 입술을 말아 넣었다.
“그런데 선배님,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건?”
그는 금방 미간을 찌푸렸고.
그 조건이라는 게 대체 뭐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어떤 작품이든 선배님과 함께하면 좋습니다. 다만, 주연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작품이었으면 합니다.”
최서빈은 내 말에 턱을 어루만졌고.
혹시라도 그가 오해할세라 재차 입을 열었다.
“아, 선배님께서 조연을 해달라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선배님과 함께 주연으로 출연할 수 있는 작품이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그제야 그는 옅은 미소를 지었고.
아래턱을 내밀며 내게 물었다.
“왜, 이제 조연에 남아 있으면 안 되겠어?”
최근 영화에서 내 배역이 조연인 것을 아는 그였기에, 내 마음을 단번에 캐치했다.
“이번 조연 영화를 찍은 이후로 계속 조연 역할만 섭외가 들어오더라고요.”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지. 그렇게 몇 번 조연 역할을 하다 보면, 자리가 거기에 굳어질 거야.”
“맞습니다. 그게 걱정이라서요.”
혹시나 최서빈에게 무례한 부탁일까 싶어 걱정했지만.
그는 내 말에 동의하듯 진지하게 이야기를 경청했다.
“알겠어. 내가 좋은 작품 나오면, 연락할게. 같이해보자.”
“네, 영광입니다.”
최서빈은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들었다.
“WG 엔터로 옮기니까 어때. 불편한 건 없고?”
“그럼요. 김 실장님도 함께 이직하는 거 받아주시고, 불편한 건 없습니다.”
그는 이마에 주름이 생길 정도로 눈을 치켜뜨며, 내게 말했다.
“혹시 힘든 일이나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지 나한테 연락해. 이제 선배를 떠나, 같은 회사 식구도 됐으니까.”
식구….
듣기 좋은 말이었다.
최서빈은 늘 선배로서 나를 잘 챙겨줬고.
다른 후배들보다 내게 더 관심이 있다는 것을 나 역시 느끼고 있었다.
더욱 그렇게 느껴진 건, HS 엔터에 속 시원히 말할 선배가 없었기 때문이지.
HS 엔터에 배우계에서 유명한 선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만큼 친분을 쌓을 기회도, 회사 내에서도 소속 배우들끼리 유대 관계를 형성하게 도움을 주는 것도 없었다.
그저 촬영을 하며 친해지는 배우들이 전부였으니까.
최서빈 또한 그렇게 만났지.
그에게 고마운 마음만을 느끼고 있을 것이 아니라, 최서빈에게 무언가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품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가 필요로 하는 건.
단지 마음이라는 걸 어느 순간 깨달았다.
그렇게 높은 위치에 있는 최서빈이었지만, 친분이 두터운 연예인이 거의 없었다.
성격이 나쁜 것이 아닌데도, 그가 모든 이들에게 벽을 치고 있기 때문이지만.
내게만 그 벽을 허문 것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듣지 못했다.
그저 내가 연기를 잘하고, 마음에 든다는 대답이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나 또한 최서빈과 허물없이 지내는 것이 불편하지 않았다.
아니,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와 한솥밥을 먹는 식구가 되었고.
그래서 더더욱 그와의 연이 끈끈해지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럼에도 우리의 대화는 저물지 않았다.
“아, 선배님. 이번 영화 있잖습니까.”
“칼날의 끝?”
칼날의 끝은 최서빈과 내가 함께 맞붙은 영화였다.
“네, 제가 호주에서 촬영할 때, 기사를 봤는데. 그 영화에 임하준도 같이 출연한다는 기사였거든요.”
내 말에 그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코를 찡긋거렸다.
“거의 마지막까지 올라왔는데, 뭐… 어쩌다 보니까 최종에서 다른 배우로 변경됐어.”
“아….”
마지막 계약을 하기 전까지.
아니, 계약을 해도 불가피한 이유로 배역이 바뀌는 일이 종종 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답했지만.
최서빈의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임하준에서 다른 배우로 교체가 된 것이, 굉장히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그와 함께 연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최서빈은 쓰읍,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친구가 연기는 진짜 잘하더라고.”
임하준을 떠올리며 말하는 그의 눈빛과 말투는 어딘가 찝찝한 구석이 있는 듯 보였다.
“예, 저도 듣기는 했습니다. 임하준 배우의 연기에 대해서요.”
내 말에 최서빈이 손가락을 튕기며 답했다.
“역시, 희성이도 아는구나?”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읊조렸다.
“연기를 너무 잘하는데, 개인사가 참… 오묘한 친구지….”
최서빈은 말을 흐리고 뭉뚱그리며 말했지만.
정확히는 몰라도 일부는 알 수가 있었다.
임하준은 과거에 한때 떠들썩하게 뉴스에 보도가 된 적이 있으니까.
프로포폴 중독.
하지만 오랜 기간의 자숙 끝에 나온 것이었고.
워낙 연기를 잘하다 보니, 흐린 눈을 뜨고 임하준의 복귀를 찬양하는 팬들도 많았다.
배우가 연기만 잘하면 되지 사생활이 중요하냐는 반응과.
공인은 사생활까지 중요한 것이다, 더군다나 그 사생활은 범죄이니 복귀해서는 안 된다는 반응으로 엇갈렸지.
임하준이 연기를 잘하는 것은 나도 너무 잘 알고 있지만.
공인이고 아니고를 떠나.
그런 사고를 치고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을 옹호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찾아가 굳이 복귀를 욕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당연히 응원하고 싶은 마음 또한 없었다.
최서빈은 임하준에 대한 연기 언급을 했고.
그의 과거를 뭉뚱그려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그 또한 임하준을 감싸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저 연기 평가 후.
최서빈은 술잔을 내 앞으로 들었다.
“술이나 마시자.”
“네.”
***
“그래서 이 작품들은 주연 배역도 오디션을 보는 거지?”
연습실에 깔린 수많은 대본.
김 실장이 내려놓은 대본을 바라보며, 그에게 물었다.
그는 입술을 내밀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근데 오디션을 보라고 입김을 넣어둔 배우들이 있을 거야.”
김 실장은 자신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스스로 부정하듯 말을 이어갔다.
“근데 확실하게 오디션으로만 캐스팅한다는 작품도 있기는 해.”
걱정이 가득한 김 실장의 말투.
주연으로 오르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는 건 나보다 김 실장이 더 컸다.
오히려 내가 그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형, 어차피 오디션 본다고 다 붙는 거 아니잖아. 우선 대본 읽어볼게.”
내 말에 김 실장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괜한 걱정이다. 오늘 같이 작품 봐보자.”
그는 의자를 당겨 앉았고.
목을 가다듬으며 앞에 놓인 대본을 하나 집어 들었다.
나보다 나를 더 걱정하고,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진 김 실장을 바라보며.
올라가는 입꼬리를 붙잡고 나 역시 대본을 펼쳤다.
첫 번째 대본의 페이지 세 장이 넘어갈 때쯤.
“맞다!”
김 실장의 목소리에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깜짝이야.”
“미안, 갑자기 생각나서.”
그는 손을 뻗어 나를 진정시켰고.
김 실장의 제스처에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래서 뭐가 생각났는데?”
“그 임하준 있잖아.”
김 실장의 입에서 불쑥 나온 임하준의 이름을 듣고.
나는 순간 얼굴이 일그러졌다.
“요즘 임하준 이름 많이 듣네.”
내 말에 김 실장은 눈썹을 들썩였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래서 임하준이 왜?”
“저번에 복귀작이 엎어져서, 지금 다시 작품을 찾고 있다고 하더라고.”
“아….”
내가 놀라지 않자, 김 실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알고 있었어?”
“엎어진 건 알고 있었지. 우리 호주 갔을 때, 그때도 복귀 기사 떴잖아.”
그제야 기억이 났는지 김 실장은 탄식을 내뱉었다.
“맞다. 그걸 잊었네. 그렇게 자숙하고 나오니까, 복귀하는 게 쉽지 않았나 봐.”
“그렇겠지. 다른 것도 아니고, 범죄를 저지르고 자숙한 건데.”
김 실장은 내 말에 혀를 끌끌 찼다.
“그치. 근데 또 임하준 복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아서, 복귀작에 궁금증이 많나 봐.”
그는 내게 휴대 전화를 내밀며 말했다.
“이거 봐. 임하준 복귀 관련 기사도 어마어마해.”
나는 빠르게 눈으로 기사들을 훑었고.
별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기에.
김 실장의 말에 반응을 보여준 뒤, 다시금 시선을 대본으로 옮겨왔다.
“뭐… 나랑만 안 겹치면 좋겠네.”
내가 대본에 시선을 고정하자, 김 실장이 휴대 전화를 테이블에 뒤집어 놓았다.
“그러게. 우리는 얼른 더 좋은 작품이나 찾자.”
***
오늘도 어김없이 출근한 WG 엔터.
HS 엔터에 있을 때는, 집에서 연습할 만한 환경이 아니었기에 늘 회사로 출근을 하고는 했다.
이제는 이사까지 했지만, 이미 몸에 습관이 배었는지 눈만 뜨면 자연스레 발길이 회사로 향했다.
북적이는 직원들.
거기에 모두가 무언가에 몰두해 있는 모습을 보면.
나 또한 집중이 배가되는 느낌이었으니까.
오늘도 대본을 펼쳐 대사를 읊던 그때.
지이잉.
[발신인: 최서빈 선배님]
최서빈에게 걸려온 전화에 나는 대본을 읽던 눈을 휴대 전화로 옮겨왔다.
“네, 선배님.”
-어, 희성아. 어디야?
“저 회사 연습실입니다.”
-너는 회사 진짜 잘 나가네. 직원이 따로 없는데?
“하하, 어쩌다 보니, 회사에서 연습하는 게 익숙해져 버려서요. 선배님은 집이십니까?”
-응, 나도 다음에 회사나 놀러 가야겠다.
“예, 언제든 오십시오. 제가 항상 상주하고 있습니다.”
-그래. 아, 내가 방금 매니저 형을 통해 김 실장님한테 메일 하나 보냈거든?
“어떤 메일이요?”
-대본인데, 한번 읽어봐.
“감사합니다. 김 실장님도 사무실이라, 바로 받아서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 같이하면 좋을 것 같더라고. 아무튼, 천천히 읽어보고 연락하자.
“네, 들어가십시오. 선배님!”
함께 작품을 하자고 하더니, 이렇게나 빨리 작품을 보낼 줄이야.
최서빈과의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김 실장에게로 달려갔다.
그렇게 받아온 대본.
‘블랙맨’.
로맨틱 코미디 장르인 이 작품은 저승사자의 이야기였다.
서둘러 대본을 펼쳐 읽기 시작했고.
스토리는 흠잡을 곳 없이 탄탄하고 재미있었다.
이승에서 인간의 영혼을 흡수해, 자신도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저승사자.
으스스할 것만 같은 저승사자는 빈틈을 보이며.
좌충우돌을 겪다가 인간에 다다르던 순간.
영혼을 흡수해야 하는 마지막 인간.
그 여자와 사랑에 빠져버리는….
그렇게 사랑을 하며 저승사자로 남느냐, 사랑을 버리고 자신이 인간으로 환생을 하느냐.
마지막 기로에 놓인 저승사자의 스토리.
술술 읽히는 대본.
확실히 스토리는 흥미롭고 빨려 들어갔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내 표정은 밝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드라마, 내가 너무 부각이 안 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