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15)화 (115/303)

115화 #22 – 새로운 곳에 내리는 뿌리 (3)

“안녕하십니까.”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WG 엔터의 직원들은 나를 환하게 반겼다.

“희성 씨, 이번 영화 대박 났던데, 축하해요.”

“맞아. 성적 장난 아니던데?”

직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다가와 축하 인사를 건넸고.

“감사합니다.”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화답한 뒤.

서둘러 연습실로 걸어갔다.

이미 어제도, 아침에도 확인했지만.

다시금 휴대 전화를 열어 영화의 성적을 확인했다.

영화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의 최종 관객 수.

무려 380만 명을 기록했고, 손익 분기점은 이미 넘은 지 오래였다.

너무나 대단한 기록에 나 역시도 얼떨떨할 정도.

한국에서 좀비 영화는 잘 되지 못할 거라는 편견을 깨고 흥행한 영화.

거기에 K-좀비라는 이름이 붙어 해외에서도 반응이 좋았다.

SNS에서는 K-좀비의 특징, K-좀비가 외국 좀비와 다른 점.

여러 패러디까지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나, 진희성 배우에 대한 관심도 커지기 시작했다.

SNS 팔로우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게 된 것이 그것을 증명했다.

관객 수 380만이라는 숫자에 놀랍고, 너무나도 기뻤지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같은 WG 엔터이자 친한 선배인 최서빈의 영화.

내 영화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고.

그렇기에 기사와 TV 매체에서는 우리 둘의 영화를 항상 비교하고는 했다.

졸지에 이번 시즌 충무로의 라이벌 영화가 되어버린 셈이지.

최서빈이 주연으로 나온 영화 역시 세상에 결과가 드러났다.

320만.

내가 출연한 영화와 60만이라는 숫자의 차이가 있었다.

320만이라는 숫자만 본다면, 너무나 성공적인 마무리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그 영화도 손익 분기점은 충분히 넘었으니까.

그러나 기자들은 60만이라는 숫자의 차이를 물고 늘어졌다.

[같은 회사, 하지만 두 영화의 온도 차는?]

[이번 영화계를 꽉 잡은 건, 최서빈이 아닌… 좀비!]

[톱스타 최서빈의 개봉 신화, 이대로 무너지나….]

[영화 시장의 마음을 사로잡은 ‘K-좀비’ 최종 380만….]

[함께 시작했지만, 마지막에 웃는 자는 따로 있었다. 송유나, 한시아… 진희성….]

[1위를 다투던 두 영화, 결과는 60만 차이… 승자는?]

굳이 비교를 해대는 기사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영화에 대해 각자 언급을 하는 것이 아닌.

최서빈의 영화와 비교하며 누가 더 자극적인 내용으로 뽑아낼까, 하는 기사가 너무 싫었다.

물론 나오는 영화마다 항상 1위를 하던 톱 배우였기에.

그의 작품이 2위가 됐다는 사실은, 기자들을 흥분케 만들 수밖에 없었다.

하필 최서빈과 겹친 영화에서 이렇게 1, 2위를 다투다니.

“희성이, 왔어?”

그때 김 실장이 연습실로 다가왔고.

내 한숨 소리를 들은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왜 무슨 일인데?”

“아니야, 그냥.”

그러고는 김 실장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형, 그나저나 섭외 들어온 건 없어?”

내 말에 김 실장이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들어오기는 했는데….”

말끝을 흐리는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전부 조연이야?”

“…응.”

그는 여전히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고.

늘어진 눈썹이 그 마음을 대변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리 대수롭지 않았다.

물론 주연으로 섭외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애초에 내가 이번 영화에 조연으로 들어간 것 역시, 작품 자체가 좋아서 시작한 거였으니까.

조연에 계속 머물고 싶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럼에도 작품이 좋다면, 하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있었다.

“형, 그럼 그 작품들이라도 좀 볼래.”

그 말에 김 실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희성아, 이번에도 조연으로 촬영하게 되면 주연으로 작품하기 힘들 수도 있어.”

“알긴 하지만, 언제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어쩌면 나 역시 조급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주연으로 섭외가 오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함.

그러나 그 불안함 속에서 머물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가만히 기다리는 것은 능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번에는 주연으로 촬영하면 좋겠지만, 우선은 섭외 들어온 작품들 대본 좀 보고 싶어서.”

“알겠어. 대본 가지고 올게. 대신 이번 작품은 꼭 주연으로 들어가야 해.”

김 실장의 당부에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그렇게 대본을 가지러 떠났고.

연습실에 덩그러니 남은 나는 휴대 전화를 열었다.

그리고 달력에 표시된 스케줄.

저녁 약속이었다.

지난주에 이야기했던 최서빈과의 술자리.

영화 성적이 나온 마당에 만나는 최서빈이라니.

내가 그보다 성적이 잘 나온 게… 그림이 꽤 묘했지만, 그것만으로 그를 피할 수는 없었다.

괜스레 선배인 최서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가 그에게 실수를 저지르거나 잘못을 한 건 아니었으니까.

“오늘 저녁에 서빈 선배 만나기로 했는데, 벌써 좀 불편하네….”

***

오랜만에 찾은 술집.

항상 최서빈과 만날 때면 오는 술집이다.

각자 촬영이 바빠 만나지 못했으니까, 거의 3개월 만에 만나는 셈.

하지만 그와의 독대가 어색할 거라 걱정되는 마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서둘러 그를 만나고 싶었다.

내가 HS 엔터에서 나오는 것을 도와주었다는 그에게 빨리 감사의 표현을 전달하고 싶었으니까.

어둠이 가득한 출입구.

프라이빗 술집답게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오늘도 직원은 나를 알아보고 조심스레 다가왔다.

“최서빈 님과 예약하신 게 맞으실까요?”

이 술집은 최서빈과의 만남 때만 왔다는 걸, 그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밝게 웃으며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셨나요?”

“방금 도착하셨습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를 따라 가장 안쪽 룸으로 걸어갔고.

모든 좌석이 룸으로 되어 있어 다른 손님들과는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렇게 끝까지 걸어가자, 최서빈이 즐겨 뿌리는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드르륵.

직원이 짧은 노크 뒤, 여닫이문을 열었고.

안에서는 최서빈이 나를 반기며 손을 들었다.

“희성아, 왔어?”

“네, 선배님. 오늘은 제가 먼저 와 있으려고 했는데, 벌써 오셨네요!”

허리를 접은 뒤 그에게 다가갔고.

늘 먼저 도착해 있는 최서빈에게 미안함을 표하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야, 우리가 격식 차릴 사이냐? 하하.”

“그래도요.”

그는 괜찮다며 내 어깨를 두드렸고.

우리는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잘 지내셨습니까?”

“그럼. 이제 한 회사 식구가 되었는데, 이제야 얼굴을 보네.”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 정말 회사까지 제 선배님이시네요.”

그러곤 몇 달간 못 나눴던 서로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석훈이 형한테 들었는데, 너 매니저까지 데리고 왔다며?”

“석훈… 손 팀장님이요?”

“응.”

손석훈 팀장.

WG 엔터에서 내게 러브콜을 보낸 사람이자, 나와 계약을 맺은 인물이다.

즉, WG 엔터에서 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지.

그런 손 팀장에게 ‘석훈이 형’이라는 호칭을 쓰는 최서빈을 보며.

새삼스레 그의 위치를 다시금 상기할 수 있었다.

“네, 저를 가장 많이 알고 신경 써줄 수 있는 사람이 지금 매니저거든요. 그래서 제안을 드렸는데, 손 팀장님께서도 흔쾌히 받아주셔서….”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서빈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잘했어. 그렇게 내 사람 챙기는 거, 그거 쉬운 일 같아도 못 하는 사람이 태반이거든.”

그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봤다니까.”

최서빈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빈 잔을 채웠다.

이내 최서빈은 잔을 들었고.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차디찬 알코올을 식도로 넘겼다.

빈속에 넘어가는 알코올.

배 속이 찌르르했지만, 이 시간과 느낌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자, 한 잔 더 받아.”

최서빈은 곧바로 내 잔을 채우며 입을 열었다.

“희성아, 너 이번 영화 대박 났더라?”

그의 말에 순간 표정이 굳고 말았다.

성적에 대한 이야기를 최대한 꺼내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초반부터 최서빈이 먼저 영화 이야기를 꺼냈다는 게, 달갑지는 않았지.

축하를 받기 싫었다기보다는.

내가 그보다 높은 성적을 받은 것에 대한 미안함과 불편함이 공존했으니까.

“아….”

애써 미소를 지으며 표정을 풀어내는 내 모습에, 최서빈은 내 마음을 알아차린 듯 보였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거봐. 조연이어도 작품이 좋으면, 선택하라고 했잖아. 진짜 너무 잘됐다.”

“감사합니다. 선배님께서 조언해 주셔서 작품을 선택할 수 있었거든요.”

그는 자신의 일처럼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뭐, 한마디 해준 건데. 네가 연기를 잘한 거지. 대본이나 연출도 너무 좋았고.”

최서빈이 반짝이는 눈으로 말을 이었다.

“진심으로 너무 축하해. 나는 희성이 네가 잘 되는 게 너무 보기 좋거든.”

그의 말에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마른침을 삼켜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대단할 수가 있는 거지?

아무리 높은 자리, 톱스타의 위치에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영화보다 잘된 영화를 칭찬해주고, 진심으로 축복해 주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일반적인 인간의 심리일 테니까.

그런데 축하를 해주는 최서빈의 눈, 말투, 표정에는 거짓 하나 없는.

진심이 뚝뚝 묻어나왔다.

아무리 나와 친분이 두터워졌다고 한들.

내게 이런 축복을 전달해주는 최서빈으로 하여금.

너무나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마음 깊숙한 곳에 그에 대한 내 존경심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축하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님.”

“고마울 것도 많다. 하하.”

챙-.

그와 나는 잔을 부딪쳤다.

술집에 도착한 뒤, 한 시간가량이 지나갔고.

테이블에는 두 번째 안주가 세팅되었다.

그리고 나는 한층 진지한 얼굴로 최서빈을 바라보았다.

“선배님.”

내 부름에 최서빈은 눈썹을 들썩였고.

“저 HS 엔터에서 계약 해지한 거 말입니다.”

내 말에도 최서빈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나를 도왔다는 말을 할 줄 알았지만, 일말의 티도 내지 않는 모습.

그런 그를 향해 나는 서둘러 말을 이어나갔다.

“선배님께서 도와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제야 최서빈이 미간을 찌푸리며 짧은 숨을 내쉬었다.

“뭐야, 알고 있었어?”

“얼마 전에 듣게 됐습니다. 왜 말씀 안 해 주셨습니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나는 입술을 말아 넣은 채, 시선을 그에게 옮겼고.

최서빈은 내 눈을 피해 자신의 얼굴을 긁적였다.

“민망하잖아. 아끼는 후배가 소속사 계약 건 때문에 법적 공방이니, 뭐니 하면서 기사 나오고 하니까.”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고.

최서빈은 나를 도왔다는 사실이 머쓱하고 쑥스러운지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막 날개를 달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발목 잡혀서 아무것도 못 하는 꼴을 어떻게 봐. 너를 내가 외면할 수가 있어야지.”

최서빈의 말이 끝나자, 나는 긴 숨을 내쉬었다.

나를 생각해주는 그의 마음과 말.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그에게 고마웠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선배님. 그래도 말씀해 주시지….”

“에이, 별것도 아닌데, 티 내는 것 같잖아. 부끄럽게.”

나는 결국 그의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그에게 베푼 것이 없었고.

늘 위에서 이끌어준 그였기에.

보답하고 싶지만, 갚을 방법이 없었다.

돈이 부족한 사람도 아니었고, 내가 그를 끌어줄 수 있는 위치도 아니니까.

유일하게 갚을 수 있는 방법은 ‘마음’뿐.

나는 감았던 눈을 뜨고 최서빈에게 잔을 내밀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술을 들이켰고.

그런 최서빈을 향해 진중하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배님, 제가 너무 감사해서 뭐라도 하고 싶은데,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요.”

“됐어. 뭐 바라고 한 것도 아닌데.”

“아닙니다. 나중에 저한테 부탁할 일… 그런 게 생기실지는 모르겠지만. 저한테 말씀해 주시면, 꼭 제가….”

내 말을 듣던 최서빈의 눈빛이 반짝였고.

순간 말을 잘라내며 부릅뜬 눈으로,

“그럼 너 나랑 영화 한 편 찍자.”

“네?”

“내가 하자는 작품으로, 하나 같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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