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22 – 새로운 곳에 내리는 뿌리 (2)
영화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가 매일같이 관객 수 기록을 갱신하고 있었다.
주연 배우들은 홍보차 예능이나 라디오에 많이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영화 순위 1위!
정말 시나리오와 연출,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력으로만 이루어진 성공이었다.
더불어 조연으로 출연했지만 주연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배역이 컸기에,
나오는 신 또한 꽤 많은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를 찾는 예능 프로그램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야, 희성아. 오늘도 섭외 전화가 엄청나게 왔어.”
“정말?”
김 실장의 말에 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미소를 지었다.
“어, 생각보다 더 대박인데?”
그는 앞에 놓인 영화 포스터를 손으로 툭툭 치며 말을 이어갔다.
“이 영화, 처음 시작하기 전에는 이렇게까지 잘될 줄은 몰랐는데….”
“거봐, 내가 느낌이 너무 좋다고 했잖아. 하하.”
내 말에 김 실장은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러게. 내가 더 말렸으면 어쩔 뻔했어. 배우에게는 안목이 정말 중요한 건데, 희성이 너는 진짜 타고났다.”
“에이,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칭찬만 해주시면, 민망하지.”
“우리 둘인데 뭐 어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눈 우리는.
다음 주제로 넘어가기에 앞서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럼 이제 우리 회의 좀 시작해볼까?”
“응.”
WG 엔터로 기획사를 옮긴 후.
처음으로 맡을 배역을 고르는 일이기에, 굉장히 신중해야 했다.
물론 모든 작품을 선택할 때마다 신중하지 않았던 적은 없지만.
내가 배우 업계에 이름이 알려지고 난 뒤.
하필 최근 영화의 개봉 때부터 소속사와의 법적 공방 기사가 났고.
그로 인해 기자들은 다음 행보에 대해 궁금증을 가졌다.
특히나 매일같이 색다른 뉴스가 쏟아지는 연예계.
그 세계에서 많은 조회 수를 얻으려면, 좋은 일에 대한 기사보다는.
안 좋은 일, 자극적인 사건들이 먼저 수면 위로 오르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즉, 내가 WG 엔터에서의 첫 행보로 선택한 작품이 잘 되지 않는다면.
분명 HS 엔터에서 잘나가다 한순간의 선택으로 삐끗한 배우라는 이야기가 나오겠지.
그래서 더더욱 이번에 맡을 배역과 작품에 신중해야만 했다.
“음… 이번 작품은….”
김 실장이 자신의 다이어리를 뒤적이며 말을 흐렸고.
그런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번에 섭외 들어오는 작품들은 없었어?”
대답 대신 그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부정적인 제스처에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말을 이어갔다.
“뭐, 이번에 회사도 옮기고 했으니까. 아직 안 온 걸 수도 있지.”
애써 괜찮은 척하며 그에게 말하자, 김 실장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야. 섭외는 꽤 들어왔어.”
“근데 왜 그런 우울한 표정이야?”
“섭외가 들어오기는 했는데… 전부 조연이네.”
“…….”
역시나.
우려하던 것이 현실이 되자, 나와 김 실장은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애초에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 작품을 말린 이는 김 실장이었다.
이유는 대본이 아니었다.
작품은 좋았으나, 조연으로의 출연을 걱정했던 것이지.
주연까지 올라갔던 내게.
처음으로 드라마 미니시리즈의 주연을 맡았던 내가, 다시 조연으로 내려간다는 게.
다음 작품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과는 별개로 작품을 선택했다.
그런데 김 실장의 걱정대로 조연 배역만 섭외가 들어왔다는 사실에, 씁쓸한 마음이 표정에 드러났다.
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김 실장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아직은 작품 끝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차분히 기다려보자.”
“영화에서 조연이기는 했지만, 비중이 주연이나 다름없어서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김 실장은 내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빠른 시일 내에 WG 엔터에서 괜찮은 작품으로 연기를 하고 싶었다.
HS 엔터에서 나온 것이 잘된 일이라는 것을 보란 듯이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지.
하지만 마음처럼 섭외가 들어오지 않는 것이기에.
착잡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걱정하고 좌절할세라 안심시켜 주는 김 실장을 바라보며.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생각보다 골치 아프네….”
***
“고생하셨습니다.”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짐을 옮긴 뒤, 집을 빠져나갔고.
새로운 집에 남은 것은 오로지 나 혼자였다.
짐 정리를 하기 전에, 새로운 집을 둘러보며 이 기분을 만끽했다.
배우가 하고 싶어 시작한 서울에서의 생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마련한 첫 보금자리.
아주 적은 월세로 시작한 집에서 벗어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몇 단계를 뛰어넘은 것처럼 이렇게 좋은 집으로 이사를 왔다는 것에.
감격스러운 마음이 먼저였다.
“하아… 힘들게 고생한 보람이 있네.”
창밖으로 보이는 도로.
높게 올라간 아파트와 건물들.
이전 원룸 집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뷰였다.
그 집에는 끼익 소리를 내며 겨우 열리던 작은 창문만이 있었으니까.
한강 뷰는 아니지만, 이 정도의 뷰만으로도 내게는 너무나 충분했다.
더군다나 가장 중요시 여긴 ‘보안’.
새로운 집의 보안은 여느 집보다 철저했다.
하물며 배달 기사까지 입구에서 확인을 받아야 하니까.
경비실은커녕 그 흔한 CCTV도 몇 개 없는 동네에 살던 나로서는 모든 게 감동 그 자체였다.
딩동.
그때 울리는 초인종 소리.
감격에 젖어 있던 마음을 삼키며 인터폰으로 다가갔다.
“어?”
인터폰 화면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김 실장의 모습.
서둘러 문을 열었고.
“희성아, 이사 축하한다.”
“형, 무슨 일이야?”
놀란 얼굴로 그를 맞이하자, 김 실장이 웃으며 내게 선물을 내밀었다.
“너 커피도 좋아하는데, 집엔 커피믹스뿐이잖아.”
그가 내민 것은 캡슐 커피 머신기였고.
평소 갖고 싶은 머신기였으나, 그에게 선물을 받는다는 게 고맙고 미안했기에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형… 이거 비쌀 텐데.”
“에이, 얼른 받아. 네가 나한테 해준 게 많잖아.”
“아니야. 그래도 이건….”
김 실장은 내 말을 잘라내며 서둘러 주방으로 다가갔다.
“여기에 놓으면 되겠네!”
“형, 고마워.”
“이 집에서 더 많은 작품도 하고 잘 되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응, 그래서 형한테 더 잘해야겠다.”
“하하, 그래야지. 뇌물이 먹혔나?”
그는 웃으며 집을 둘러보다 입을 열었다.
“맞다. 여기는 이제 초인종도 잘 되네. 전에 집에서는 초인종도 오래돼서 문 두드리고 그랬는데.”
“응, 거기 초인종은 그냥 장식용이었지, 뭐. 하하.”
“짐은 이게 다야?”
“어, 전 집이 워낙 작았으니까. 이제 하나씩 채워가야지.”
김 실장이 어깨를 들썩이며 당황한 듯 내게 말했다.
“이사 도와주려고 온 건데, 정리할 게 없네?”
“에이, 그래도 도와줄 건 많지.”
나는 풀지 않은 상자들을 눈으로 가리켰다.
“아이고, 많았네?”
김 실장은 서둘러 팔을 걷으며 쌓여 있는 상자로 다가왔다.
몇 시간 내내 쉬지 않고 짐 정리를 했고.
어느새 김 실장과 내 배에서는 배꼽시계가 울려 퍼졌다.
“아, 배가 너무 고픈데?”
딩동.
때마침 도착한 배달 음식.
서둘러 거실에 신문지를 깔았고.
그 위에 배달 온 짜장면과 탕수육을 펼쳐놓았다.
“역시 이사 날에는 중국집이지.”
김 실장은 침을 삼키며 짜장면을 비비기 시작했다.
“크으, 여기 짜장면 맛집이네!”
이사를 돕느라 배가 많이 고팠는지, 그릇에 얼굴을 담글 정도로 가까이 가져다 댄 채 흡입하듯이 먹었다.
그런 김 실장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맞다, 형. 나 옆집이랑 위아래 집에 인사해야 하는데, 뭐 떡이라도 돌려야 하나?”
그러자 그는 먹던 면을 잘라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즘은 잘 안 하지 않나?”
“그래도 이사 왔다고 알리는 게 낫지 않나 싶어서….”
“하긴. 그럼 윗집에서 조금이라도 층간 소음 덜 내려고 노력은 해주겠다. 그렇게 해.”
“떡이 좋을까?”
내 말에 김 실장은 대답 대신 짜장면을 마시듯이 먹었고.
그의 먹는 모습을 먹방 보듯 바라보았다.
짝!
갑자기 김 실장이 짜장면을 내려놓고 손뼉을 부딪쳤다.
“아, 맞다!”
놀란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그를 바라보았고.
“깜짝이야. 왜?”
그러자 김 실장이 턱으로 옆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 김하나 배우 산다고 했어.”
“김하나?”
김 실장의 말에 나는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WG 엔터의 여배우 중 한 명.
주연 급으로 잘나가는 배우는 아니었지만, 단역부터 차근차근 하나씩 계단을 오르고 있는 배우였다.
내가 HS 엔터에 있을 당시, 그녀와는 다른 회사였지만.
나와 비슷한 성장에 눈여겨보며 응원하고 있었지.
“응, 바로 옆집이야.”
순간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헐, 내 옆집에 연예인이 산다고?”
내 말에 김 실장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야, 희성아. 너도 연예인이잖아. 하하.”
“맞네. 나도 연예인이지.”
“그래, 게다가 김하나 배우보다 네가 더 잘나가는데?”
“에이, 그래도… 아무튼, 진짜 신기하다. 옆집이라니, 다음에 인사나 해야겠네.”
“응, 이제 같은 회사인데, 친분 생기면 좋지.”
우리는 그 대화를 끝으로 앞에 놓인 짜장면과 탕수육에 집중했다.
“불기 전에 얼른 먹자.”
몇십 분이 흐르고.
중국 음식을 모두 먹은 뒤, 김 실장이 선물로 준 커피머신을 개시했다.
“우와! 형 이거 엄청나게 좋다.”
“다행이네. 거기 직원이 그 머신기가 제일 잘 나간다고 하더라고.”
“커피 향도 장난 아니야.”
김 실장은 뿌듯한 얼굴로 내게 다가와 커피를 받아들었다.
“선물 주니까 좋네. 앞으로 커피 마시러 놀러 와야겠다.”
“당연하지. 형이 사준 건데, 언제든 마시러 와.”
그와 나는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며 커피를 들이켰다.
“오랜만이다. 이렇게 평화롭고 아무 생각 없이 쉬는 거.”
그러자 김 실장이 고개를 살짝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게. 최근에 너무 바빴지.”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최근에 배우 활동뿐 아니라, 소속사 관련해서 신경 써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하아… 그래도 이렇게 소속사 옮기는 것도 문제없이 깔끔하게 정리돼서 다행이야.”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고개를 들며 말했고.
김 실장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희성아, 안 그래도 이거 언제 말해줘야 하나 했는데….”
“왜, 불안하게 뭔데 그래?”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자, 김 실장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니야. 이상한 건 아니고.”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 뒤 말을 이었다.
“HS 엔터에서 계약 해지해줄 때 말이야. 갑자기 깔끔하게 해지해 준다고 했잖아.”
김 실장의 말에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랬지. 안 해줄 것처럼 하더니, 갑자기 해줬지만. 그게 왜?”
“나도 몰랐는데, 이번에 WG 엔터로 옮기면서 다른 팀장님한테 전해 들었거든.”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데시벨을 낮췄다.
우리 둘뿐인 집이었지만, 조심스러운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그의 말에 집중해 귀를 기울였다.
“그때 최서빈 씨가 도와줬대.”
“뭐?”
나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고.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잘못 들은 건가 싶은 마음에 김 실장을 향해 되물었다.
“아니. 진짜로 서빈 선배가 나를 도와줬다고?”
“응, 나도 며칠 전에 들은 거야. 강 본부장도 굳이 나나 너한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겠지.”
“…말도 안 돼.”
최서빈이 나를 도왔다는 말에,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싫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 힘든 시기에, 심지어 다른 소속사인 나를 도와줬다는 자체가 너무 고마웠고.
그 마음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벙찐 얼굴로 김 실장을 바라보며 연신 눈을 깜빡이자,
그는 나를 향해 어깨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희성이 네가 인복이 있는 거지.”
김 실장의 말은 수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 주변인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해가 뉘엿뉘엿 질쯤.
짐 정리가 끝나갔고, 김 실장은 그 전에 집을 나섰다.
끝까지 도와주겠다는 그를 만류했고.
고생한 김 실장을 보낸 뒤, 나머지 정리를 시작했지.
홀로 남은 집.
문득 떠오른 생각에 손을 털고는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곧장 최서빈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이 채 울리기도 전에 그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선배님, 통화 가능하십니까?”
-그럼. 이사한다더니, 잘했어?
“네, 오늘 다 옮기고, 이제 좀 살 만해졌습니다. 하하.”
-다행이네. 다음에 집으로 놀러 가봐야겠네.
“언제든지 환영이죠.”
-좋지.
“선배님, 오랜만에 얼굴 뵙고 술이나 한잔하고 싶은데, 언제 시간 되십니까?”
-요즘 쉬고 있으니까 언제든 가능해. 너도 아직 쉬는 중이지?
“네, 매일 집에 있습니다. 선배님 되시는 날로 맞추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 항상 가던 술집에서 볼까?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