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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12)화 (112/303)

112화 #21 – 처음과 끝 (6)

“희성아…!”

김 실장이 계약 해지를 마치고 나온 나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이에 그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고.

김 실장은 입술을 잘근 깨문 채, 내게로 다가와 아무 말 없이 어깨를 토닥였다.

그와 나는 말없이도 서로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한참 힘든 시기를 보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김 실장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고생했다.”

“아니야. 형 덕분에 깔끔하게 정리됐어.”

그는 내게 스케줄 달력을 보이며 말했다.

“이번 마지막 스케줄 하나만 끝나면, 정말 계약 종료네.”

김 실장은 계약 해지를 축하하는 표정과 나와의 이별에 씁쓸한 표정이었다.

그 두 가지가 공존하는 얼굴로 말했다.

김 실장의 늘어진 눈썹을 보며 답했다.

“응, 그래도 형이랑 나와의 관계는 끝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럼. 그냥 매니저만 아닐 뿐이지, 희성이 너랑 나 사이도 끝나는 건 아니니까.”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우리 사이에는 슬픔이 묻어나왔다.

내 첫 번째 매니저를 맡아준 사람이 김 실장이었고.

그래서가 아니라, 김 실장과의 관계가 돈독해졌기에 나 역시 매니저와의 이별이 유독 아쉽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거 하나만으로 HS 엔터에 남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지.

“앞으로 지금처럼 매일은 못 보겠지만, 자주 보자.”

“그래, 게다가 우린 좀 더 봐야 해. 아직 계약 스케줄이 남은 거 알지? 하하.”

그의 말에 우리는 웃음을 터트리며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맞네.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매니저님. 하하하.”

“네, 그래야죠.”

김 실장이 눈썹을 들썩이며, 나와 함께 회사 밖으로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스케줄 없으니까, 들어가서 푹 쉬어.”

“알겠어.”

“일정은 내가 다시 한번 연락 줄게. 바로 집으로 갈 거지?”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차에 올라탔다.

몇십 분 뒤.

집 앞에 멈춰 선 차.

김 실장과 짧은 인사를 나눈 뒤, 차에서 내렸고.

서둘러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지이잉.

그때, 울리는 휴대 전화.

발신인은 저장이 되지 않은 번호였고.

배우 생활을 시작하고 번호를 여기저기 알리지도 않았는데, 어디서 전화가 온 거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진희성 님 휴대 전화 맞을까요?

굵고 부드러운 목소리의 남성.

나는 한껏 경계심을 가진 채, 조심스럽게 답했다.

“네, 어디서 전화 주셨을까요?”

-안녕하세요. 저는 WG 엔터에 손석훈 팀장이라고 합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말에 집을 향해 걷던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WG 엔터라면….

최서빈이 소속되어 있는 회사.

즉,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유명 기획사로 내가 몸을 담았던 HS 엔터의 라이벌 구도 회사였지.

그 말에 놀라 연신 눈을 깜빡였다.

“WG 엔터에서 무슨 일로…….”

-이번에 HS 엔터와 계약을 해지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기사가 나더니, 벌써 여러 기획사에 소식이 들어간 모양이다.

“예, 그런데요?”

-혹시 만나 뵙고 이야기 나누고 싶은데, 가능하실까요?

잠깐만.

계약 해지와 더불어 나를 만나고 싶다는 건.

새로운 기획사의 러브콜이잖아?

나는 순간 입꼬리가 휘어졌다.

HS 엔터에서 무작정 나오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당장 나와서 어느 기획사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은 확고하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내가 원하는 기획사에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막연하게 좋은 기획사에 가야지, 라는 생각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WG 엔터는 당연히 좋은 기획사 중 하나였기에.

내게는 이 전화가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손 팀장의 제안을 거절할 리는 더더욱 없었지.

계약 해지를 하자마자 내게 제안이 온 첫 번째 회사가 WG 엔터라니.

기가 막히는 타이밍에 길거리에 그대로 멈춰 선 채, 전화기에 들리지 않게 소리 없이 기쁨을 표출했다.

***

“안녕하세요. 진희성 배우님!”

WG 엔터 입구에 도착하자, 내게로 달려와 허리를 접는 사람.

목소리를 들으니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내게 전화를 걸었던 손 팀장이라는 것을.

“안녕하십니까, 손 팀장님.”

“아이고, 너무 반갑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힘드셨죠?”

“아닙니다.”

그는 손을 뻗어 회사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얼른 들어가시죠.”

“네.”

손 팀장을 따라 들어가자, 미리 세팅이 되어 있는 자리.

테이블에는 커피와 음료수가 놓여 있었고.

그의 안내에 나는 곧장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 회사에서 나오셨다는 소식 듣고, 다른 회사에서 먼저 희성 님께 연락할 것 같아 급하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하하.”

손 팀장은 전화와 마찬가지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고.

그의 진중한 목소리는 신뢰감이 가득해 보였다.

“좋게 봐주셨다니, 감사하네요.”

“희성 배우님의 연기력은 말할 것도 없잖습니까. 러브콜이 쇄도할 것 같아서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고.

손 팀장은 본격적으로 WG 엔터가 왜 나와 함께하고 싶은지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선 저희 WG 엔터는 진희성 배우님을 위해 드라마와 영화에서….”

WG 엔터는 나에 대해 많은 조사를 했는지.

내 연기의 스펙트럼과 내가 원하는 장르를 읊었고.

WG 엔터와 함께한다면, 그들이 내게 해줄 수 있는 것들.

더불어 내 배우 생활에 단순히 몇 개월 후가 아닌, 몇 년 뒤의 미래까지도 그려놓은 모습을 설명했다.

그런 그의 말에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지만.

단순히 기분 좋은 말에 현혹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그린 나의 미래와 내가 추구하는 배우 생활이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에 절로 머리가 흔들어졌다.

한참이나 손 팀장과 이야기를 나눴고.

그는 준비해온 서류를 내밀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희와 함께 일을 해주신다면, WG 엔터 측에서 제안 드리는 계약 내용은 이렇습니다.”

소속사와의 마음이 맞는지를 본 뒤,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계약서다.

당연히 ‘돈’, 그 배분율이 중요했지.

현재 HS 엔터에서 적용하던 비율은 55:45.

일을 해서 번 돈에서 55는 내가, 그리고 소속사에서 45의 비율을 정산하는 식이었다.

나는 손 팀장이 내민 서류를 바라보았고.

눈으로 따라 읽어 내려가는 것을 바라보며, 손 팀장이 내게 말했다.

“저희는 희성 배우님께 70, 저희가 30인 비율로 가려고 합니다.”

무려 70:30.

‘와, 대박인데?’

숫자로 보면 기존에 받던 비율보다 조금 커진 것이지만.

금액으로 따져본다면, 그 배분율은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촬영 후 1억의 출연료를 협상한다면.

HS 엔터에서는 5,500만 원.

WG 엔터에서는 7,000만 원을 받는 셈이니까.

버는 돈의 금액이 크면 클수록 비율이 높다는 것을 더 실감하겠지.

나는 그 70이라는 숫자에 귀가 솔깃했고.

거기에 한 방을 더하듯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여기에 계약금으로 1억 5천까지는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전혀 아쉬운 금액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환호성이 나올 금액이었지.

그렇다고 해서 이 자리에서 활짝 웃으며 기쁨을 표출해서는 안 될 터.

나는 금액에 두근대는 가슴을 차갑게 누르며 최대한 감정을 숨겼다.

그리고 그를 향해 미간을 찌푸린 채 질문을 던졌다.

“그럼 계약 기간은 어떻게 될까요?”

그는 내 물음에 망설임 없이 곧장 답했다.

“계약 기간은 4년입니다.”

HS 엔터에서는 말도 안 되는 7년이라는 기간을 내뱉었는데.

정상적인 4년 계약 기간이라는 말에, 나는 더 고민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여유로운 얼굴로 눈썹을 들썩였고.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 팀장을 바라보았다.

“다 좋은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내 말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몸을 당겼다.

“네, 말씀하십시오. 어떤 조건입니까?”

나는 쓰읍,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제가 WG 엔터와 계약을 하게 된다면, 꼭 데려오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

챙-!

하늘을 향해 높이 뻗은 술잔이 허공에서 부딪치자,

넘실거리던 술이 잔을 타고 흘러넘쳤다.

“희성아, 그동안 부족한 매니저 옆에서 고생 많았다.”

김 실장은 아쉬움이 뚝뚝 흐르는 얼굴로 말했고.

나는 쓰디쓴 알코올을 입 안 가득 머금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첫 매니저가 형이라, 다른 매니저와 비교할 만한 대상은 없지만. 내 매니저가 형이라서 너무 든든하고 좋았어.”

나는 그의 빈 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하나도 부족함을 못 느꼈고. 다음 매니저도 형 같은 사람이면 좋을 텐데….”

“뭐, 사실 내가 잘하긴 했지? 하하.”

그의 너스레에 마지막일 것 같던 슬픈 분위기는 한 번에 풀어졌다.

“아마 나 같은 매니저를 또 만나기는 쉽지 않을걸?”

“맞지.”

밝게 바뀐 분위기에도 김 실장의 표정에는 이별이라는 단어가 써진 듯 눈썹이 한껏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이제 모든 일정도 마쳤고, HS 엔터랑은 정말 끝이네.”

“응, 생각보다 수월하게 계약 해지도 됐으니까.”

챙-.

다시 한번 그와 나는 술잔을 기울였다.

그렇게 아쉬움과 지난 회상을 안주 삼아 술잔을 부딪치다 보니.

어느덧 소주 한 병이 비워졌다.

“그래서 WG 엔터랑 계약은 잘 했어?”

“응, 조건도 괜찮고, 믿고 갈 만한 것 같더라고.”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입술을 잘근 깨물며 넋두리하듯 입을 열었다.

“이제 희성이 너 없으면, 나는 어떤 배우 매니저로 들어가려나….”

그는 시선을 옮겨 술잔을 바라보았고.

툭툭.

나는 그의 술잔 옆 테이블을 손등으로 두드리며, 그의 시선을 가져왔다.

“형.”

김 실장이 내 부름에 눈썹을 들썩이며 눈을 마주쳤고.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그에게 말했다.

“누구 매니저 하기는, 내 매니저 계속해야지.”

“응?”

내 말에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거렸고.

“내 매니저 하러 같이 가야지.”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김 실장을 향해 어깨를 들썩이며 미소를 지었다.

“WG 엔터로 같이 가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거기를 어떻게 가.”

김 실장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고.

난 미소를 지워낸 얼굴로 그를 향해 답했다.

“가면, 지금 형이 받던 연봉보다 1.5배는 해줄 수 있어.”

“…거기서 나한테 1.5배를 준다는 말이야?”

“응, 그렇게 하기로 이야기했어.”

***

일주일 전.

WG 엔터에서 손 팀장과 계약 이야기를 진행하던 중.

그는 내가 요청한 조건, 김 실장을 데려오겠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럼 이왕 들어 주시는 김에, 한 가지만 더 부탁할 수 있을까요?”

“혹시 계약금이 부족하신 건가요?”

손 팀장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요. 제 돈 말고, 혹시 제가 데려올 매니저 연봉을 기존 회사보다 올려 주셨으면 해서요.”

내 말에 그는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팀장 자리에서 많은 연예인분과 계약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돈이 아닌, 매니저 월급 인상을 이야기하시는 분은 두 번째로 보네요.”

“정말요?”

“네, 처음 그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찡했었거든요. 그 한 분이 최서빈 배우님이었고, 그리고 오늘 진희성 배우님까지 딱 두 분이세요.”

***

그리고 지금.

여전히 얼어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김 실장은 마른침을 한 번 삼켜냈다.

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마음이 벅차오는지 바닥을 내려다보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우.”

그의 흔들리는 동공.

입에 바람을 불어 넣고 연신 숨을 내뱉는 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김 실장이 얼마나 놀랐는지.

더불어 내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고민에 잠겼다는 것을.

빠르게 눈을 깜빡이던 김 실장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런 후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작게 읊조렸다.

“…희성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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