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11)화 (111/303)

111화 #21 – 처음과 끝 (5)

“어, 서빈 씨?”

WG 엔터 사무실에 최서빈이 출근하자, 직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소 사무실에 출근을 하지 않는 그였기에.

그의 등장에 놀란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최서빈은 자신을 향한 시선에 인사를 보낸 뒤.

곧장 매니저인 배 실장의 자리로 걸어갔다.

“형!”

최서빈의 부름에 배 실장이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빈아, 내가 이따가 데리러 간다니까 뭐 하러 여기까지 왔어.”

“아니, 오늘은 스케줄도 없고, 내 개인적인 일이니까.”

“우선 커피나 마시면서 마저 이야기하자.”

그의 말에 최서빈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은 WG 엔터의 휴게실로 발길을 옮겼다.

둘은 아무런 대화 없이 빠르게 휴게실로 향했고.

“와아-.”

“나 최서빈 처음 봐.”

“나도. 입사하고 회사에서 최서빈을 볼 줄이야.”

최서빈은 푹 눌러쓴 모자에 커다란 검은 마스크까지.

얼굴을 꽁꽁 싸맨 채 사무실에 왔지만, 그를 못 알아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들끼리 속닥대는 작은 목소리는 최서빈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모자를 한 번 더 눌러쓰고 발걸음을 옮겼다.

“서빈아, 여기.”

휴게실에 도착한 배 실장은 곧장 그에게 커피를 건넸고.

최서빈은 그제야 마스크를 벗으며 배 실장에게 말했다.

“고마워.”

한창 근무 시간인 지금.

휴게실에는 최서빈과 배 실장 외에 다른 직원은 없었다.

최서빈은 마스크로 인해 답답했는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은 뒤.

그를 향해 물었다.

“형, 내가 부탁했던 건?”

최서빈의 물음에 배 실장은 들고 온 자료를 내밀었다.

“여기.”

그리고 서류를 손에 쥔 채, 최서빈을 향해 물었다.

“근데 이 서류로 뭐 어떻게 하려고?”

“뭐든 해봐야지.”

최서빈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배 실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미간을 찌푸린 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서빈이 너 설마… 거기로 직접 가려는 건 아니지?”

“형도 같이 가주게?”

“…서빈아!”

놀란 배 실장이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으나.

그 목소리에 최서빈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나서야지.”

“하아….”

잠시 그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고.

최서빈이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도 이 바닥 알잖아.”

“그래도… 네가 나서는 게 위험해서 그렇지.”

“괜찮아. 내가 위험해질 건 없어. 걱정 안 해도 돼.”

배 실장 앞에 놓인 커피는 처음 그대로의 모습으로, 김만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고.

최서빈의 커피는 어느새 바닥을 보였다.

배 실장은 연신 걱정 가득한 한숨을 내쉬다,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뭐 말린다고 해서 될 것도 아니고.”

그의 말에 최서빈은 입꼬리를 휘었고.

배 실장은 턱으로 바깥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자, 어차피 갈 거면 내가 태워다줄게.”

배 실장의 말에 최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삼십여 분이 흐르고.

그들의 차는 곧바로 WG 엔터를 나섰다.

“서빈아, 내가 그쪽이랑 연락은 해뒀어.”

“고마워, 형.”

“같이 올라갈까?”

그는 여전히 근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최서빈을 바라보았고.

최서빈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전화하고.”

“알겠어.”

멀지 않은 거리이기에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끼익.

차는 이내 정문에 멈춰 섰고.

배 실장이 몸을 돌려 최서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밑에서 기다릴게.”

“응.”

최서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차에서 내려, 약속된 장소로 향했다.

***

“아이고, 우리 톱스타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HS 엔터 강 본부장이 최서빈을 향해 밝은 얼굴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본부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그러게요.”

그들은 맞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악수를 나눴고.

겉으로 환하게 미소 짓고 있지만, 그들의 속마음은 너무나도 달랐다.

‘우리 제안을 거절할 때는 언제고, 여기가 어디라고 마음대로 찾아와?’

강 본부장의 의뭉스러운 미소 뒤에는 차가운 마음이 있었지만.

그걸 꼭꼭 감춰내며 최서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먼 길 와주셨는데, 드릴 게 이런 것뿐이네요.”

강 본부장은 테이블에 올려진 찻잔을 바라보며 말했고.

최서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얼른 앉으시죠.”

“네.”

서로를 마주 보고 앉은 둘.

강 본부장은 최서빈이 자신을 찾은 이유에 대해 너무나 궁금했지만.

앉자마자 물어볼 수는 없다는 생각에, 그저 미소를 지으며 근황에 대해 물었다.

“서빈 씨 영화가 개봉했던데, 재밌다는 말이 파다하더라고요.”

“아, 네. 감사합니다.”

짧은 답으로 대화를 끊어낸 최서빈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고.

강 본부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HS 엔터의 진희성 배우도 영화 개봉하지 않았습니까?”

“예, 이번에 개봉했죠. 그것도 알아주시고, 감사하네.”

“그럼요, 당연히 알아야죠.”

최서빈은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기대고 있던 등을 일으켰다.

그리고 강 본부장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회사랑 요즘 법적 공방을 펼친다고 기사가 자자하더라고요?”

“…….”

최서빈의 말에 강 본부장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자신의 회사 내부의 일을 굳이 라이벌 회사인 WG 엔터 최서빈이 와서 꺼낸다는 것이.

듣기에 좋지는 않은 모양.

하지만 이내 그 표정을 숨기며 닫았던 입을 떼어냈다.

“그 소문이 서빈 씨 귀에까지 들어갔나 보네요.”

“그럼요. 진희성 배우가 이제 탄탄대로로 오르는 배우이지 않습니까.”

영 거슬리는 최서빈의 말에 강 본부장은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고.

애써 미소 지으며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오늘 오신 게 어떤 거 때문인지….”

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최서빈이 먼저 말을 잘라냈다.

“계약 해지. 깔끔하게 끝내시죠.”

“예?”

얼굴을 잔뜩 찌푸린 강 본부장을 바라보며 최서빈은 재차 똑 부러지게 말했다.

“진희성 배우. 더 이상 언론에 들쑤시지 말고, 깨끗하게 포기하시라고요.”

“하아, 참.”

순간.

선한 듯 미소 짓던 강 본부장의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졌고.

살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돌변했다.

“이보세요, 최서빈 배우님. 아무리 톱스타라고 하지만, 내 앞에서는 아니지.”

돌연 변해버린 건 비단 눈빛만이 아니었다.

강 본부장은 차가운 말투로 그에게 읊조렸고.

그렇다고 해서 최서빈도 전혀 기에 눌리지 않았다.

탁.

그러고는 곧장 테이블에 준비해온 서류를 올렸다.

강 본부장은 눈을 흘겨 아래에 있는 서류 글자를 바라보았고.

그 서류는 다름 아닌, HS 엔터의 한 연예인 이름이 적힌 계약서였다.

최서빈은 서류를 바라보는 강 본부장의 얼굴을 쳐다보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자신의 위치를 항상 보고하고, 출국할 때도 사전에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의 말에 강 본부장은 미간을 찌푸렸고.

“연예계 활동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갑은 을에게 ‘모든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최서빈은 대사를 외우듯 계약서의 내용을 모두 숙지했고.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HS 엔터와 계약을 해지하더라도 같은 연예계 업종에 종사할 수 없다. 유사한 연예계 활동은 모두 중단해야 한다.”

그의 말에 강 본부장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또!”

최서빈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HS 엔터에서 요구하는 행사는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출연해야 하며, HS 엔터, 계열사가 주관하는 행사는 무상으로 출연해야 한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HS 엔터의 허락이 없으면, ‘을’은 마음대로 연예계 활동을 중지하거나 은퇴할 수 없다.”

결국 강 본부장은 앞에 놓인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쫘악-!

그대로 그 종이를 찢었고.

“최서빈, 선 넘지 마.”

“이거 말이 되는 계약서라고 생각하십니까?”

최서빈은 그의 얼굴 가까이 몸을 당기며 말했다.

“신인 여자 연예인들 데리고 노예 계약하시는 거 세상에 까발려지면, HS 엔터가 무사할 것 같으십니까?”

“이건 회사 내부에서….”

“하, 내부 규정이다?”

“어차피 이건 연습생들이랑 이야기하던… 아니, WG 엔터에서 갑자기 찾아와 이러는 건 아니지 않나?”

최서빈은 헛웃음을 터트렸고.

이내 그 웃음을 얼굴에서 싸악 지워내며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진희성… 그냥 놔줍시다.”

“지금 진희성 때문에 이러는 겁니까?”

최서빈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강 본부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더 이상 건드리면, 이 계약서에 있는 독소 조항. 그리고 HS 엔터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저 깊은 곳 어둠의 이야기들… 모두 터트리겠습니다.”

그의 경고에 강 본부장은 이를 꽉 깨물었고.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안면 근육이 파르르 떨려왔다.

“그럼 깔끔하게 정리하는 거로 알고,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뒤돌아 나가는 최서빈.

강 본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최서빈, 상대를 잘못 골랐어. 지금 기업을 상대로 네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고.

최서빈은 그 말에 걷던 발걸음을 멈춰 세워,

고개를 돌리며 강 본부장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미동조차 없는 얼굴로 그를 향해 작게 읊조렸다.

“나, 최서빈이야.”

그렇게 짧은 한마디를 내뱉고는 그대로 본부장실을 빠져나갔다.

쾅.

문이 닫혔고.

“아오, 저 개자식!”

강 본부장은 홀로 남은 이곳에서 테이블을 내려치며 소리를 내질렀다.

***

“하아… 어떻게 했길래, 계약서가 새어 나가!”

HS 엔터 임 대표는 강 본부장을 향해 종이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그에 그는 손을 몸 앞으로 공손히 모은 채 허리를 접었다.

“죄송합니다.”

“X발. 진희성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쾅.

임 대표는 자신의 테이블을 내려쳤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있는 강 본부장을 향해, 임 대표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냥 풀어줘.”

“네?”

“진희성. 그냥 계약 해지 하라고!”

“아, 그렇게 진행할까요?”

강 본부장이 답답한 듯 임 대표가 넥타이를 손으로 풀며 답했다.

“어, 대신 이번 거 유류비 세게 떼서 정산해.”

“알겠습니다.”

강 본부장은 앞에 놓인 서류를 손으로 모아 집어 들었고.

그를 향해 다시금 허리를 접었다.

“길게 끌지 말고, 빨리 정리해. 괜히 말 안 나오게.”

“예,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진희성도 바로 내 방으로 호출하고.”

“네.”

임 대표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소리쳤다.

“하아, 제대로 똥 밟았네. X발….”

***

갑자기 내게 계약 해지를 해주겠다는 임 대표의 통보가 내려왔고.

그 의아함에 나는 서둘러 대표실로 달려왔다.

“어, 희성 씨. 앉지.”

그는 기다렸다는 듯 나를 맞이했고.

나는 한껏 경계심을 가진 채, 그의 앞에 착석했다.

“계약 해지는 이야기 들었지?”

“네, 그런데 갑자기 왜….”

임 대표가 내 말을 잘라내며 급히 답했다.

“희성 씨가 요구했다면서, 계약 해지.”

“…….”

그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회사에서 소속 연예인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기에, 계약 위반으로 계약 해지를 요구했었고.

그 말에 강 본부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내 말을 무시했다.

그렇기에 지금 법정 공방까지 가고 있는 중이었지.

그런데 허무하게도 계약 해지를 받아들였고.

임 대표의 꿍꿍이가 궁금해졌지만.

그는 내게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않았다.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가 뭔지 궁금합니다.”

“이유가 뭐 있겠나. 소속 연예인이 힘들어하고, 계약 해지를 요구하니 들어주는 수밖에.”

이제와 대인배인 척하는 임 대표에게 의아함이 들었지만.

순순히 해지를 해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바로 해지를 해주시는 겁니까?”

그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아무런 대가나 조건 없이 말입니까?”

재차 묻는 내 말에 그는 내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대신, 여기서 있었던 일은 모두 입 다물기로.”

역시.

그저 아무 조건 없이 놔줄 사람이 아니지.

소속 연예인에게 스토커가 붙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무시해 버렸고.

그 결과 스토커가 주거 침입까지 했는데.

자신들의 잘못이 끝까지 퍼지지 않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건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내게 요구했던, 말도 안 되는 7년이라는 긴 시간의 계약 기간.

소속 연예인을 보호하지 못한 소속사.

모두 널리 퍼트리고 싶었지만, 지금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계약 해지였다.

이 울타리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는 결국 그의 요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도장을 찍은 뒤.

몇 시간이 흘렀고.

회사에서는 나와의 계약 해지가 퍼지기를 원했다는 듯.

서둘러 기사가 올라왔다.

[[단독] HS 엔터 - 진희성과 전속 계약 해지… 배우 의사 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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