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10)화 (110/303)

110화 #21 – 처음과 끝 (4)

“여기서 끝내시죠.”

내 말에 강 본부장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진희성… 아니, 김 실장. 너 담당 연예인 관리 똑바로 안 해?”

그는 고개를 돌려 내가 아닌 김 실장을 향해 소리쳤고.

김 실장 역시 회사와의 계약을 끊겠다는 내 말에 놀란 눈치였다.

그렇다고 내 말에 반박을 하거나, 말리지는 않았다.

그 또한 강 본부장의 뻔뻔한 태도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김 실장은 입을 꾹 다문 채 한숨을 쉬었고.

강 본부장은 뒤돌아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커다란 의자에 앉아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며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런 식으로 계약을 취소하겠다고 여기까지 온 건가?”

나는 그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아니요. 저는 단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눈썹이 휘었지만.

강 본부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회사로 스토커에 대해 제보한 내용을 숙지하고 계셨는지, 알았다면 조치를 왜 취하지 않았는지. 대체 왜 묵인을 한 건지!”

말을 할수록 점점 높아지는 내 목소리에 강 본부장의 입꼬리가 떨려왔다.

“그래서 계약을 해지하겠다라….”

“네, 더 이상 소속 연예인으로서 지킬 생각이 없으신 거 아닙니까?”

“그건….”

강 본부장의 말을 잘라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이미 지키지 않으셨잖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HS 엔터 울타리 안에 있을 필요가 없는 거 아닙니까?”

그는 내 말에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러고는 책상에 양쪽 팔을 올려 턱을 괴며 내게 말했다.

“어디 하고 싶은 대로 해봐.”

“예, 저는 HS 엔터와의 인연. 끝내겠습니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나는 결국 뒤를 돌았고.

그런 내 뒤통수를 향해 강 본부장이 소리쳤다.

“그게 네 마음대로는 안 될 거야.”

그의 목소리에 멈춰 선 발길.

나는 본부장실의 손잡이를 잡은 채 고개만을 돌려 그를 흘긋 바라보았다.

“법대로 하겠습니다.”

***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자마자, 다음 단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잊어서는 안 된다.

국내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회사인 HS 엔터.

그런 대기업을 상대로 싸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

단순히 계약 기간을 채우고 회사와 이별을 하기에는.

그 시간까지 이대로 지낼 수는 없을 터.

회사와의 계약 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계약을 해지하기 위해서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희성아….”

김 실장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불렀고.

나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그에게 답했다.

“형, 미리 말 못 해서 미안.”

사실 강 본부장과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는 회사와의 계약을 해지할 생각이 없었다.

물론 HS 엔터와의 연을 이어가도 되는가에 대한 의문은 항상 있었지만.

그 불씨를 강 본부장이 오늘 지펴버린 것이지.

김 실장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나도 강 본부장님 말 듣고 놀랐거든.”

“그러게. 회사랑 안 좋게 나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그렇게 되게 생겼네.”

김 실장은 한숨을 참아냈고.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그래서 계획은 있는 거야?”

“이제 준비해야지. HS 엔터랑 안전하게 이별할 계획을.”

김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든 도울게.”

내가 HS 엔터를 나간다고 하더라도, 김 실장은 나와 함께 회사를 뛰쳐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는 HS 엔터의 직원이니까.

어쩌면 회사의 지시로 나를 설득해야 할지도 모르는 김 실장이, 나를 돕겠다고 한다.

그 마음만으로도 그에게 감사했다.

“고마워, 형. 도움이 필요하면 꼭 이야기할게.”

김 실장은 창밖을 바라보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고.

그러다 내 앞으로 다가와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그가 내민 건 다름 아닌 명함이었고.

명함에 써진 곳은 변호사 사무실이었다.

“거기 실력 좋은 곳이야. 아는 곳 없으면, 거기로 한번 가봐.”

그의 말에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고.

“형….”

회사가 아닌 내 편에서 도움을 주는 그를 바라보며 가슴 한편이 뭉클해졌다.

“시간 잡아서 같이 가도 되고.”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야. 나 혼자 해볼게. 충분히 도움 됐어.”

김 실장이 내 말에 눈썹을 늘어뜨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눈에 불을 켜고 말했다.

“내가 매니저 업계에서 엄청나게 오래된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바닥에서 볼 거 못 볼 거 많이 봤거든. 저 변호사님이라면, 충분히 승산 있으니까 꼭 가봐.”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는 생각에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그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자료는 잘 검토해 봤습니다.”

장승현 변호사는 내 맞은편에 앉아, 자료를 손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나는 몸을 당겨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큰 소리를 떵떵 치고 회사에서 나왔지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어쨌든 법정까지 가는 싸움이라는 것은.

지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닐 테니까.

어떻게든 대기업 HS 엔터를 상대로 이겨야만 했고.

애매한 답변이 아닌, 보다 더 확실한 답을 들어야 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장 변호사를 바라보았고.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거 자료 조작일 가능성은 없는 거죠?”

그의 말에 나는 쉴 틈도 없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당연하죠. 팬 카페의 운영진이 스토커 정여진에 대한 자료들을 정리한 거고, 이걸 회사에 그대로 전달한 겁니다.”

탁.

USB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이건 뭐죠?”

“회사에서 이 자료를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며칠 전.

스토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강 본부장을 만났던 날.

나는 습관처럼 본부장과 나누던 이야기를 녹취했다.

몰래 남의 이야기를 녹취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내가 상대방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녹취할 마음을 먹고 본부장실에 들어갔다기보다는.

배우 신인 시절부터의 내 습관 중 하나였다.

항상 모든 대사를 연습할 때, 내 연기를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녹음을 했고.

배우다운 대우를 받지 못했던 그 시절.

말이 달라지는 몇몇 스태프들 탓에 녹음 버튼을 쉽게 누르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그게 이렇게 쓰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

게다가 강 본부장이 술술 이야기를 내뱉었고.

더불어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은 꿈에도 몰랐지.

장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USB를 자신의 앞쪽으로 당겼고.

“이것도 제가 검토해 보겠습니다.”

“네, 회사에서도 이런 일까지 일어날 줄은 몰랐을 테지만, 처음 제보를 했던 건 분명 알고 있었습니다.”

내 말에 그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답했다.

“회사 쪽으로 제보를 했을 때, 회사에서도 그 내용을 확실히 알았다는 증거가 있을까요?”

“이 녹취요.”

“음… 더 확실한 증거가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그의 말에 나는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고.

장 변호사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회사에서 이 내용에 답변을 보냈다면, 그게 증거가 되겠죠?”

“그럼요. 답변을 했다는 건,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는 뜻이니까요.”

나는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고.

깊게 고민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가장 확실한 방법.

제보자인 팬 카페 운영진, 박순희에게 물어보면 될 테니까.

“잠시만요, 변호사님.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나는 서둘러 SNS를 열어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지….

메시지를 보낸 후, 그녀의 답변만을 기다렸고.

장 변호사는 나머지 자료를 훑고 있었다.

그렇게 10분여쯤 지났을까.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아, 박순희에게 답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메시지를 읽자마자 내게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그 사진은 메일을 캡처한 사진이었고.

사진을 클릭하자, 내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번져왔다.

회사에서 그녀의 제보에 대한 답변이었고.

‘…제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사 내부에서는 소속 연예인의 보호를 위해 늘 힘쓰고 있습니다. 제보해주신 내용을 토대로 검토 후,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짤막한 내용의 답변이었고.

이 답변 메일은 내게 두 가지 마음을 공존하게 만들었다.

우선 증거를 찾았다는 기쁨에 대한 환호.

그리고 드는 씁쓸한 기분.

쉽게 마음 한편에서 지워낼 수는 없었다.

소속 회사에서도 이 위험함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그런데도 별다른, 아니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씁쓸함과 동시에 분노가 느껴졌다.

서둘러 그 자료를 장 변호사에게 내밀었고.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됐네요. 이건 100% 승소 가능합니다.”

그의 말에 조금 전 느꼈던 분노나 안타까움이 금세 사라졌다.

“100%입니까?”

“네, 회사 측에서 충분히 내용을 인지했다는 거니까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고.

장 변호사는 눈에 불을 켜고 말을 이어갔다.

“형식적인 내용이기는 하나, 답장을 보냈다는 건 박순희 님이 보낸 메일 내용에 대해 확인을 했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예.”

“그런데도 아무런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다는 건, 소속 연예인을 보호하지 않았다는 거고. 즉, 계약 사항 위반이기에 계약 해지가 가능합니다.”

장 변호사의 말에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HS 엔터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날이 생각보다 머지않을 것 같았다.

***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늘 영화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에 제작 발표회 진행을 맡게 된 김슬희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사회자 김슬희의 인사와 함께 우리는 손뼉을 부딪쳤고.

수십 대의 카메라는 그녀와 자리에 앉은 우리를 비췄다.

“행복하기만 하던 세상에 어느 날 좀비가 나타나게 되고, 그로 인해 어둠이 내려버린 곳. 그곳에 유일하게 남은 생존자들의 숨 막히는 생존기를 담은 영화….”

그녀는 영화에 대해 소개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영화 제작 발표회가 시작되었다.

제작 발표회는 어느덧 삼십여 분의 시간이 흘렀고.

“우리 희성 배우님의 연기가 이번 영화에서 더욱 돋보였다고 들었습니다. 현장에서도 아주 극찬이 쏟아졌다고 하는데요?”

김슬희의 질문에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고.

내가 답하기도 전에 강 감독이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이번에 진희성 배우의 연기는 모든 스태프들로 하여금 매 신마다 감탄을 자아냈어요.”

“그렇다면, 희성 배우님은 좀비로 연기를 하신 건가요?”

김슬희의 물음에 나는 서둘러 마이크를 쥐었다.

“하하, 그건 개봉일, 극장에서 확인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야, 맞네요. 희성 배우님이 좀비로 변하는지, 끝까지 생존자로 남는지 빨리 극장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싶네요.”

그녀는 대본을 넘기며 다시금 나를 바라보았다.

“희성 배우님께 여쭙겠습니다. 매번 영화, 드라마에서 다른 배우분들과의 케미로 유명했는데요. 이번 영화는 어떠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음… 글쎄요. 이번 영화는 모든 배우분과 케미가 나오는 신이 많았던….”

그녀의 질문에 활짝 웃으며 계속해서 답변을 이어나갔다.

이번 영화에서의 내 역할은 주연이 아닌 조연.

하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질문은 내가 조연이라는 것을 잊을 정도로 많았고.

주연과 다를 바 없는 질문 개수와 관심이 쏟아졌다.

제작 발표회의 시간이 끝났고.

우리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보냈다.

“감사합니다. 저희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 많이 사랑해 주세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성황리로 마친 제작 발표회.

배우들과 강 감독까지 웃으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무대 뒤편으로 향하자마자 강 감독이 우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다들 고생했어. 오늘 분위기 보니까, 기사도 잘 나올 것 같고. 아주 예감이 좋은데? 하하.”

“그러게요. 감독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저희 영화 대박 나는 것만 기다리면 되는 겁니까? 하하하.”

우리는 활기찬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았고.

그때.

“어?”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리던 김 실장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몸을 돌려 그에게 향했다.

“형, 무슨 일 있어?”

“하아….”

그는 휴대 전화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고.

나는 서둘러 그의 휴대 전화에 뜬 화면을 바라보았다.

[진희성 소속사와 법적 분쟁, 영화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 개봉 앞두고 이게 무슨 일?]

[소속사 분쟁 진희성, 제작 발표회와 동시에 시작된….]

[진희성, 영화 개봉과 함께 터져버린 소속사와의 갈등.]

[영화 개봉을 코앞에 두고 소속사와 분쟁이 터진 진희성. 앞으로 그의 행보는….]

…젠장.

영화 개봉과 제작 발표회의 기사가 나오고 있는 지금.

소속사와 법적 분쟁이 난 기사가 터졌고.

이건 HS 엔터에서 낸 것이 분명했다.

일부러 내 앞길을 망가뜨리기 위함일 터.

나는 기사 제목을 바라보며 얼굴이 일그러졌고.

이를 꽉 깨문 탓에 안면 근육이 떨려왔다.

HS 엔터… 이 개자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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