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09)화 (109/303)

109화 #21 – 처음과 끝 (3)

이른 아침.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회사가 아닌 집 앞의 조용한 카페로 향했다.

문을 열자, 저 멀리서 나를 한눈에 알아본 사람.

김 실장이었다.

“여기!”

그는 내 이름을 부르지 않은 채 손을 흔들어 자신임을 밝혔고.

나는 검은색 모자를 다시 한번 꾹 눌러쓰고 그에게 향했다.

“형, 일찍 왔네?”

“아니야. 나도 방금 도착했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앞에 앉았고.

김 실장은 조금 전 나온 커피 두 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들이켰고.

먼저 대화의 문을 연 사람은 김 실장이었다.

“그래서 어제 전화로 했던 말이 다 사실이라는 거지?”

김 실장은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전날 밤.

팬 카페 운영진인 박순희와의 SNS 메시지를 통해 알게 된 사실.

그걸 보자마자 김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고.

우선 둘이 만나 이야기를 하기 위해, 회사 출근 전에 미리 만나게 된 것이다.

“어, 나한테 굳이 거짓말할 이유도 없고.”

김 실장에게 말하며 휴대 전화를 열었다.

“이거 봐. 이미 박순희 님이 HS 엔터 쪽으로 보냈던 자료들이래.”

그는 내가 건넨 휴대 전화를 받아들자마자,

곧장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정여진, 거기에 자세한 내용까지 전부 다 있네.”

“그러니까. 게다가 나한테 스토킹하기 전부터 이상한 내용들을 카페에도 이렇게나 많이 올렸더라고.”

“하아….”

김 실장은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누가 봐도 이상한 내용이지 않아?”

내 말에 그는 아무런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나를 연예인으로 좋아한 게 아니라는 게… 이렇게 봐도 보이잖아.”

나는 김 실장에게 분노를 표출하듯 말을 이어갔다.

“내가 어떤 옷을 즐겨 입는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를 묻지 않아.”

“그러네. 희성이 너네 집 공동 현관 비밀번호를 묻지를 않나, 냉장고 색, 집 초인종 색. 이런 거 물어보는 거 자체가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지.”

질문의 내용을 다시금 듣게 되자 가슴속이 뜨거워졌고.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얼음이 가득 담긴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겨우 차가움으로 마음을 진정시킨 뒤.

김 실장을 향해 물었다.

“형은 들은 거 없어?”

내 말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회사에서 내 이야기 말이야. 이거 회사로 전달을 몇 번이나 했다는데, 담당 매니저한테 전달했을 거 아냐.”

김 실장은 내 말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고는 내 눈을 피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급도 한 적이 없단 말이야?”

“응, 그랬으면 내가 너한테 이야기했지. 아니면, 내가 대비라도 했거나….”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의 일이라면, 항상 자신의 일인 것처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던 김 실장이었기에.

이럴 줄 알면서도 내게 모른 체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HS 엔터의 문제라는 건데….

“형, 이거 직무 태만 아니야?”

나는 의자에 기대고 있던 등을 일으켜, 팔짱을 낀 채 김 실장을 향해 말을 이어갔다.

“알면서도 묵인한 거잖아. 충분히 막을 수 있던 일이었고.”

“맞지. 그때부터 정여진 조사를 했으면, 일어날 일이 아니었을 테니까.”

꽉 쥔 내 주먹이 부들거리듯 흔들거렸다.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일.

그 일이 내게 벌어질 동안 가만히 있었던 회사.

누군가는 연예인이라면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당해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한다.

매일 힘든 몸을 이끌고 퇴근해 집으로 향하는 길이 어느샌가부터는 행복함이 아니라 불안함으로 휩싸였고.

누구나 겪지 못하는 일이라는 건.

살면서 굳이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일이라는 건데.

그걸 겪었다는 것은 결코 행운이 아닐 테니까.

가장 화가 나는 포인트는 내가 스토킹을 당해서가 아니었다.

나를 보호해줘야 하는, 지켜주고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어야 하는 회사.

그런 곳에서 나를 방치했다는 점이다.

김 실장을 통해 회사에서 이 일을 내규에서만 묵인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더 이상 가만히 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형. 나, 본부장님 좀 만나게 해줘.”

회사에서 총괄을 책임지고 있는 강 본부장, 그를 만나야 했다.

***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김 실장은 강 본부장에게로 향했고.

나는 잠시 회의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강 본부장은 말 그대로 회사의 본부장 자리에 앉아 있는 인물이다.

즉, 쉬운 상대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지.

지금까지 수많은 연예인, 직원, 기업을 상대했을 것이고.

그런 사람에게 단순히 화가 나 흥분한 채로 다가간다면, 아무런 대화도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말려버리는 건 그가 아닌 내가 될 테니까.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그렇다고 없는 사실을 부풀려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단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

그리고 회사에서 나를 방치해 생긴 일들.

이것들을 조목조목 따지고 싶었다.

이미 발생한 일이었기에, 회사로부터 엄청난 보상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왜 그렇게 행동을 한 것인지.

단순히 제보를 받은 직원의 누락인지, 혹은 내부에서 어떠한 조치라도 취했는지.

이야기를 듣고 사과를 받고 싶었다.

그저 진심 어린 사과, 그뿐이면 될 것 같았다.

내가 받은 상처는 정신적인 피해였다.

겪어도 되지 않을 스토킹을 겪으며,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로 힘들었으니까.

더불어 앞으로 다른 연예인들에게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방안을 견고히 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

우선, 가장 중요한 건.

이 일을 묵인한 회사의 태도가 궁금했다.

나는 휴대 전화를 열어 사진첩을 클릭했다.

예전에 계약서를 미리 찍어뒀고.

계약서의 내용을 한번 훑기 시작했다.

이런 회사에서 불안감을 느끼며 일한다는 게, 사실상 쉽지는 않았기에.

남은 계약 기간을 확인했고.

다시 한번 회사의 제안을 거절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제안을 걸었던 재계약 7년.

터무니없는 긴 기간에 제안을 거절했지.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을 때,

“희성아, 가자!”

김 실장이 회의실 문을 활짝 열며 들어왔다.

나는 서둘러 휴대 전화 화면을 껐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말했다.

“강 본부장님 지금 계신대?”

“응, 이야기해 뒀고, 지금 올라가면 돼.”

“알겠어. 고마워, 형.”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고맙긴. 얼른 가자.”

김 실장은 몸을 돌렸고.

나는 그런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형, 나 혼자 다녀올게.”

내 말에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혼자 간다고?”

“어, 형은 여기 있어도 돼.”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야기, 아니 언쟁이 펼쳐질지도 모르는데 홀로 강 본부장을 만나러 가는 게 달갑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소속 연예인이었고.

김 실장은 HS 엔터의 직원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저 잠깐 계약을 한 사람일 뿐이라는 것이고.

김 실장은 강 본부장의 아랫사람이라는 뜻이지.

그런 강 본부장에게 따지러 올라가는 길에, 김 실장을 데려가고 싶지는 않았다.

김 실장은 자신의 상사에게 화를 내러 가는 거나 다름없을 테고.

그럼 그의 눈 밖에 나게 될 것이 뻔했으니까.

미안한 마음에 그를 붙잡았지만.

“됐어. 같이 가.”

그는 내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아무리 본부장님이어도, 이건 아니야. 아랫사람이지만, 동시에 난 네 매니저잖아.”

이미 내가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차린 모양이다.

김 실장은 내 어깨를 두드렸고.

미소를 지으며 앞장섰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를 따라 본부장실로 향했다.

똑똑.

본부장실의 문에 노크를 하자, 곧장 열리는 문.

김 실장이 미리 이야기를 해둔 덕에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희성 씨. 왔어?”

“네.”

강 본부장은 밝게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어떤 이야기를 할지 들었을 텐데, 너무나도 환하게 나를 반기는 그의 태도.

나는 오히려 그에게 반감이 들었다.

“희성 씨 얼굴 보는 건 오랜만이네. 우선 앉지.”

그는 소파 테이블로 나와 김 실장을 안내했고.

곧장 우리의 앞에는 티백이 담긴 찻잔이 올라왔다.

“이 차가 이번에 선물 받은 비싼 차인데, 향이 아주 좋아.”

강 본부장은 다리를 꼰 채 찻잔을 들었고.

“음… 아, 그나저나 희성 씨. 호주는 어땠어?”

나는 그와 화기애애하게 서론을 주고받을 시간도, 생각도 없었다.

몸을 당겨 강 본부장을 바라보며, 곧바로 입을 열었다.

“강 본부장님.”

단호하고 차가운 내 목소리에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정여진 아시죠?”

그는 내 말에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고.

입술을 내민 채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을 본 나는 미간이 찌푸려졌고.

“이번에 제 집에 침입했던 스토커 말입니다.”

“아… 그 스토커?”

강 본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고.

나는 미리 출력해둔 자료들을 꺼냈다.

탁.

정여진이 스토킹을 시작하기 전, 팬 카페에 올렸던 내용들을 정리해둔 자료.

팬 카페 운영진 박순희가 회사에 제보한 자료들을 그에게 내밀었고.

나는 곧장 고개를 들어 강 본부장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아니, 오히려 태연함에 가까웠다.

“이게 뭐?”

무슨 자료인지 몰라서 묻는 말투가 아니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자료를 바라보는 그의 행동에 오히려 놀란 건 나였으니까.

“이거 정여진이 저한테 스토킹하기 전에 팬 카페에 올렸던 내용들입니다. 누가 봐도 팬의 행동이 아니죠.”

“그래서?”

강 본부장은 내 말에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곤조곤 되물었고.

그런 그의 말에 흥분이 되었지만.

최대한 그 마음을 눌러내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회사로 제보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묵인하셨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내 말에 강 본부장은 다시금 찻잔을 들었고.

뜨거운 차를 호호 불며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리고 꼬았던 다리를 풀며, 내 눈을 바라보았다.

“회사로 들어온 걸 어떻게 다 체크할 수가 있겠어?”

“네?”

뻔뻔한 태도에 얼굴이 일그러졌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차를 마시며 내게 말했다.

“회사에 들어오는 연예인 제보, 이야기들이 뭐 한두 개인 줄 알아?”

강 본부장은 눈썹을 치켜세운 채 내게 말을 이어갔다.

“오늘 오전만 해도 수십, 아니 수백수천 개야. 그걸 내가 직접 다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의 말에 나는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흥분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다짐하고 왔건만.

오히려 당당한 그의 태도에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리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답했다.

“만약에 제가 거기서 해코지라도 당했다면요?”

내 말에 강 본부장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안 당했잖아.”

“뭐라고요?”

“그리고 걔도 그냥 희성이 너랑 대화하고 싶어서 간 거라며.”

그의 말에 나는 헛웃음이 터져 나왔고.

강 본부장은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냥 집에 들어간 거지. 너한테는 아무런 일도 없었잖아.”

…X발.

저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너무나도 뻔뻔하고 어이없는 그의 태도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 옆에 있던 김 실장이 입을 열었고.

“본부….”

나는 서둘러 그의 다리를 잡아 말을 끊어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그에게 물었다.

“본부장님, 혹시 제가 전속 계약 연장을 안 해서 지금 이러시는 겁니까?”

내 말에 그는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렸다.

“에헤이, 무슨 말을 또 그렇게 해.”

“맞잖아요. 이렇게 소속 연예인을 방치하고, 뭐. 당하지 않았으니까 별일 아니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희성 씨?”

나는 뻔뻔한 강 본부장의 태도에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그리고 몸을 숙여 그의 눈을 뚫어지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안 되겠습니다. 계약 해지 하시죠.”

“뭐?”

내 말에 그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나를 빤히 보았고.

본부장실에 온 이후로 처음 짓는 당황한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소속 연예인을 방치하시는 거라면, 계약 해지 하자고요.”

“무슨 말 같지도 않는 소리야!”

그의 높아진 언성이 본부장실에 울려 퍼졌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그에게 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계약서 제12조의 조항에 따라, 본 계약 기간 중 각각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하여, 손해가 발생하는 경우 본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나는 계약서의 내용을 그에게 읊었고.

강 본부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회사에서는 책임과 의무를 다 했어!”

“계약서 제12조 2항.”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말을 이었다.

“그로 인해, 상호 신뢰 관계가 파탄됐을 시….”

“진희성, 너 말 다 했어?”

강 본부장은 내 말을 끊으며 소리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저, HS 엔터에서 일 그만하겠습니다. 계약 해지해 주십시오.”

“너….”

강 본부장의 안면 근육이 파르르 떨려왔고.

나는 눈을 한번 감았다 뜨며 그에게 말했다.

“여기서 끝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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