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08)화 (108/303)

108화 #21 – 처음과 끝 (2)

“뭐?”

김 실장의 말에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내 표정을 본 김 실장은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물건이 사라진 것도 없고, 그렇다고 협박 같은 것도 없었으니까.”

“그래도….”

답답한 마음에 입을 열었지만.

김 실장의 말이 모두 맞긴 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만난 스토커.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물론 스토커는 그 전부터 나를 쫓아다녔을 테지만.

내가 알아차린 건, 그날이 전부다.

내 보금자리에 몰래 침입해 집을 엉망으로 만든 스토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충격과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대로 그녀는 경찰서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문제를 법대로 하자고 소리쳤지만.

김 실장의 말대로 법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말처럼 강도질이나 협박 같은 건 전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을 터.

“그래도 형, 그 스토커가 내 집에 들어온 건 맞잖아. 이렇게 법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그에게 물었고.

김 실장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답했다.

“집 들어왔던 거… 주거 침입밖에 걸 게 없다더라.”

“하아… 꼴랑 주거 침입?”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고.

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답답했는지 탄식을 내뱉었다.

“법이 진짜 뭣 같네.”

김 실장이 긴 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회사에서 다 알아봤는데, 희성이 너한테 직접적으로 몸에 피해가 간 게 없어서 그렇다더라고.”

“참… 법대로 벌을 주기 힘들다.”

이제 와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형, 그럼 그거라도 해야지.”

“응, 주거 침입으로 신고 걸고, 진행되는 대로 알려줄게.”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법적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치.

주거 침입이라는 범죄 항목을 건 뒤로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 결과, 그녀에게 내려진 법적인 벌.

그 궁금함이 고조될 때쯤.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고.

양손에 커피를 든 김 실장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다.

“형, 왔어?”

“어, 희성아. 커피 마시면서 연습해.”

“고마워.”

그가 건넨 커피를 받으며 입꼬리를 올렸고.

그는 곧장 내 앞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김 실장의 눈빛에 대본을 보던 시선을 그에게로 옮겼다.

“형, 무슨 할 이야기 있어?”

내 말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의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그다지 기쁜 소식은 아니라는 것을.

“희성아, 그때 그 스토커 말이야.”

스토커라는 말에 나는 들고 있던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채.

의자를 당겨 눈을 깜빡이며 그에게 물었다.

“응, 어떻게 됐어?”

그는 코끝을 찡그리며 말했다.

“벌금형 나왔다더라.”

“아….”

법에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예상과 다르지 않은 결과에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결국.

벌금형 약식 기소로 그치게 되었고.

이에 씁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뭐… 예상했던 대로 나왔네.”

“응, 그래도 스토커라, 접근 금지 명령은 내렸다고 하더라고.”

김 실장의 말에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하, 접근 금지… 그나마 다행이네.”

스토커에게 접근 금지 명령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지만 말이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내려진 벌.

그것을 들으면 통쾌하거나 마음에 꽉 막혔던 스트레스가 한 방에 해소될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고작 ‘그나마 다행’이라는 말뿐이었다.

스토커로 인해 보금자리에 들어가는 것이 불안해졌고.

평생 트라우마로 가져갈 수도 있는 이 큰일.

하지만 그런 가해자에게 내려진 것은 고작 벌금과 접근 금지뿐이라니.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이런 범죄자에게는 약소한 벌이 아닌.

누가 보아도 호탕하게 시원한 벌을 받았던 거로 기억한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일 뿐.

현실엔 사이다 같은 결과가 없다는 사실에,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아….”

연신 나오는 한숨을 쏟아냈고.

김 실장도 나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지이잉.

그때 테이블 위에 울리는 진동 소리.

[발신인: 어머니]

“흠흠.”

발신인을 확인 후, 목을 가다듬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내 스토커에 대한 기사로 부모님의 걱정이 말이 아니었으니까.

이런 가라앉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가는 어머니의 걱정이 배가될 터.

“여보세요.”

-어, 희성아. 통화 가능해?

“응, 그럼.”

-요즘은 별일 없지?

어머니의 목소리에서는 불안함이 뚝뚝 묻어나왔다.

“없지. 그때 그 스토커도 접근 금지 명령이 내려졌대.”

-어휴, 다행이다.

“응, 엄마 아빠, 너무 걱정 마요.”

-그래도,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세상에 별 희한한 사람들도 다 있지.

“그러게 말이야.”

어머니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망설이듯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희성아.

“뭔데?”

-엄마가 서울에 좀 올라가서 있을까?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걱정을 넘어선 불안감이 가득했다.

내 기사를 읽고 곧장 전화해 눈물을 흘리던 어머니였으니까.

재차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기에.

생업을 뒤로한 채, 아들을 위해 서울로 오시려는 어머니의 마음.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답했다.

“아니야. 엄마 일은 어쩌고.”

-이게 뭐 대수니. 엄마가 너무 걱정이 되니까….

“괜찮아, 엄마. 이제 다 끝났잖아.”

-그래도 집이라는 게, 도둑만 들어도 들어가기 싫은 공간인 법이거든. 근데 하물며 스토커가 들어갔던 공간이라, 너 힘들까 봐 그러지.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집.

모든 근심 걱정을 밖에 털어둔 채 들어가야 하는 나만의 공간.

그날 이후로는 그곳에 가는 발걸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그 순간의 장면들이 떠올라, 어떤 날은 집에 들어가기조차 싫은 적도 있으니까.

이대로는 도저히 살 수 없겠다는 생각 끝에, 이사를 결심했다.

서울에서 힘든 시절부터 살았던 저렴한 월셋집.

배우로 돈을 벌면서도 이사에 대한 생각은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내게 큰 집으로 간다는 것에 대한 로망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로망이 아닌, 내 삶을 위해 결국 터전을 바꿔야 할 때가 다가온 것이다.

한강이 보이는, 뷰가 좋은 집.

뛰어놀 만큼 커다란 평수의 집.

이런 집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지금 사는 집보다는 좋은 집.

그리고 좋은 집이라는 것은, 보안이 철저한 곳을 의미했다.

내 공간에 또다시 침입자는 없어야 했으니까.

나는 턱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에 놓인 달력의 날짜를 바라보았다.

이번 출연료가 들어오는 날이 언제더라?

***

상황이 모두 정리된 뒤.

가족만큼 나를 걱정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소식을 알리기 위해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고 곧장 인터넷 창을 클릭해 사이트에 접속했다.

‘진희성수기.’

팬 카페에 들어오니, 글은 온통 내 스토커에 관련된 이야기로 가득했다.

하나같이 내 걱정뿐인 게시물들.

서둘러 글쓰기 버튼을 눌렀고.

어깨를 들썩이며 타자기에 손을 올렸다.

[진희성입니다.]

-안녕하세요.

진희성수기 여러분, 저 진희성입니다.

많이 걱정하셨죠?

팬 여러분이 걱정해주신 덕분에, 일이 잘 마무리되었어요.

그래서 소식을 알려 드리고자 글을 씁니다.

.

.

.

염려 끼쳐서 죄송하고, 앞으로는 더 좋은 모습으로 찾아뵐게요.

진희성수기 여러분.

늘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내용을 상세히 기재한 뒤, 팬 카페에 글을 올렸고.

글이 올라가자마자 순식간에 조회 수가 오르기 시작했다.

“와아! 다들 내 글을 기다리셨나 보네?”

쭉쭉 올라가는 조회 수에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쉴 새 없이 올라오는 댓글들.

-오빠,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사생팬은 팬 아닌 거 아시죠? 오빠, 힘내세요.

-우리 희성 오빠, 힘들어서 살 더 빠진 것 같던데. 항상 잘 챙겨 드세요!

-진희성수기는 항상 오빨 응원해요. 근황 알려줘서 고마워요.

-와아, 오빠 글 실시간으로 읽은 거 실화? 오빠ㅠㅠ 사랑해요!

-이사부터 꼭 하세요!!

-힘들지 마요ㅠㅠ

아무런 대가 없이 나를 사랑하고, 위해주는 팬들.

팬들의 댓글을 빠짐없이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고.

그들의 말에 힘들었던 마음이 치유되는 듯했다.

위로를 받으며 가슴이 따뜻해지던 그 순간.

딩동.

화면에 울리는 알림.

팬 카페에서 온 알람이었다.

그 알람을 클릭했고,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진희성수기 팬 카페의 운영진.

내가 배우 활동을 시작하고 가장 처음 팬 페이지를 만들었던 사람이 지금 팬 카페의 운영진이었다.

박순희. 팬 사인회에도 항상 참석하였기에.

그녀를 모를 수가 없었지.

하지만 그런 그녀가 내게 쪽지를 보내거나, 따로 연락을 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그녀의 연락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쪽지를 클릭했다.

-안녕하세요.

저 진희성수기 운영진 박순희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스토커 관련 일에 대해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사적인 이야기는 아니고, 꼭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SNS에 메시지를 보냈는데, 확인 부탁드릴게요.

쪽지를 읽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이야기이길래….

서둘러 휴대 전화를 열었고.

SNS에 접속했다.

SNS를 만든 이후, 단 한 번도 SNS의 메시지를 읽은 적이 없었다.

물론 나를 좋아해 메시지를 보내준 팬들에게는 고마웠지만.

순수하게 팬심으로만 메시지를 보낸 사람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팬인데 힘들어서 그러니 돈을 빌려달라는 둥.

자신과 한번 만날 수 있냐는 둥.

별의별 사람이 존재했고.

하나하나 대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애초에 메시지를 전부 읽지 않았다.

그런데 운영진 박순희에게서 온 쪽지를 읽자, 메시지를 꼭 확인해야 할 것만 같았고.

나는 쌓여 있는 메시지 틈에서 그녀의 아이디를 찾기 위해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한참 뒤 찾은 그녀의 메시지.

괜스레 긴장되는 마음에 나는 마른침을 삼켰고.

서둘러 그 메시지를 읽어 내려갔다.

-안녕하세요.

오빠에게 긴히 알려드릴 말이 있어 이렇게 연락드립니다.

실은….

.

.

.

그래서 제가 HS 엔터 쪽으로 정여진에 대한 내용을 전부 보냈어요.

분명 그때부터 낌새가 조금 이상했거든요.

미리 대처하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건데.

결국, 이렇게 정여진이 스토킹을 한 게 너무 화가 나고 속상하더라고요.

오빠가 정여진에 대해 이미 알고 계셨다면 어쩔 수 없지만.

혹시나 회사 측에서 전달이 안 된 건가 싶어, 걱정스러운 마음에 연락드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당시 HS 엔터에 전달했던 내용들은 사진으로 보내 드릴게요.

한번 확인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항상 응원하고 있는 팬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오빠 힘내세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은 채.

그녀에게서 온 메시지를 모두 읽어 내려갔고.

메시지를 읽으며 내 숨은 점점 더 가빠졌다.

“이게 대체….”

금세 내 얼굴은 타오를 듯 붉어졌고.

흥분된 마음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X발… 그럼 소속사에서는 대체 뭘 하는 거야?”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막을 수 있었던 일이잖아!”

그대로 휴대 전화를 들어 김 실장에게로 전화를 걸었고.

울리는 신호음.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읊조렸다.

“설마… 소속사에서 알고도 묵인한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