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20 – 낯선 곳에서 (9)
팟-!
“하아, 하아….”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꿈에서 보았던 그 뜨거운 불길이 느껴지는 듯했고.
높이 타오르던 불을 헤집으며 달렸던 그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나도 생생한 꿈.
내 몸과 침대 시트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얼굴에서 흐르는 땀방울을 손으로 닦아내며 주변에 있던 물을 찾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직도 내 옆에서는 불길이 타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니 옆에는 잠을 자고 있는 김 실장,
그리고 여전히 고요하고 어두운 호텔이었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대로 다가가 몸을 기댔다.
이미 완전히 깨어버린 잠.
다시 눈을 감고 싶지는 않았다.
이렇게 깨버린 이상, 호주의 마지막 날 아침은 이대로 맞이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 생각은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늘 그랬듯 모든 장면이 생생했고, 촉감과 시각, 그리고 후각까지도 선명했으니까.
꿈에서 깨기 전 보았던 유리에 비친 내 모습.
네이비 색의 정장 바지에 흰 셔츠.
거기에 체크무늬 넥타이….
그리고 내 품속의 어린 여자아이.
그 아이의 손에 쥐어진 반짝이는 목걸이.
여자아이의 이름이….
유나였는데… 유나?
나는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소리쳤다.
“송유나…!”
몇 시간 전 회식에서 송유나가 이야기를 했다.
어릴 적 겪었던 묘한 일.
자신을 구해줬던 아저씨의 착장.
분명 꿈에서 보았던 내 모습과 일치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불이 났던 건물에서 결국, 어머니와의 마지막 인사를 했다.
송유나를 구했던 그 ‘아저씨’.
…그게 나였다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부여잡았다.
그리고 뇌리를 스치는 기억들.
그 장면들은 퍼즐처럼 조각이 맞춰져 갔고.
꿈에서 보지 못했던 장면들까지 모조리 퍼즐이 완성되었다.
그렇게 불구덩이에서 송유나를 안고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당시 그녀의 어머니도 구하고 싶었지만, 무너진 벽에 깔린 그녀의 다리.
그 커다란 벽을 홀로 들어 올릴 수가 없었고.
그녀를 두고 송유나만을 안고 나왔던 거지.
그 덕에 송유나는 곧장 응급차에 실려 목숨을 건졌고.
소방관들은 송유나의 어머니를 구하러 들어갔지만.
더욱 커져버린 불길.
화마가 덮쳐와 끝내 그녀를 구출하지 못했다.
당시가 너무나도 생생하게 떠올랐고.
눈앞에 펼쳐진 그때의 장면들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당신의 딸만이라도 살리기 위해, 내게 간절히 부탁하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고.
내 목은 점점 메어왔다.
그리고 동시에 떠오르는 송유나의 얼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그녀의 슬픔은 내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그 감정만큼은 알 것 같았다.
더불어 그녀의 목에서 항상 빠지지 않던 그 목걸이.
어머니의 유품이라던 목걸이는 그 당시 송유나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것이었고.
지난번 사막에서 바람에 의해 목걸이를 떨어트렸을 때.
내가 목걸이를 찾아줬고, 처음으로 내게 고마움을 표현했던 그녀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
그녀에게 그 목걸이는 목숨만큼이나 소중할 테니까.
***
날이 밝았고, 우리는 곧장 공항에 도착했다.
호주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을 추억으로 간직한 채, 뒤를 돌아 마지막으로 호주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촬영을 하며 힘든 일도 많았지만.
그걸 극복하며 촬영했던 일, 좋았던 일들이 더 많았으니까.
나는 미소를 지으며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좌석 역시 퍼스트 클래스였고.
어느새 호주를 떠나는 아쉬움도 잊은 채, 두리번거리며 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내 앞에는 웰컴 샴페인이 놓였다.
“이야, 이거 맛있었는데.”
곧장 몸을 기댄 채 샴페인 한 모금을 들이켰다.
편안한 좌석.
앞에 있는 브랜드 어메니티와 담요, 잠옷.
입꼬리를 올리며 그것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두 달 전 한국에서 올 때도 신기했지만.
또다시 탑승해도 퍼스트 클래스는 내게 신세계였다.
“흠흠.”
그때 나를 부르는 듯한 헛기침에 들고 있던 담요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나는 곳은 다름 아닌 바로 옆자리.
“이제 비행기 처음 타는 거 아니지 않나?”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내게 말하는 사람은 송유나였다.
“어?”
나는 그녀를 바라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답했다.
“우리 한국 갈 때도 옆자리네요?”
내 말에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앞에 놓인 샴페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제 술 많이 마셨는데, 괜찮아요?”
회식 자리에서 눈이 살짝 풀렸던 그녀이기에, 걱정스러운 마음에 물었고.
그녀는 나를 흘긋 보며 무뚝뚝한 말투로 답했다.
“네.”
송유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앞으로 고개를 돌린 그녀는 샴페인을 쓰윽 밀며 읊조렸다.
“근데 이건 못 마시겠네요.”
송유나의 말에 나는 실소를 터트렸다.
“유나 씨.”
내 부름에 그녀는 살짝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고.
“두 달 넘게 사막에서 촬영하느라, 고생 많았어요.”
호주를 떠나기 위해 이륙하는 비행기 안.
그녀에게 진심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그녀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내가 아닌 허공을 바라보고 답했다.
“…네, 뭐.”
송유나는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몸을 기대었고.
나는 꿈속에서 보았던 그녀의 어릴 적 모습이 자꾸만 겹쳐 보였다.
엄마를 두고 나오며 울던 송유나의 얼굴.
끝내 엄마를 다시 보지 못한 그녀.
더불어 내가 그녀의 어머니까지 구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미안함과 슬픔이 공존했다.
하지만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서둘러 송유나를 데리고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회식 자리에서 한동민이 그녀에게 물었었다.
그때 구해주었던 아저씨를 찾았느냐고.
송유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만난다면 구해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던 그녀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하지만 그녀를 구했던 그 아저씨가 나라고 말할 수는 없지.
당연했다.
내가 긴 세월을 살아왔음을 알 리가 없을 테니까.
나는 송유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린 나이에 힘든 일을 겪고도 이렇게 잘 성장했다는 게.
너무나 대견했고, 슬픔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잘 자란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뭐야, 왜 웃어요?”
송유나는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나를 보곤 미간을 찌푸렸고.
나는 서둘러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뭘 그렇게 슬픈 얼굴로 웃고 있대.”
급히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맞다, 유나 씨. 광고 있잖아요.”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광고요?”
“아, 유나 씨는 찍은 광고가 여러 개였죠?”
송유나는 내 말에 눈길을 돌렸고.
“같이 찍었던 파워발란스요. 그거 광고 나가고 매출이 상승했대요.”
나는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고.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모델인데, 당연히 매출이 올랐겠죠.”
“아….”
“뭘 새삼스레.”
농담 한 방울도 없는 진심이 담긴 그녀의 목소리.
그 당당함에 나는 절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네요.”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대답하자, 송유나는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습관인 듯 목걸이 원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레 눈길이 그녀의 목걸이로 향했고.
옅게 입꼬리를 올리며 송유나에게 말했다.
“그 목걸이… 유나 씨한테 잘 어울리네요.”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며 연신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마른침을 크게 삼킨 뒤.
목걸이를 손으로 움켜쥔 채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더니 또 나를 흘긋 바라본 뒤, 그녀와 내 사이에 있는 벽을 올렸다.
그렇게 벽이 쳐졌지만.
한국에서 호주에 올 때와는 달리.
이번 비행에서는 그녀와 조금 더 친근해진 느낌이 들었다.
나는 사이에 쳐진 벽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
“다들 조심히 들어가세요!”
“조만간 얼굴 봐요.”
공항 앞에서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누었고.
차례로 공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가장 먼저 자리를 비운 배우는 송유나였다.
“희성 씨, 다음에 치맥하기로 한 거 잊지 않았죠?”
한시아가 빙그레 웃으며 내게 말했고.
그녀의 말에 김승희, 서혜나, 한동민까지 나를 바라보았다.
“하하, 그럼요. 저희끼리 조만간 또 뭉치죠.”
그들에게 대답한 뒤, 김 실장에게로 향했다.
탁.
차에 올라타자 곧바로 차 문이 닫혔고.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창문을 열었다.
“와아! 한국 공기 진짜 오랜만이다.”
힘껏 숨을 들이마시며 하늘을 바라보자, 김 실장이 나를 향해 말했다.
“오늘 미세 먼지 나쁨이래.”
그의 말에 나는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형, 그래도 한국 공기 맡으니까, 좋다.”
“그건 그래.”
김 실장은 깜빡이를 넣은 뒤, 내게 말했다.
“집으로 갈 거지?”
“응, 그래야지. 가서 좀 씻고 쉬어야겠어.”
“그래, 호텔에서도 보니까 너 일찍 일어난 것 같더라.”
꿈 때문에 일찍 일어난 걸 김 실장이 본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이 찢어질 듯 하품을 내뱉었다.
“비행기에서 푹 쉬었던 것 같은데, 피곤하네.”
“아무리 편하게 비행해도 내 집에서 쉬는 것만큼은 아니니까.”
김 실장의 말에 나는 몸을 일으켰다.
“형도 피곤하겠다.”
“괜찮아. 나도 바로 집에 가서 쉬면 되니까.”
김 실장은 룸 미러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희성아, 피곤할 텐데. 눈 좀 붙여.”
“아니야. 지금 자면 집 가서 못 잘까 봐. 지금 형이랑 이야기하고, 집에서 푹 쉴래.”
내 말에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나야 좋지.”
그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아, 오늘 자고 일어나서, 내일 아침에는 바로 김치찌개부터 먹어야지.”
“와아- 김치찌개. 생각만 해도 침 고인다.”
김 실장은 입맛을 다시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점심으로는 된장찌개도 먹어야 하고, 저녁에는….”
나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리쳤다.
“삼겹살이지!”
“크으! 삼겹살. 굽는 소리 상상만 해도 눈 돌아간다.”
“형, 우리 내일 만나서 하루 내내 먹기만 할 것 같은데? 하하.”
김 실장과 나는 그렇게 먹는 이야기로 차 안을 가득 채운 채.
집을 향해 달렸다.
그렇게 한참 대화를 나누던 끝에 도착한 집.
“희성아, 짐 많은데 앞까지 같이 들어줄게.”
김 실장이 내 캐리어를 바라보며 말했고.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를 떠밀었다.
“아니야. 혼자도 충분해. 형도 피곤할 텐데, 얼른 들어가서 쉬어.”
“그래도 짐이….”
“진짜 괜찮습니다. 형도 얼른 출발해.”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조심히 들어가고.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자.”
“응, 얼른 가.”
김 실장은 내게 손을 흔들었고.
미소로 그에게 답한 뒤,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천근만근 무거운 몸에, 커다란 캐리어를 질질 끌며 공동 현관 입구로 들어갔고.
눈앞에 보이는 집 현관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집이다.”
비록 호텔보다 좁은 집이지만, 그래도 내 집만큼 편한 곳은 없으니까.
나는 뭉친 어깨를 돌리며 문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어?”
살짝 휘어진 듯한 손잡이.
너무 오랜만에 온 집이기에 감촉이 새로운 느낌인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연이어 나오는 하품에 서둘러 문고리를 당겼다.
문을 열자 펼쳐진 광경.
……!
옷가지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서랍의 온갖 문이 열린 채 짐이 쏟아져 있었다.
말 그대로 난장판이 된 집.
순간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지만, 분명 집 안에 누군가가 침입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미친, 이게 대체 뭐야?
너무나 당황스러운 상황에 그대로 제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