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20 – 낯선 곳에서 (7)
“레디, 액션!”
강 감독의 사인에 진희성의 눈빛이 돌변했다.
두려움에 사색이 된 진희성은 사시나무처럼 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오… 오지 마…!”
그는 수많은 좀비를 바라보며 소리쳤고.
진희성의 눈이 희번덕이며 뒤집혔다.
“으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넘어지자 바로 땅을 짚고 일어났다.
그리고 앞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그의 전력 질주에 이성을 잃은 좀비들이 팔이 떨어져라 뒤로 젖혀진 채 그를 따라갔다.
“크으으으아-.”
괴이한 소리를 내며 달리는 좀비들.
그들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진희성은 온 힘을 다해 도망가고 있었다.
휘이이.
거센 모래바람이 진희성과 좀비 떼 앞으로 휘몰아쳤지만.
진희성의 발길은 멈출 수가 없었다.
모래바람에 눈으로 작은 모래 알갱이가 들어갔는지, 그의 눈이 금세 빨개지고 있었고.
그럼에도 진희성은 어떻게든 눈에 힘을 주고 뜬 채.
오로지 앞을 향해 내달렸다.
쿵.
그러다 그의 앞을 가로막은 커다란 벽.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진퇴양난.
그는 앞으로 나아갈 수도, 좀비가 득실거리는 뒤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하아, 하아….”
진희성은 서둘러 고개를 두리번거렸고.
그의 눈에 들어온 긴 나무 막대기.
“무기라고 하기에도 너무 약하잖아.”
하지만 그에게 더 이상의 선택지는 없었다.
“크와아아-!”
그를 향해 달려오는 좀비들.
진희성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수많은 좀비와 앞을 가로막은 벽.
그리고 나무 막대, 그뿐이었다.
다다다다.
점차 가까워지는 발소리.
그 소리에 진희성의 심장은 튀어나올 것처럼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닥의 나무 막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다음 작전을 생각했다.
“몇 놈을 제치고, 빨리 저 귀퉁이로 돌면 돼.”
진희성은 가까워져 오는 좀비를 바라보며, 최면을 걸 듯 소리쳤다.
“…할 수 있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구하러 갈게, 꼭.”
극 중 자신을 좋아하는 한시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가 구하러 갈게. 제발 무사히만 있어줘.”
“쿠아아아…!”
그때 눈앞까지 다가온 좀비 떼.
휘익, 퍽-.
진희성은 나무 막대를 양손으로 터질 듯 쥐어 잡은 채.
그들을 향해 휘두르기 시작했다.
턱-!
진희성이 가격한 막대에 좀비는 넘어졌고.
그는 쉬지 않고 그들을 공격했다.
“죽어, 죽으라고!”
어느새 나무를 쥐고 있던 손바닥에서는 뚝뚝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고통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공포에 질려 한껏 움츠러든 어깨.
그럼에도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광기 어린 눈빛.
좀비에게 무기를 휘두르기 위해 꽉 깨문 입술은 진희성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카메라 밖에서의 강 감독은 어느새 입을 떡 벌린 채 진희성의 연기에 몰입했다.
스태프들 역시 소리가 새어 들어갈세라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은 채 진희성을 바라보았다.
그때.
“다 비켜!”
좀비가 세상을 덮친 이후로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느라 진희성의 몸은 깡말라 있었고.
그 몸으로 수많은 좀비를 모두 밀쳐내고 도망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진희성은 절규하듯 나무를 휘둘렀고.
그 나무에 맞아 쓰러진 좀비는 괴이한 소리를 내며, 오뚝이처럼 곧바로 일어나 그를 공격했다.
더 이상 도망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으아악!”
진희성이 좀비에 의해 바닥에 넘어졌고.
순식간에 그의 몸 위로 좀비가 달려들었다.
“크으으으아!”
진희성의 몸 곳곳에는 좀비의 이빨 자국이 찍히기 시작했고.
그의 양 볼에는 뜨거운 눈물이 사정없이 흘러내렸다.
“나… 살고 싶어….”
진희성의 간절한 몸부림에 몇몇 좀비가 떨어져 나갔지만.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지현아… 사랑….”
그의 눈이 스르르 감겼고.
그 감긴 눈에서는 연이어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갑자기.
진희성을 덮치고 있던 좀비들이 몸을 일으켰고.
팟-!
그때 눈을 뜬 진희성의 눈알은 새빨개져 있었다.
…앞에 선 좀비들의 눈과 같은 색.
“크아아아!”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진희성은 괴상한 소리를 내었고.
활처럼 휘어진 허리.
뼈가 부러진 듯 뒤로 꺾인 팔, 뒤집힌 눈으로 바닥에 몸을 굴렀다.
그의 얼굴에 범벅된 눈물은 어느샌가 차갑게 식어갔다.
한쪽 눈을 찡그린 채 코를 벌름거리며, 고개를 빠르게 두리번거렸고.
그는 원래 그랬다는 듯 좀비들에게로 다가갔다.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 채로….
카메라는 그런 진희성의 얼굴을 당겨, 화면을 꽉 채웠고.
그는 초점을 잃은 채 그 카메라를 향해 입을 벌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쿠와아아아!”
“컷, 오케이!”
강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현장에 울려 퍼졌고.
곧장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연신 손뼉을 부딪쳤다.
“퍼펙트!”
강 감독의 말에 스태프들 역시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야, 고생하셨습니다.”
“우와, 몰입감 장난 아니었어요.”
그들의 감탄에 진희성은 꺾였던 몸을 풀어내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는 몸에 잔뜩 묻은 모래를 털며, 주변 엑스트라들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카메라 뒤에 있던 수많은 스태프와 배우들.
그중에는 송유나가 팔짱을 낀 채 진희성의 연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 감독은 그녀의 옆에서 연신 탄성을 쏟아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야, 진짜 실감 났어. 이거 봐. 내 팔에 소름이 돋았다니까?”
강 감독이 옆에 있던 스태프에게 말하자,
그 역시 자신의 팔도 강 감독에게 보이며 답했다.
“맞아요, 감독님. 저도 온몸에 소름 돋았습니다.”
팔을 쓸어내린 스태프는 곧 현장을 정리하러 뛰어 들어갔고.
강 감독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송유나를 바라보았다.
송유나의 시선 끝에는 진희성이 있었고.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여전히 넋을 놓고 있었다.
“유나 씨.”
강 감독의 부름에 송유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송유나에게 물었다.
“유나 씨가 봐도 잘하지?”
그러자 송유나는 팔짱을 풀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나쁘지는 않은 것 같네요.”
그녀의 도도하고 시크한 말투.
하지만 그 말에 강 감독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답했다.
“오오, 유나 씨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진짜 잘했다는 거 아닌가? 하하.”
이미 송유나를 파악한 강 감독은 그녀의 속뜻을 콕 집었고.
“…몰라요.”
그녀는 그대로 뒤돌아 자신의 매니저에게로 갔다.
강 감독은 자리에 앉아 의자에 등을 기대며 읊조렸다.
“진희성, 저 친구 진짜 물건이네.”
카메라에 담긴 진희성의 얼굴을 바라보는 강 감독의 입가에는 살며시 미소가 번졌다.
***
WG 엔터 대표인 박서원과 마주한 채 앉아 있는 최서빈.
그들의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가 놓여 있었다.
톱 배우인 최서빈이 회사 대표와 독대를 하는 건, 특별한 경우가 아니어도 가능했다.
평소 그들은 단둘이 술잔을 기울일 때도 많았으니까.
“…그래서 걔가 연기를 잘하긴 하더라.”
박서원의 말에 최서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아, 저랑 같이 나온 작품에서요?”
“응, 그것도 그렇고, 다음 드라마에서도 연기 괜찮았더라고.”
박서원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 친구는 지금 작품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맞나?”
그의 질문에 최서빈은 곧장 입을 열었다.
“네, 최근에 영화 들어갔습니다.”
“내가 진희성 배우를 알게 된 이후로 쉬지 않고 줄곧 일만 한 것 같은데.”
“예, 희성이는 휴식기도 아주 짧게 가졌다가 바로 작품 준비하더라고요.”
최서빈의 말에 박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지금 촬영은?”
“거의 끝나갈 겁니다. 며칠 전에 연락했을 때, 해외 로케이션 촬영도 마무리 단계라고 했거든요.”
박서원은 진희성의 이야기에 미간에 힘을 주며 집중했다.
“지금 주연으로 출연하는 건가?”
그의 말에 최서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이번에는 조연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박서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주연까지 올라갔던 친구 아니었나?”
“네, 최근에 드라마 주연으로 출연했습니다.”
최서빈은 옅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걔도 제 과거든요. 작품이 좋으면 하는… 연기에 진심인 배우요.”
그의 말에 박서원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좋네. 그래서 서빈이 너랑 친하다고 했지?”
“예, 친하죠. 성격도 잘 맞고, 애가 싹싹하더라고요.”
“…그래?”
평소 다른 배우의 칭찬을 잘 하지 않는 최서빈이 진희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 박서원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음… 나도 한번 보고 싶은데?”
최서빈은 그 말이 단순히 얼굴을 보자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박서원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표님, 근데 희성이 전속이 몇 년 남아서 바로 데려오기는 힘들 겁니다.”
그의 말에 박서원이 입꼬리를 길게 휘었다.
“모르지. 세상일이라는 게 어찌 계약서대로 흘러가겠어?”
박서원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이며 찻잔을 들었다.
***
촬영장에 휘이 부는 바람.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손을 귀에 가져다 댔다.
갑자기 귀가 간지러워진 탓에 서둘러 귀를 손으로 벅벅 긁었고.
그 모습에 김 실장이 휘둥그레지며 내게 다가왔다.
“희성아, 뭐 해?”
“귀가 간지러워서.”
“왜 뭐 벌레 물렸어?”
그의 걱정스러운 눈빛.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 그냥 갑자기 간지러워서. 근데 별거 아니야.”
내 말에 김 실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누가 널 칭찬하나 보다. 하하.”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가? 하하하.”
우리가 대화를 나누던 도중.
“이동하시겠습니다!”
스태프의 목소리에 우리는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다음 장소로 걸어가다 다른 배우들과 마주쳤고.
한시아가 내게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희성 씨, 어제 연기 대박이었다면서요?”
그녀의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좀비로 변하는 그 연기. 장난 아니었다고 소문이 파다해요.”
한시아의 말에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민망하네요.”
그녀는 아쉽다는 듯 손뼉을 부딪치며 말했다.
“그걸 현장에서 못 본 게 아쉬워요.”
한시아의 칭찬에 내가 미소 짓자, 그녀가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희성 씨는 한국에 가자마자 뭐부터 하고 싶어요?”
“맞네요. 이제 우리 곧 한국 가네요.”
그녀의 말에 나는 허공에 시선을 옮겨 생각에 잠겼다.
한국에 가자마자 하고 싶은 가장 첫 번째 일….
내가 진지하게 눈동자를 굴리자, 한시아는 궁금하다는 듯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이내 내 입꼬리가 올라가며 입을 열었다.
“저는… 집에 가자마자 치킨을 시킬 거예요.”
내 말에 한시아가 싱겁다는 듯 피식 웃었고.
뒤쪽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던 한동민이 달려와 소리쳤다.
“거기에 맥주까지 한잔해야죠!”
그의 말에 나는 손가락을 하늘로 뻗으며 외쳤다.
“맥주… 콜!”
우리의 대화에 함께 걷던 배우들이 웃음을 터트렸고.
나는 고개를 돌려 그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 한국 가면, 다 같이 시원한 맥주에 치킨 먹으러 가는 거 어때요?”
내 말에 그들은 합창하듯 소리쳤다.
“좋아요.”
우리는 그렇게 화기애애한 현장 분위기를 유지하며, 다음 촬영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