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02)화 (102/303)

102화 #20 – 낯선 곳에서 (5)

다음 날.

여전히 모래바람이 가득한 사막에서의 촬영이 시작됐다.

“그래도 오늘은 어제보다 심하지는 않으니까, 빨리 찍읍시다!”

강 감독은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고.

가장 첫 번째 신의 주인공이었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카메라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강 감독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감독님, 저 잠깐 뛰고 시작해도 될까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는 서둘러 말을 이어갔다.

“이번 신이 달리다가 쓰러지는 거라, 실제로 조금 뛰다가 시작하면 더 실감 날 것 같아서요.”

내 말에 강 감독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제스처를 확인 후, 현장 주변을 전력 질주하기 시작했다.

잠시 뒤, 나는 숨을 헐떡이며 강 감독을 향해 눈빛을 보냈고.

“오케이, 그럼 바로 슛 들어갈게요.”

그 사인을 읽은 강 감독이 서둘러 소리쳤다.

“레디, 액션!”

강 감독의 사인에 나는 재빨리 배역에 몰입했다.

강하게 내리쬐는 태양은 모래에 반사되어 눈을 강타했고.

그럼에도 눈을 감을 수는 없었다.

살짝 찌푸려진 얼굴은 조금 더 현장감이 드러났고.

방금까지 실제로 뛰었기에, 숨을 헐떡이며 생동감 넘치게 대사를 내뱉었다.

“하아, 하아…. 이제 더는 갈 수가 없어.”

두 다리는 힘이 잔뜩 풀려버린 것처럼 비틀거렸고.

결국,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여기를 벗어나야 하는데, 어서 빠르게….”

그렇게 땀을 뚝뚝 흘리며 눈을 스르르 감았다.

“컷, 오케이!”

강 감독이 소리쳤고.

나는 그 소리에 곧장 몸을 일으켰다.

뜨거운 모래에 몸을 누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앗, 뜨거.”

몸에 붙은 모래를 털어냈고, 메가폰 너머로 강 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성 씨, 잠깐만 쉬었다가 바로 다음 신 들어갈게요.”

“넵.”

강 감독의 말에 나는 카메라 앞을 지나쳐 나왔고.

그 뒤쪽에는 스태프들과 몇몇 배우들이 서 있었다.

내 연기를 보고 있던 모양이다.

그들과 가볍게 목례를 나눈 뒤.

한 걸음 물러서자, 그 옆에는 송유나가 나와 있었다.

평소의 송유나라면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을 굳이 지켜보지 않았을 텐데.

무슨 일로 나와 있는 거지?

심지어 그녀의 촬영은 한참 뒤에나 시작하는 것으로 알고 있기에.

더욱 의문이 들었다.

그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릴 때쯤.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그녀가 한 걸음, 한 걸음 내게로 다가왔다.

송유나의 눈빛은 어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항상 나를 볼 때면 차갑고, 살기가 느껴지기까지 했는데.

오늘은 왠지 모르게 조금 부드러워진 분위기.

그 모습에 나는 턱을 당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금씩 더 가까워지는 송유나와 나와의 거리.

설마… 나한테 오는 건가?

나를 지나칠 거라 생각한 예상과는 달리.

송유나는 점차 내게로 가까워졌고, 이내 내 눈앞에서 발길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팔을 길게 내밀었다.

나는 곧장 고개를 숙여 시선을 그녀의 손으로 옮겼고.

그녀의 손에는 음료수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이게 뭐예요?”

그녀의 손을 바라보며 묻자, 그녀가 퉁명스러운 투로 답했다.

“뭐긴요, 음료수잖아요.”

“그러니까, 웬 음료수를 저한테 주시는 건가 해서요.”

송유나를 알게 된 이후로 그녀에게 무언가를 받아본 적이 없었던 나는, 그녀가 건넨 음료수에 놀랄 수밖에 없었고.

내 물음에 그녀는 눈동자를 허공으로 돌리며 말을 툭 내뱉었다.

“먹다가 그냥… 맛없는 거, 버리기 아까워서….”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며 말끝을 흐렸고.

나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럼 제가 대신 버려드리면 되죠?”

내 말이 장난이라는 것을 그녀도 알았는지, 곧장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러고는 내가 항상 알고 있던 송유나의 목소리와 눈빛으로 돌아왔다.

“아, 그냥 이거 먹으라고요!”

송유나는 앙칼진 목소리로 손에 들린 음료수를 내 손에 던지듯 쥐어주었다.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그대로 뒤를 돌아 빠르게 사라졌고.

나는 그제야 음료수를 열어 한 모금 들이켰다.

송유나, 알수록 재밌다니까?

한껏 올라간 어깨로 빠르게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

“오늘도 진짜 고생 많았다.”

촬영장에서 나오는 나를 맞이하는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양팔을 뻗어 몸을 풀며 답했다.

“그러게. 오늘 촬영 진짜 많았다. 얼른 들어가서 씻어야겠어.”

“응, 온몸이 모래투성이네.”

김 실장은 내 몸을 손으로 툭툭 털어주었고.

그런 그의 손길에 미소를 지었다.

“형도 고생했어.”

김 실장과 함께 숙소로 걸어가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하늘은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고.

수많은 별이 그 어둠 사이를 빛내고 있었다.

“이야, 별 진짜 많다.”

“우와, 그러니까. 별이 이렇게 많은데, 그동안 못 봤네?”

김 실장이 들었던 고개를 내리며 말했다.

“벌써 호주에 온 지도 한 달이 훌쩍 넘었어. 힘들지는 않아?”

“음… 힘들기는 한데, 그래도 재미있어.”

촬영 생각을 하며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자, 김 실장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천생 배우네.”

“하하, 그런가?”

김 실장이 손뼉을 부딪치며 내게 말했다.

“여기서 계속 밥 먹는 거 힘들었는데, 희성이 네 어머님께서 챙겨주신 고추장 아니었으면 진짜 힘들었을 것 같아.”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외 촬영을 오기 전에 갔던 본가.

그때 어머니가 내 짐 가방에 여러 가지를 챙겨주려 하셨고.

나는 그걸 끝내 뜯어말렸었다.

하지만 언제 넣으셨는지, 짐 깊은 곳에는 어머니가 넣어주신 튜브 고추장이 가득했고.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짐 안쪽으로 밀어 넣어두었다.

하지만 해외 촬영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한국의 맛이 그리워졌고.

어느새 어머니가 몰래 챙겨주신 고추장을 하나씩 꺼내 먹기 시작했다.

아마도 어머니는 해외 촬영의 내 앞날을 내다본 혜안을 가지고 계신 것이었을까?

그 마음에 미소를 지으며 발길을 옮겼다.

“부모님이 생각나네. 한국은 요즘 어떠려나. 한 달이나 있었더니 벌써 여기에 오래 살아온 느낌이야.”

내 말에 김 실장이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서인우 씨 있잖아.”

“인우는 왜? 무슨 일 있어?”

내 말에 김 실장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번에 영화 조연에 들어갔다고 기사 떴더라.”

촬영하며 친해진 서인우의 소식에 마치 내 일처럼 기뻐했다.

“이야, 인우는 항상 단역만 했는데, 드디어 조연을 따냈나 보네. 잘됐다.”

“그러게. 기사 보고, 너한테 말해줘야지 했거든.”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형. 이따가 인우한테 연락이나 해봐야겠다.”

“고맙긴.”

덩달아 궁금해진 다른 한국 배우들 소식에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얼른 들어가서 씻고, 다들 뭐 하고 지내나 찾아봐야겠다.”

“그러자.”

호텔에 들어와 하루 내내 몸에 있던 모래들을 씻어내니, 이제야 살 것 같은 느낌.

홀가분한 몸으로 침대 위에 올라 등을 기대었다.

“어휴, 편하다.”

내 옆 침대에는 나와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 김 실장이 있었고.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친 채 웃음을 터트렸다.

“하도 붙어 있었더니, 쉬는 자세까지 똑같네. 하하.”

“그러게. 맞다, 희성아!”

김 실장이 몸을 일으키며 내게 소리쳤다.

“뭔데?”

“광고 찍었던 거 있잖아.”

“파워발란스?”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당겼다.

“그거 광고 이후에 매출이 늘었대.”

그의 말에 나 역시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진짜?”

김 실장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고.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잘 하면 광고 계약 기간이 연장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당연하지. 유나 씨랑 같이 찍었으니까, 아마 같이 연장되지 않을까 싶은데?”

나는 탄성을 내지르며, 술 대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으, 너무 좋다.”

“이거 이렇게 되면, 다른 광고 쪽에서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어.”

그의 말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광고 계약 연장도 아직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거기에 다른 광고 쪽에서도 눈을 돌려볼 수가 있다는 희망적인 말에, 설레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기에.

서둘러 뜨거운 마음을 차갑게 식혀냈다.

“뭐… 오면 너무 좋지만, 기대는 안 하고 있어야겠다.”

나는 다시금 몸을 침대 프레임에 기대었고.

휴대 전화를 열어 인터넷 창을 클릭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손가락은 연예계 기사로 움직였다.

메인 화면에 뜬 최서빈의 얼굴.

반가운 얼굴에 곧장 기사를 클릭했고, 눈으로 빠르게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최서빈. 톱 배우가 선택한 영화 복귀작… ‘칼날의 끝’으로 돌아온다.]

이미 촬영이 한창인 영화 ‘칼날의 끝’의 주연은 최서빈이었고.

오랜만에 보는 최서빈 얼굴에 흥미롭게 기사를 읽었다.

내 표정을 본 김 실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뭐 보고 있어?”

“서빈 선배님, 영화 촬영 중인 거 기사 떠서 보고 있었어.”

김 실장은 내 말에 쓰읍 소리를 내며 답했다.

“그 영화 ‘칼날의 끝’이지?”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어, 맞아. 형도 아는구나?”

“응, 그거 잘 하면 우리 영화랑 개봉 시기가 겹칠 수도 있다던데….”

그의 말에 절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드라마와는 달리 동 시간 경쟁은 아니지만.

영화 개봉 시기가 같다는 것 역시 관객 수 경쟁이 되어버린다.

“하필… 서빈 선배님이랑 겹치네.”

최서빈은 항상 흥행 보증 수표였고.

그로 인해 우리 영화의 관객 수가 적어질 거란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와의 영화 경쟁이라는 사실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곧장 내 눈은 기사 내용을 이어 훑었고.

김 실장 역시 최서빈의 영화 ‘칼날의 끝’을 검색했는지, 옆에서 입을 열었다.

“이번에 임하준도 복귀했다더라.”

그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걔 프로포폴 중독 논란돼서 자숙했던 애 아니야?”

“맞아. 근데 이번에 영화로 복귀했대. 그 최서빈이랑 같이 찍고 있다는데?”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근데 난 그런 사고 치는 사람들 별로 안 좋아해서….”

김 실장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근데, 작품 속에서 맡는 배역들이 희성이 너랑 이미지가 비슷해서, 아마 자주 마주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래서 말하는 거야. 알아두라고.”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무슨 말인지 알겠어.”

임하준의 기사를 본 뒤, 곧장 페이지를 넘겼고.

그 아래에는 자그맣게 박민준의 사진이 떠 있었다.

“어?”

드라마 역사 왜곡 논란 이후 잠잠해졌던 박민준의 얼굴에 나는 곧장 기사를 클릭했고.

박민준의 복귀 소식이었다.

주연까지 올랐던 그의 복귀작은 케이블 채널의 드라마 조연이었다.

박민준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듯,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었고.

그 기사에 나는 자연스레 입꼬리가 휘어졌다.

***

해외 로케이션은 어느덧 두 달을 채워가고 있었고.

이제는 식사 때, 어머니가 챙겨주신 고추장을 들고 가지 않으면 힘들 지경이었다.

밥이 맛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한국 음식이 그립다 못해 꿈까지 꿀 정도의 시기였다.

“오늘도 이 고추장으로 버틴다.”

김 실장은 내가 준 고추장을 쭈욱 짜서 음식에 올렸고.

나 역시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서 고추장을 꺼냈다.

“이렇게 먹으면 비빔밥이지, 안 그래? 하하.”

김 실장이 입에 한가득 음식을 밀어 넣었고.

꿀꺽.

그때, 앞에 앉은 김 실장이 아닌.

뒤에서 침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그 뒤에는 송유나가 살짝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

“깜짝이야.”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눈을 깜빡였고.

나는 그녀를 향해 물었다.

“이거 먹고 싶은 거예요?”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나나 김 실장이 아닌, 고추장이었으니까.

그러자 송유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답했다.

“아닌데요.”

말과는 달리 그녀의 발길은 떠나지 않았고.

나는 그녀를 향해 재차 물었다.

“…한 입 줄까요?”

그러자 그녀는 곁눈질로 나를 쏘아보았다.

“됐거든요!”

그럼에도 그녀는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바닥에 본드라도 붙여놓은 듯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고.

“…조금 덜어 드릴게요.”

“아, 안 먹는다고요.”

꿀꺽.

내게 소리치는 그녀의 목에서는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고.

나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아냈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튜브 고추장을 하나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냥 이거 먹어요.”

그제야 송유나의 시선은 내 밥에서 자신의 손으로 옮겨갔고.

빠르게 눈동자를 굴리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고마워요.”

그리고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저 성격… 평소에는 진짜 발톱을 드러낸 호랑이인데.

이럴 때는 또 순한 양 같다니까.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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