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20 – 낯선 곳에서 (4)
해외에서 촬영을 시작한 지도 벌써 한 달이 되어가고 있었고.
한국만큼은 아니었지만, 어느덧 호주에서의 생활과 촬영이 편해지고 있었다.
호주에서의 첫 촬영 때는 이곳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너무나도 다른 환경.
낯선 분위기, 몰아치는 모래바람과 몇 번씩 일어나던 돌발 상황까지.
사람은 환경에 적응의 동물이란 말처럼, 역경이 있었지만 금세 이곳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한국의 외딴곳에 있는 펜션처럼, 이 호텔에서 한 달이라는 시간을 보내기가 너무 심심했다.
물론 촬영이 끝난 후에는 다음 촬영 연습을 했지만.
그 외의 시간이라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순 없었으니까.
하루 이틀도 아닌, 4주라는 시간을 각자의 방에서만 갇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초반에는 김 실장과 함께 수다를 떨기도 하고.
촬영에 지쳐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배우들 역시 나와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우리는 결국 마음이 맞는 배우들끼리 저녁마다 간단하게 맥주 한 잔을 부딪치며 시간을 보냈다.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언제 또 이런 배우들과 매일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친목을 다질 수가 있겠는가.
하루의 힘든 촬영을 끝마치고, 연습 후에 만들어진 이 자리가 너무나도 좋았다.
평소에 한국에서도 이렇게 편하게 배우들과 만나 술잔을 기울이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으니까.
오늘도 고된 촬영을 마친 후.
우리는 늘 모이던 멤버들끼리 뭉쳤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시아가 밝게 웃으며 맥주를 하늘 높이 들었다.
챙-.
그녀의 잔에 우리 모두의 맥주가 부딪쳤고.
곧장 그 맥주는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사막의 무더운 날씨.
거기에 목이 쩍쩍 갈라지는 곳에서 촬영을 한 뒤에 마시는 맥주는 가히 신이 주신 선물이라 불릴 정도.
“크으.”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맥주를 내려놓으며 탄성을 내질렀다.
“한국 가면, 이 맥주 맛이 한동안 생각날 것 같아요.”
서혜나의 말에 나는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다들 촬영 때문에 한두 캔씩만 마시니까, 더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그녀는 내 말에 손뼉을 부딪쳤다.
“하하, 그러게요. 그래서 더 간절하게 느껴지나 봐요.”
서혜나의 말이 끝나자 한동민이 부럽다는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저는 촬영 신이 많지 않아서, 선배님들이 이런 성취감을 느끼고 마시는 맥주 맛이 부럽습니다.”
“에이, 동민 씨도 앞으로 더 잘될 거예요.”
“맞아요. 그러면, 쉴 때가 그리워질 때도 있을걸요?”
우리는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술잔을 부딪쳤다.
촬영 후 만나는 배우들은 나를 포함해 총 5명.
주연 배우인 한시아와 서혜나, 김승희를 비롯해.
조연이지만, 단역 배우와 비슷한 비중의 한동민까지.
이렇게 총 5명이다.
김승희는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오늘도 유나 씨는 안 오시려나?”
그녀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들썩였다.
“저도… 모르죠?”
내 말에 김승희가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보니까, 저희 중에 그나마 유나 씨랑 제일 가까운 사람이 희성 씨 같아서요. 아닌가요?”
“음… 승희 씨랑 별반 다를 거 없을 것 같은데요? 하하.”
그녀는 내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유나 씨도 같이 이야기하고 놀면 좋을 텐데. 한 번도 사적인 대화는 못 나눠본 것 같아서요.”
김승희의 말에 한시아가 입을 열었다.
“맞아요. 저는 유나 씨랑 같이 찍는 신이 많은데도, 일 이야기 말고는 딱히 대화를 못 해본 것 같긴 해요.”
그녀들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일하게 이 자리에 있지 않은 주연 배우는 단 한 명.
송유나뿐이었다.
하지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가 애초에 이 자리에 나올 거라고 생각조차 한 적이 없으니까.
송유나는 다른 촬영장에서도 늘 마찬가지였지.
그래도 장기간 해외 촬영이니 무료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예상은 벗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방 밖을 아예 벗어나지 않는 그녀에게 궁금증이 생길 정도다.
우리는 다음 날 있을 긴 촬영에, 벌컥벌컥 마시고 싶은 욕구를 참아내며.
맥주를 조금씩 아껴 먹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짧은 시곗바늘이 한 칸을 넘게 움직여가던 그때.
한시아가 김승희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승희는 요즘 연애 잘 하고 있어?”
민감할 수도 있는 질문이었지만.
이미 한 달 동안 친분이 쌓인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 주제를 던졌다.
그리고 받아들이는 김승희 역시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저… 얼마 전에 헤어졌어요.”
“어머, 정말?”
“네, 이번 영화 준비 시작하면서, 점점 바빠지고… 남자 친구도, 아니지. 그 자식도 이것저것 준비하면서 그렇게 멀어지더라고요.”
그녀의 말에 순식간에 분위기는 숙연해졌기에.
김승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누군지는 묻지 말아주세요. 직업은 배우고… 여기까집니다! 하핫.”
그녀는 곧장 해맑은 얼굴로 맥주를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맥주에 술을 부딪쳤다.
이후 대화는 자연스레 연애 이야기로 흘러갔다.
“그럼 선배님은요?”
그녀의 말에 한시아가 한쪽 입꼬리를 옅게 올렸다.
“나는… 좋은 사람 생기면, 연애하고 싶지.”
한시아는 홀로 맥주를 들이켰고.
한동민이 궁금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근데 다들 연애는 어디서 하시는 거예요?”
그의 말에 시선이 한동민에게로 집중됐고.
한동민은 진지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야 길거리에 돌아다녀도 아무도 모른다지만. 선배님들은 너무 유명해서 모자에 마스크를 껴도 다 알아볼 것 같아서요.”
그의 말에 한시아와 김승희, 서혜나는 실소를 터트렸다.
그러다 김승희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당연하죠. 저 저번에 심야에 모자, 마스크, 목도리까지 풀 세팅하고 갔는데도 알아봐서 도망치듯 나왔잖아요.”
한시아가 그녀의 말에 피식 웃으며 답했다.
“얼굴 알려진 연예인들이 데이트할 곳이 어디 있겠어요. 차나 집밖에 없지.”
“맞아요. 아니면 다른 지인들 더 불러서 노는 수밖에.”
그녀들의 대화에 내가 입을 꾹 닫고 경청하자, 한시아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희성 씨는 여자 친구 없어요?”
한시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없죠.”
“희성 씨 인기 많을 것 같은데?”
그녀의 말에 김승희가 동조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주변에 희성 씨한테 호감 있는 배우들 많이 있는 것 같던데요?”
김승희는 의뭉스럽게 입꼬리를 휘었다.
내게 연애에 시간을 쏟는 건, 아직 사치라고 생각했기에.
연애라는 주제에서 시선이 내게 주목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서둘러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스으으으.
때마침 들려오는 거센 바람 소리.
바람에 창문이 들썩이고 있었고.
그 소리에 모든 배우들이 고개를 돌렸다.
“어머, 바람이 왜 저렇게 많이 불어?”
“그러게요. 내일 아침 일찍부터 촬영 있잖아요.”
그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고.
나 역시 짧은 한숨을 내쉬며 읊조렸다.
“바람이 너무 세서, 내일 촬영이 걱정이네….”
***
휘이이-!
역시나.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거센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고 말았다.
아무래도 오늘 날씨가 심상치 않다.
서둘러 준비를 마친 후, 방을 나섰고.
호텔 문을 열자 밀려들어 오는 모래바람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럼에도 다시 방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많은 촬영이 기다리고 있기에, 눈살을 찌푸리며 촬영장으로 향했다.
오전 촬영이 한창인 현장.
“컷, NG!”
모래바람으로 촬영은 중간중간에 멈추기 시작했다.
바람으로 인해 배우들은 대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혹은 당황해 대사를 잊기도 했다.
나 또한 그런 실수가 나올 것을 대비해 눈을 질끈 감고 대사를 복기하기 시작했다.
환경에 의해 NG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최대한 내 실수로 나는 NG 없이 빨리 촬영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휘이이-.
재차 불어오는 바람에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고.
입으로 중얼거리며 대사를 되짚고 있던 그때.
눈앞에 송유나가 미간을 찌푸린 채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매니저는 잠시 자리를 비웠는지, 송유나 홀로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송유나는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짜증이 잔뜩 난 얼굴이었다.
지금 찍고 있는 신이 끝난 후, 다음은 송유나의 차례였다.
굳은 표정으로 있는 그녀에게 시선이 갔고.
그녀는 자꾸만 넘어오는 머리를 밀어내며 목걸이를 풀고 있었다.
왼손에는 새로운 목걸이가 쥐어져 있었고, 오른손으로는 채워진 목걸이를 힘겹게 푸는 그녀.
기다렸다가 매니저나 스타일리스트한테 해달라고 하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안타까워하고 있던 그때.
갑자기.
휘이이이-!
쾅.
모래 폭풍이 불기 시작했고.
그 바람에 세워져 있던 조명 하나가 힘없이 쓰러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돌발 상황에 배우와 스태프들은 몸을 웅크렸고.
내 시선 끝에 있던 송유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느새 그녀는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풀어 버렸는지.
풀린 목걸이가 바람에 날아갔다.
하지만 그걸 본 사람은 나뿐이었다.
송유나는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그사이 나는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니, 그녀가 놓친 목걸이로 달려갔다.
송유나가 머리를 넘기는 건, 놓친 목걸이를 찾기 위함이었으니까.
다행히도 멀리 날아가기 전에 발견해 목걸이를 주울 수 있었고.
“후후.”
그 목걸이에 다닥다닥 붙은 모래를 입으로 불어 털어냈다.
송유나는 주변 모래를 손으로 휘휘 젓고 있었다.
떨어트린 목걸이를 찾고 있는 모양.
나는 송유나에게 다가가 말했다.
“유나 씨, 이거 찾는 거죠?”
쪼그려 앉아 있던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손에 있던 목걸이를 그녀의 손에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는 동그래진 눈으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녀는 내가 아닌 목걸이만을 바라보다가, 덥석 가져가 살피기 시작했다.
“이거 유나 씨 거 맞죠?”
내 말에 그녀는 여전히 목걸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빼꼼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네, 맞네요.”
그리고 다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휙 고개를 돌렸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고마워요.”
송유나는 그 말을 끝으로 뒤돌아 어디론가 걸어갔다.
대단한 인사를 들으려고 급히 목걸이를 줍기 위해 달린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차갑고 딱딱한 그녀의 표현에 나는 그저 어깨만 으쓱였다.
***
똑똑.
여느 날보다 더 힘들고 고됐던 촬영이 끝난 후.
침대에 누워 있던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네, 누구….”
문을 살짝 열자 송유나의 매니저 최 실장이 서 있었기에.
나는 문을 활짝 열었다.
“어, 최 실장님이 어쩐 일이세요?”
놀란 얼굴로 그에게 묻자, 최 실장이 굳은 얼굴로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내게 말했다.
“아까 유나 목걸이 주워주신 거요.”
그의 말에 눈썹을 치켜세웠고.
최 실장은 주변을 살피며 말을 이어갔다.
“그거 유나 어머니 유품이에요.”
“아, 그래요?”
“네, 유나에게는 행운의 부적 같은 거라서 늘 차고 다니거든요. 근데 오늘 잃어버렸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어요.”
최 실장은 그 상상을 하며 어깨를 높이 올렸다가 내려놓았다.
“저는 상상만 해도… 어휴.”
그러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무튼, 오늘 일은 제가 대신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 왔어요.”
최 실장은 고개를 꾸벅 숙였고.
나는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방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유나도 고맙다고 하는데, 부끄러워서 여기까지 인사하러 못 오겠다고 하더라고요. 오늘 모래를 많이 맞아서 피부도 안 좋고, 목도 아프다고 하고.”
최 실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곤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농담을 던졌다.
“유나 씨는 아무 말도 안 하시고, 그냥 최 실장님만 오신 거 아니에요? 하핫.”
내 농담에도 최 실장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아, 진짜 아니에요.”
그리고 누구보다 진중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정말로 감사하다고 하더라고요.”
최 실장의 말투와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그 말에는 거짓을 하나도 보태지 않았다는 것을.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말했다.
“찾아서 진짜 다행이네요.”
그리고 나는 송유나의 방을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