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100)화 (100/303)

100화 #20 – 낯선 곳에서 (3)

10시간을 넘게 비행한 뒤에야 도착한 호주.

긴 시간이었지만 나는 가뿐한 몸으로 호주 땅을 밟았다.

인생에서의 첫 비행이기도 했고.

물론 제주도와 같은 국내 비행을 제외하면 말이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에도 힘들지 않은 이유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해외에서 촬영할 연기 생각에 설렘을 가득 안은 채, 대본을 보며 시간을 보냈고.

그렇게 대본 연습과 좀비 영화를 모니터링하다 보니 금세 호주에 도착해 있었지.

거기에 퍼스트 클래스 좌석이라는 특수함도 더해졌을 터.

비즈니스, 아니 이코노미조차 경험해보지 못한 내게 몇 단계를 올라가 타본 퍼스트 클래스 좌석은 상상 초월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옆에 서 있는 송유나는 전혀 달랐다.

항상 해외에 나갈 때면 이런 초호화 경험을 많이 누려본 그녀는 찌뿌둥한 몸을 풀고 있었고.

장시간 비행에 너무나도 많이 지쳐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유나 씨,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묻자, 송유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니요.”

그러고는 나를 흘겨보며 곧장 준비되어 있는 차에 올라탔다.

누가 봐도 힘들어 보이는 얼굴인데….

그녀의 뒤를 따라 차로 향했다.

큰 버스 몇 대가 공항 앞에 대기하고 있었고.

배우와 매니저들은 가장 앞 버스에.

그리고 스태프들과 수많은 장비는 바로 뒤 버스 순으로 차례로 탑승했다.

“여기서 호텔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 걸립니다.”

스태프가 버스 가장 앞에서 소리쳤고.

“네!”

그의 말에 나를 포함한 몇몇 배우가 답했다.

그리고 우리를 태운 버스는 공항과 점차 멀어졌다.

하나둘 건물들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바깥은 점점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차가 막히지 않는 고요한 밤.

그럼에도 호텔까지는 꼬박 1시간 30분이 넘게 걸렸고.

주변에는 그 어떤 작은 건물조차 보이지 않았다.

끼익-.

어느새 도착한 호텔.

버스는 줄지어 주차를 하였고.

가장 먼저 도착해 정차한 버스.

우리는 가장 앞에서부터 차례로 내리기 시작했다.

“우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탄성을 내뱉었다.

감탄이라기보다는 놀라움의 표현이었다.

“우리가 묵을 호텔이고, 통째로 빌린 거라 저희 관계자밖에 없을 테니 편하게 계시면 됩니다.”

스태프의 말에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호텔을 바라보았다.

호텔…이라 쓰고, 펜션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이곳.

거의 한국식 펜션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적어도 호텔이라면, 번쩍번쩍한 외관과 높은 층수일 거라 생각했지만.

실상 이 호텔은 2층 건물에 널찍했다.

옆에 있던 한동민이 실망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이게… 호텔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말.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앞에서 짐을 챙기던 한시아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이런 펜션 같은 호텔이 나아요.”

“네?”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한시아가 곧장 답했다.

“근처에 허름한 호텔보다는 이렇게 큰 펜션을 통째로 잡는 게 훨씬 낫다는 거죠.”

“아….”

한시아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녀는 다수 작품의 주연을 맡았고, 해외 촬영 경험도 많다고 했다.

그런 그녀의 말이라면, 충분히 믿음직스럽지.

“게다가 우리가 하루 이틀 머물 것도 아니고, 장기 스케줄이잖아요. 그럼 무엇보다 잠자리가 제일 중요하더라고요.”

“그렇겠네요.”

내가 그녀에게 답하자, 한동민 역시 크게 공감하며 말했다.

“오오, 그럼 여기 펜션, 아니 호텔이 너무 좋은데요? 여기가 최고였네.”

한동민의 천진난만한 말투에 우리는 웃음을 터트리며 각자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방은 배우와 매니저가 한 방을 쓰도록 배정되었기에,

나와 김 실장은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

“형, 생각보다 내부는 깔끔하고 좋은데?”

김 실장 역시 내 말에 방을 살펴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 꽤 괜찮네.”

짐을 모두 풀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졌다.

“하아, 비행기가 좋긴 했는데, 침대에 누우니까 확실히 편하다.”

“하하, 그렇게 비행기가 좋다더니?”

내내 퍼스트 클래스를 찬양하던 나였기에, 김 실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또 타고 싶다, 비행기.”

어느새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로 읊조렸다.

“내일 촬영 기대된다. 너무 재밌을 것 같아.”

시작될 촬영에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

배우들의 컨디션을 위해 긴 휴식을 마친 후.

다음 날 느지막이 촬영이 시작됐다.

사실 나는 휴식보다 빨리 촬영이 하고 싶었다.

해외까지 와서 여행은 못 해도, 방 안에 갇혀 있는 게 더 힘들었으니까.

더군다나 해외 촬영에 대한 설렘과 기대가 잔뜩 있었기에.

여기서도 잠자는 시간 외에는 연습에 매진하며 시간을 보냈다.

한국에서 미리 공지했던 대로, 촬영지는 호주의 한 사막이었다.

한시아와 송유나의 첫 신으로 촬영이 시작됐고.

나는 쉬지 않고, 뒤에서 그녀들의 연기를 바라보았다.

“레디, 액션!”

송유나는 순식간에 몰입해 심각한 얼굴로 한시아를 바라보았다.

“이쪽으로 가는 게 확실해?”

그녀는 자신의 몸만 한 백팩을 멘 채 앞을 향해 걸어갔고.

한시아 역시 커다란 가방과 무기로 쓸 만한 몽둥이를 끌며 앞을 향했다.

“너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무책임하게 던지는 듯한 말투에 송유나는 가방을 집어 던졌다.

“장난해, 지금?”

그리고 한시아의 어깨를 밀쳐내자, 송유나의 힘에 밀린 한시아가 털썩 넘어졌다.

곧장 자신의 몸에 묻은 모래를 털며 일어난 한시아가 송유나를 매섭게 쏘아보며 답했다.

“…장난 같냐?”

한시아는 떨어져버린 가방에서 흘러나온 비상식량을 주워 담으며 읊조렸다.

“살고 싶으면, 해 떨어지기 전에 대피해야 돼.”

송유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시아를 쏘아보았고.

한시아는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죽고 싶으면, 너 혼자 여기서 죽어. 나까지 죽게 만들지 말고.”

그때 거센 모래바람이 불어왔고.

“그래도 네가…!”

대사를 하기 위해 입을 열던 송유나의 얼굴을 향해 모래가 덮쳤다.

“악!”

송유나는 팔로 자신의 얼굴을 막았고.

예상치 못한 모래바람에 곧장 강 감독이 소리쳤다.

“컷!”

사막의 특성상 촬영 중간중간 계속해서 모래바람이 일었고.

그때마다 촬영을 끊어갔다.

그렇게 평소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던 첫 번째 신.

겨우 오케이 사인을 받아냈고.

나는 여전히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촬영을 바라보았다.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은 촬영이었지만.

내게는 모든 게 특별하고 신기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른 후, 드디어 다가온 내 차례.

호주에서 하는 첫 번째 연기였다.

아무 곳에도 대피할 수 없는 황무지.

이곳에서 최대한 좀비를 따돌려 도망가야 하는 신이었다.

첫 번째 촬영부터 엄청난 에너지를 요하는 장면.

혹시나 있을 부상에 대비해 손목과 발목을 차례로 스트레칭했고.

이내 촬영이 시작됐다.

“레디, 액션!”

강 감독의 사인으로 카메라는 내 얼굴을 담기 시작했다.

뜨거운 태양.

계속해서 부는 모래바람.

거기에 피를 뚝뚝 흘리며 재빠르게 달려오는 수많은 좀비.

나는 서둘러 이 상황에 몰입했다.

그리고 부리나케 앞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다다다다-.

“쿠와아아아.”

좀비들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나를 물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고.

나는 중간중간 뒤를 돌아보며 힘껏 내달렸다.

극심한 공포에 휩싸인 눈빛.

헐떡이는 숨소리와 좀비를 따돌리기 위해 대비 공간을 계속해서 찾아야 했다.

퍽.

좀비들은 자신의 속도를 조절하지 못하고 하나둘 넘어졌고.

계산된 넘어짐은 아니었다.

모래로 이루어진 사막 바닥.

푹신한 바닥이다 보니,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계속해서 넘어지고 있었고.

그런 광경은 의도치 않게 현장감을 잘 살려냈다.

얼마나 달렸을까.

눈앞에 보이는 작은 집.

그 문이 빼꼼 열렸고, 살짝 머리를 내미는 사람.

한시아였다.

“빨리 여기로 와요!”

그녀는 나를 향해 손을 뻗어 소리쳤고.

“사… 사람이에요?”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럼, 사람이니까 말을 하죠. 죽기 싫으면, 더 빨리 달려요!”

다다다다.

몇 시간, 아니 며칠일까, 몇 달일까?

한참이나 사람을 보지 못했던 나는 한시아의 목소리를 듣고 주륵 눈물이 흘렀다.

뜨거운 눈물이 얼굴을 적셨고.

그럼에도 발걸음은 멈출 수 없었다.

저 목소리가, 내가 마지막으로 듣는 인간의 소리는 아니어야 했기에.

“컷, NG!”

그때 강 감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나는 달리던 발길을 멈춰 세웠다.

“희성 씨, 연기 좋기는 했는데 거기서….”

자리에서 일어난 강 감독이 내게 다가와 새로운 지시를 보냈다.

나는 헐떡이며 그의 말에 경청했고.

김 실장이 건넨 물을 마시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확실히 공기가 다르고 기후도 달랐기에.

그저 달리기를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그런데 거기에 연기까지 해야 한다.

스크린 너머로 바라보는 관객들이 어느새 동화되어 자신이 유일한 생존자가 된 것처럼.

그 실감 나는 연기를 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이 힘들었다.

숨쉬기도 힘든 이 사막.

여기서 하는 연기 자체가 굉장히 힘든 일이라는 것을 강 감독 또한 알기에.

최대한 차분하고 부드럽게 배우들에게 지시했다.

“힘들죠?”

“아, 아닙니다.”

“원래 해외 촬영이 힘들어요. 한국이랑 환경이 너무 다르잖아.”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최대한 빨리 극복하고 연기해야죠. 그러려고 온 거니까요.”

그러자 강 감독은 입꼬리를 씨익 올렸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좋네. 좋아요, 희성 씨. 다시 한번 더 갑시다. 빨리 찍을게.”

“네, 감독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앵글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자신의 자리에 도착한 강 감독은 조금 전보다 더 힘차게 소리쳤다.

“빨리 찍고 쉽시다. 레디, 액션!”

그의 목소리는 메가폰을 뚫고 나왔고.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만큼 나는 역할에 몰입했다.

높은 온도에 더해지는 모래의 뜨거움.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은 이내 얼굴을 타고 내려왔고.

그 땀을 옷깃으로 닦아내며, 한시아가 있는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살아야 한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르는 이 뜨거운 액체를 바람에 흘려보내며, 앞을 향해 나아갔다.

“나는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하니까….”

다다다다.

한시아가 손을 흔들었고.

그녀에게 거의 다 도착할 때쯤.

“으으으아아아!”

좀비들은 내게 더욱 가까워졌고.

자유분방하게 꺾인 팔과 몸은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괴이했다.

팟!

끝내 한시아의 손과 맞잡았고.

“빨리!”

그녀는 내 손을 끌어당겼다.

결국, 나는 그녀와 붙잡은 손에 이끌려 집 안으로 몸을 내던졌다.

“컷, 오케이!”

끝내 터진 오케이 사인.

강 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신 손뼉을 부딪쳤다.

나는 강 감독의 목소리에 몸을 대자로 뻗어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온 강 감독이 입을 열었다.

“희성 씨, 연기 너무 좋았어요!”

이렇게 하나씩 해외 촬영을 극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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