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20 – 낯선 곳에서 (2)
어느새 얼굴은 피골이 상접해 삐쩍 말라 있었다.
촬영 시작 전, 다이어트를 강행해 체중 감량을 했고.
촬영에 들어간 이후로는 수면 부족과 식사 시간이 제각각이다 보니, 자연스레 살이 더 빠지게 되었다.
힘든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이야, 희성 씨. 오늘 캐릭터 완벽히 소화했는데?”
강 감독으로부터 배역이 대본에서 그대로 튀어나왔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으니까.
“하하, 감사합니다.”
“그럼 방금 한 것처럼 다시 한번 가볼게요.”
강 감독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고.
바로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워버린 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레디, 액션!”
강 감독의 외침에 내 눈빛은 돌변했다.
찢어져가는 허름한 옷.
며칠이나 안 감은지 모를, 떡이 지다 못해 뭉쳐버린 머리까지.
물론 분장이었지만 좀비가 나올 것 같은 세트장에 있으니.
실제로 좀비를 피해 숨어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불안감에 휩싸여 숨을 죽인 채, 배고픔에 허덕였다.
“아… 더 이상은 이렇게 사는 게 의미가 없는 거 같은데.”
고개를 들어 하늘에 묶인 밧줄을 빤히 바라보았다.
인간으로서 이렇게 생명을 유지하기만 하는 게, 무의미하다 느끼며 좋지 않은 생각이 들 때쯤.
쾅-!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서둘러 몸을 숨겼다.
“젠장, 살고 싶지 않았는데, 분명 나는 이렇게 사는 게 의미 없다고 느꼈는데….”
몸을 한껏 웅크린 채 좀비가 되고 싶지 않아 재빨리 숨은 내 자신을 바라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꺼이꺼이 우는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갔고.
그 소리를 좀비가 들을세라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흡, 조용히…. 울더라도 조용히 울어야 해….”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잃은 나는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밖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만큼 좁은 공간을 넋을 놓은 채 바라보았다.
“컷, 오케이!”
강 감독이 메가폰을 내려놓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그러고는 손뼉을 부딪치며 소리쳤다.
“희성 씨 연기 너무 좋았어!”
연기를 하며 흘렸던 눈물을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크으, 방금 신, 내가 의도하는 게 그대로 다 드러났어. 정말 고생했어.”
짧은 대사에 수많은 감정을 녹여내야 하는 장면이었기에.
눈빛과 표정 묘사를 수없이 연습해 연기했고.
그것이 드러났다는 생각에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곧장 그에게 허리를 접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래, 희성 씨도 고생 많았어요.”
강 감독은 하늘 높이 손뼉을 부딪치며 소리쳤다.
“다들 수고했습니다!”
이 신을 끝으로 국내 촬영이 모두 마무리되었다.
이번 영화는 1막과 2막으로 나누어진다.
1막은 방금 찍은 신과 같은 국내 촬영분.
2막은 해외에서 촬영하는 것이었지.
국내 촬영은 성황리에 마무리되었지만, 딱 하나 아쉬운 점이 있었다.
단독으로 좀비 떼에서 생존하는 것이 1막의 주 내용이다 보니, 다른 배우들과 함께 촬영하는 신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다른 배우들과 현장에서 마주치거나 겹치는 일이 별로 없었지.
물론 연기를 하면서 뿌듯하고 재미는 있지만.
아무래도 다른 배우들과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했다.
그래서 더욱 2막, 해외 촬영에 대한 기대가 부풀었다.
인생에서 처음 하는 해외 촬영이기도 했고.
한참 동안 홀로 촬영을 하다 보니, 하루빨리 다른 배우들과의 호흡을 맞출 기대감에 설렜다.
촬영을 마친 후, 차에 올라타자 김 실장이 곧장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희성아, 고생 많았어.”
“아니야. 근데 형, 우리 해외 촬영은 언제 시작이야?”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다이어리를 펼쳤다.
“바로 출발하지는 않고, 짧게 휴식을 가졌다가 출발할 것 같아.”
“얼마나?”
“길지는 않고… 일주일 뒤니까, 오늘부터는 집에서 푹 쉬어.”
김 실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몸을 의자에 푸욱 기대었다.
“그럼 출발할게.”
“응.”
차는 곧장 현장을 떠나기 시작했고.
얼굴에 분장한 검은 칠들을 티슈로 지우며, 김 실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근데 형, 나 이번 주에 쭉 쉬어도 되는 건가?”
김 실장은 룸 미러로 나를 바라보며 답했다.
“그럼. 당장 다음 주에 해외 가는 거니까, 별다른 거 없으면 쉬어도 돼.”
“알겠어.”
나는 창문에 비치는 얼굴을 바라보며 작게 읊조렸다.
“뭐 하면서 쉬지?”
***
인생에서 첫 해외 로케이션.
설렘으로 해외 촬영 일정을 확인했다.
인천 공항에서의 출발부터 적혀진 일정은 빼곡하게 종이를 가득 메웠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쓰읍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막’.
촬영지인 사막.
태어나 단 한 번도 사막을 가본 적이 없었기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가득했다.
“TV에서 보면 사막은 위험하다고 하던데….”
하지만 이내 그 걱정스러운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해외 로케이션이라니… 대박이잖아!”
입가에 미소를 띠며 집을 박차고 나섰다.
짧은 휴식 기간 중 며칠은 그동안 못 잔 잠을 청했고.
제때 하지 못했던 식사를 하며 푹 쉬었기에.
오늘은 떠나기 전에 들르고 싶은 곳에 가기로 했다.
곧장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그렇게 차는 한참을 달렸고.
차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몸을 맡긴 채, 며칠 후 떠날 해외 촬영 생각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만큼 해외 촬영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설렘을 느끼며 달리다 보니, 어느새 차는 목적지에 다다랐다.
그러자 곧 내 차를 발견하고 달려오는 어머니.
“엄마!”
“아들, 왔어?”
한참을 떠나 있어야 했고.
그동안 바쁜 촬영 탓에 찾아뵙지도, 통화를 하지도 못했기에.
부모님을 뵙고 하룻밤을 자기 위해 찾은 본가.
어머니는 밝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오늘도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진 한 상.
“엄마, 이렇게 밥 안 차려놔도 된다니까.”
“에이, 간단하게 차렸어. 얼른 먹어.”
“나 촬영 때문에 식단 조절하고 있는데….”
말과는 달리 이미 눈은 상 위의 음식을 스캔하고 있었고.
재빠른 손은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들었다.
내 반응에 아버지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더니 밥을 먹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빠도 얼른 드세요.”
“응, 많이 먹어라.”
“네.”
몇 분의 시간이 채 흐르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내 밥은 게 눈 감추듯 사라졌고.
어느새 빵빵하게 나온 배를 두드리며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와아! 진짜 배부르다.”
어머니는 내 빈 그릇을 바라보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물었다.
“아들, 평소에 밥도 못 먹고 다니는 거 아니야?”
“하하, 아니야. 요즘 일부러 식사량 조절했는데, 엄마 밥이 맛있어서 완전 흡입해 버렸네.”
어머니는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며 말했다.
“더 먹어. 밥 한 공기만 더 떠줄게.”
그런 어머니를 향해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아니야. 나 진짜 배불러. 쉬었다가 나가서 걸어야겠어.”
더 이상 밥을 먹지 않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아쉬워하는 얼굴로 다시 수저를 들었고.
이내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손뼉을 부딪치며 말했다.
“맞다. 그래서 외국은 다음 주에 간다고?”
“아니, 바로 모레 출국이야.”
“어머, 당장이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서 오늘 엄마, 아빠 보러 왔지.”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짐 가방 쪽으로 걸어갔고.
나 역시 어머니를 따라 움직였다.
“엄마, 짐은 왜?”
“너 해외 간다고 해서 아빠랑 몇 개 챙겨뒀어.”
“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짐 가방 앞에 앉았고.
어머니는 쇼핑백을 꺼내 내 짐 앞에 섰다.
“이거 튜브 고추장이랑 작은 라면이거든?”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머니의 쇼핑백을 밀어냈다.
“아, 엄마. 괜찮아. 이런 거 필요 없어.”
“가져가. 외국 가면 이런 게 꼭 생각난다니까?”
어머니는 몇 년을 이민 가는 아들을 챙기듯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고.
“엄마, 나 짧게 촬영만 다녀오는 거야. 이건 정말 괜찮아. 하하.”
“그래도….”
내 짐에 물건을 넣으려는 어머니의 손을 밀어내며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어머니?”
“어휴. 알겠다, 알겠어.”
어머니는 내 짐에서 손을 떼며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가서 다치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김 실장님한테 말씀드리고.”
“네네, 엄마. 나 곧 서른이야.”
“그래도 엄마 눈에는 네가 항상 애기지.”
***
인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차에서 내리니, 어떻게 알고 온 건지 입구에 기자들이 쫙 깔려 있었고.
그들은 카메라를 들고 내게 포즈를 요구했다.
“희성 씨, 여기 좀 봐주세요.”
“희성 씨, 하트 한 번만 해주세요.”
터지는 플래시에 눈을 감지 않기 위해 부릅뜨고, 정신없이 포즈를 취한 뒤에야 공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해외에 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들떠 있었는데, 수많은 기자들 덕에 한층 더 격양된 마음으로 발길을 옮겼다.
좀비 영화라 출연 인원이 상당했다.
수많은 배우들, 그리고 스태프까지.
무려 전세기로 떠나는 해외 로케이션.
그 규모에 입을 떡 벌린 채 감탄했다.
그리고 내 자리는 일반석도 아니고, 비즈니스 클래스도 아닌.
무려 퍼스트 클래스…!
비행기 안을 두리번거리며 자리를 찾았고.
“이야….”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감탄사.
서둘러 그 감탄을 삼켜내며 자리에 앉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좌석.
거의 작은 방 같은 느낌이었다.
있을 건 다 있는 그런 곳.
의자는 이게 비행기가 맞나 싶을 정도로 커다랬고.
비행을 침대처럼 누워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앞에는 커다란 모니터와 가지런히 놓인 잠옷과 명품 브랜드의 어메니티.
“우와-.”
감탄사를 쏟아내며 하나씩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고.
그때, 승무원이 다가와 웰컴 샴페인을 올려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네, 맛있게 드세요.”
샴페인을 한 모금 들이켠 후.
앞에 놓인 책자를 집어 들었다.
책자는 다름 아닌, 기내식 메뉴였고.
고급 레스토랑에서나 나올 법한 코스 메뉴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이게 비행기에서 먹을 수 있는 메뉴라고?”
벌어진 입을 손으로 막은 채,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입가에 미소가 번져가고 있던 그때.
“흠흠.”
하필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다름 아닌 송유나.
그녀는 목을 가다듬으며 나를 불렀다.
그 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고.
활짝 웃고 있는 내게 그녀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내게 물었다.
“퍼스트 처음 타봐요?”
그녀의 물음에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니요?”
그러자 송유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근데 왜 이렇게 신난 건데요.”
내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듯한 얼굴.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 비행기 자체를 처음 타봐요.”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고.
“…어휴.”
촤르르.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곧장 그녀와 나 사이에 있는 문을 닫았다.
그렇게 우리 사이에 쳐진 벽.
나는 그 벽을 바라보고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고는 곧장 몸을 기대어 앉아, 작게 읊조렸다.
“…진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