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93)화 (93/303)

93화 #19 – 정해진 정답은 없다 (1)

좀비가 나오는 대본을 처음 발견하고는 시간이 흐르는지도 모르게, 마지막 페이지를 향했다.

단순하게 좀비가 나오는 대본을 찾았다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은 것은 아니었다.

숨 막히는 긴장감, 탄탄한 내용.

그저 글을 읽는 것이 아닌, 한 편의 영화를 본 듯했다.

“이거 몰입도가 장난이 아니잖아?”

어느덧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그리고 다시 대본을 뒤집어 표지를 바라보았다.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

[감독: 강준수]

분명 꿈에서 본 좀비와 매우 흡사했다.

대본 표지를 빤히 바라보며 깊게 생각에 잠겼다.

잠깐만.

근데 이상하다.

지금까지는 항상 대본을 보고 난 뒤에 꿈을 꾸고는 했다.

그래서 꿈을 꾸고 나면 그 대본을 다시 찾아보고는 했지.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먼저 꿈을 꾼 뒤, 바로 다음 날도 아니고 이렇게 한참 뒤에야 대본을 찾다니.

홀로 세워보았던 규칙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럼에도 이상하리만큼 이 작품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이번에만 뭔가 다른 건가?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리고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워봤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명확하게 떨어지는 좋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테이블에 올려진 다른 대본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래, 다른 좀비물이 또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꿈에서 봤던 깊은 산속 장면이 다른 작품에 있을 수도 있어.”

하나, 둘….

“이건 아니고.”

아직 보지 않은 대본보다, 읽으면서 내 기준에 부합하지 않은 대본들이 쌓여만 갔고.

“이건 대본에 몰입도가 없네.”

어느새 높이 탑을 쌓아올리고 있던 대본이 동이 났다.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고 대본만을 본 탓에,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니.

두둑.

몸에서는 뼈가 우둑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몸을 일으켜 스트레칭을 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밖에는 깊은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고.

재차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날 꾸었던 그 꿈.

너무나도 어둡고 깊은 산속에서 홀로 차 안에 있던 순간.

치직거리며 세상과의 소통이 끊길세라 조마조마했던 라디오 소리.

그리고 내 눈앞으로 달려드는 수많은 좀비 떼.

좀비들의 입에서는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괴이한 소리를 내며 입을 벌리던 좀비들이 눈앞에 선명히 보이는 듯했다.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무언가에 홀린 듯 다시 한번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 작품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강준수 감독의 이 작품은 드라마가 아닌 영화였고.

지난번 흥행 실패로 끝난 내 첫 번째 영화가 떠올랐다.

그럼에도 영화를 또 들어가도 되는 걸까?

아직 내게는 징크스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징크스라는 게 결국은 내가 나를 어느 하나의 조건에 묶어 버린다는 느낌이 들어, 최대한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지내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하지만 첫 번째 영화, 조연으로 출연한 그 작품이 흥행에 실패하니.

드라마 주연으로 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려는 이때.

재차 영화를 들어가도 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영영 영화를 찍지 않을 것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나를 징크스 안에 묶어두는 것일 터.

극복하는 것 역시 내 몫이다.

“뭐야, 벌써 다 읽었어?”

그때, 회의실을 나갔던 김 실장이 들어오더니, 눈이 휘둥그레지며 물었다.

그는 내가 아닌 테이블에 올려놓은 대본을 바라보며 입을 떡 벌렸고.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답했다.

“응, 다 읽었지.”

그는 대단하다는 듯 혀를 내두르며 앞에 자리를 잡았다.

“괜찮은 작품은 있었어?”

김 실장의 물음에 대본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형, 이거 좋은 거 같아.”

그는 내가 건넨 대본을 바라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이거 좀비물 맞지?”

“어, 형도 읽었어?”

“앞에 조금 읽었는데, 나도 다시 한번 자세히 봐볼게.”

그는 대본을 챙기며 내게 물었다.

“그래서 괜찮다는 작품은 이거 하나야?”

김 실장의 말에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거 하나.”

그는 앞에 펼쳐진 수십 개의 대본을 바라보았다.

이 많은 대본들 중,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고.

김 실장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시선을 옮겨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김 실장에게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형, 여기 제작사랑 컨택 좀 해줘.”

김 실장이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내게 답했다.

“이 작품… 무조건 하고 싶구나?”

내 눈빛과 말투만 보아도 내가 어느 정도로 작품을 하고 싶은지, 김 실장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를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응. 꼭 하고 싶어.”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이곳.

눈앞에 보이는 거라고는 그저 칠흑같이 깜깜함뿐이었다.

시야만 막힌 것이 아니었다.

…….

아무 소리도, 아무 냄새도.

그저 ‘무’의 세계에 있는 듯한 이 기분.

대체 여기가 어디지?

코를 킁킁거리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고.

아니, 잠깐!

여기는 현실이 아니다.

이곳은… 내 꿈속이었다.

번쩍-!

그때, 어딘가에서 밝은 불빛이 번쩍였고.

그 불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내 어둡고 정적이 흐르던 이곳에는 그 작은 불빛 하나로 모든 게 달라졌다.

“으으으으으….”

눈앞에는 괴이한 소리를 내며 몸이 자유자재로 꺾인 사람들이 수십, 아니 수백 명이 득실거렸고.

그들은 모두 입을 벌린 채 무언가를 찾는 듯 고개를 빠르게 움직였다.

그 순간 곧바로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들은… 좀비다!

쾅!

그때 들려오는 커다란 굉음.

“크으으으-.”

“으으으으.”

조금 전 불빛이 반짝였을 때보다 더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좀비들.

한껏 뒤로 꺾인 허리, 앙상한 두 다리는 몸을 지탱하고 서 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괴이하게 바닥에 붙어 있었다.

양팔은 관절마다 제멋대로 꺾여 뼈의 기능을 상실한 듯 보였다.

다다다다다-.

이내 좀비들은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던 곳으로 내달리기 시작했고.

나 역시 그들 사이에 휩쓸려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뼈밖에 없는 앙상한 두 팔은 몸 뒤로 젖혀져, 어깨와 얼굴만이 앞으로 나와 있었고.

다리 역시 힘이 없어 몸을 지탱하지도 못해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졌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주변의 모든 이들이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 다시 한곳을 향해 계속해서 달려갔다.

그러고 보니….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은 온전히 보이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뒤틀려진 시야.

당연히 사물, 사람, 길까지도 우글거리며 빙빙 도는 것처럼 보였고.

그럼에도 어지러움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저, 새어 나오는 빛을 향해.

그리고 아주 작은 소리에도 귀를 쫑긋 세우고 그곳으로 달려가기 바빴으니까.

“크아아아아.”

입 밖으로는 괴상한 소리가 나오고 있었고.

이런 소리와 몸짓을 한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눈, 팔, 다리, 심지어 뚝뚝 흐르는 검붉고 끈적이는 피까지.

나와 모든 것이 똑같았다.

시야가 온전치 못하다 보니, 달리다가 벽에 부딪치고 좀비들끼리 몸이 닿는 건 예삿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한곳을 향해 달리다 발견한 것은 심장이 제대로 뛰고 있는 사람이었다.

유일한 인간.

“사… 살려주세요.”

다가오는 좀비 떼에 기겁한 얼굴을 한 사람.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고, 몸을 부르르 떨며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윗입술을 들썩이며 치아를 내보였다.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인간의 뽀얀 피부.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먹고 싶다… 먹고 싶어….’

그에게 달려가던 그때.

아니, 저 얼굴….

나잖아?

겁에 질린 채 머리를 흔들고 있지만, 분명 나 진희성이었다.

지금 여기, 이 몸에 있는데.

저건 대체 뭐야?

내가 저기에 왜 있는 거지?

하지만 생각할 틈도 없이, 괴이한 소리를 내뿜으며 나로 보이는 진희성에게 달려들었다.

단순히 의지로 참아내거나, 그를 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본능이었다.

살아 있는 인간을 물어뜯는 것.

그의 살점을 날카로운 치아로 베어 무는 것.

나와 같은 좀비로 만드는 것….

나는 진희성에게 몸을 날려 그를 덮쳤다.

그리고 옷깃 위로 보이는 살색의 목.

입을 떡 벌린 채 그 목을 크게 물었다.

“아악!”

그는 괴롭다는 듯 포효했고.

그 소리도 잠시.

“으으으으으….”

곧장 나와 같은 새하얀 색의 동공으로 변했고, 몸을 뒤틀며 우둑거리는 뼈 소리와 함께 누워 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또다시 작은 소리라도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운 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팟-!

“하아, 하아.”

눈앞에 보이는 새하얀 천장.

꿈에서 깬 나는 너무나도 생생하고 실감 나는 모든 장면이 떠오르며 마른침을 삼켰다.

분명 꿈에서 보았던, 내가 물어뜯은 사람은 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단순히 닮은 것을 떠나, 정확히 나 진희성이었다.

하지만 꿈을 꿀 때, 분명 내 몸은 좀비였는데….

대체 이게 무슨 꿈이고, 뭘 의미하는 거지?

꿈을 꾼 것이지만 나는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온몸은 땀으로 범벅되어 있었고.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서둘러 욕실로 달려갔다.

샤워를 하면서도 꿈속에서 보았던 장면은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마치 실제로 좀비가 되어본 적이 있는 것처럼, 그 뒤틀린 시야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예민한 후각, 청각이 생생하게 떠올랐고.

그 장면들을 되짚으며 샤워를 마쳤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휴대 전화를 바라보니.

-부재중 전화 1통.

김 실장에게 전화가 와 있었고.

“오늘 스케줄 없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형, 전화했어?”

-응, 희성아, 일어났어?

“방금 일어났어. 근데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출연하고 싶다던 영화 있잖아.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 말하는 거지?”

-응, 좀비 영화 말이야.

“그거 연락 왔어?”

-어, 그쪽에서 너 출연하는 거 좋대.

나는 김 실장의 말에 내내 찝찝하던 꿈을 한순간에 잊은 채 소리쳤다.

“정말이야?”

-응, 출연했으면 하더라.

나는 주먹을 불끈 쥔 채 허공에 팔을 흔들었다.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전화기에 소리칠 것 같은 기분을 간신히 삼켰다.

하지만 김 실장의 목소리에 나는 이내 미소를 얼굴에서 지워냈다.

좋은 소식이 분명했지만.

김 실장의 목소리는 그렇지 않았다.

마치 내가 출연을 못 한다는 것처럼, 암울한 목소리였다.

“근데 형, 왜 이렇게 침울해?”

-아, 그게….

김 실장은 뜸을 들이며 말끝을 흐렸고.

나는 서둘러 그에게 물었다.

“괜찮아. 형, 무슨 일인데?”

-내가 여러 번 말하기는 했는데, 말이야….

말하기 미안하다는 듯 한숨을 참아내는 그에게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뭔데, 편하게 말해도 돼.”

-주연은 힘들 것 같다고 하더라고.

“응?”

-그 영화, 조연이어야 출연 가능할 것 같다고 하더라.

나는 김 실장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당황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