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18 – 더 어울리는 사람 (7)
“촬영 들어갈게요.”
스태프의 말에 송유나는 화사한 색의 등산복을 입고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를 보는 순간.
지난번 캠핑장에서의 그녀가 떠올랐다.
비슷한 색의 옷을 입은 게 아니었는데도, 등산복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날이 생각났고.
편하게 대화를 나눴던 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며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가 도도한 얼굴로 걸어왔다.
“이번에 유나 씨 단독 촬영부터 갈게요.”
“…네.”
송유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몸을 풀더니 그대로 카메라 앞에 섰다.
굳은 표정의 그녀를 온 스태프와 감독, 관계자가 바라보고 있었고.
나 또한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시작된 촬영.
찰칵, 찰칵.
크로마키를 입히기 위해 뒷배경은 아무것도 없는 초록색.
그녀의 눈앞에는 커다란 조명과 반사판.
송유나를 바라보는 눈만 합쳐도 수백 개는 될 터.
하지만 그녀는 셔터가 눌리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눈빛과 표정이 돌변했다.
마치 그녀에게는 배경이 보이는 듯 포즈를 취했다.
부담스러워 보이는 자리였지만, 송유나는 누구보다 프로페셔널하게 포즈를 취했고.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셔터 음 하나하나에 그녀는 동작을 조금씩 바꾸고 있었다.
찰칵이는 소리는 초당 1회씩 들려왔고.
그렇게 빠른 속도에도 송유나의 포즈나 표정은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 다른 표정, 색다른 포즈로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그것은 그대로 소비자들에게도 전해질 터.
왜 송유나가 이렇게 광고를 많이 찍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와아! 유나 씨 좋아요.”
촬영 감독은 감탄을 연신 쏟아내며 그녀를 카메라에 담기 바빴고.
송유나는 단 한 컷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나 역시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떡 벌렸다.
송유나는 광고를 잘 찍는 배우.
아니, 그저 모델 그 자체였다.
긴장이라는 단어는 전혀 떠오르지도, 그녀에게 어울리지도 않았다.
그런 그녀의 표정, 포즈, 손끝 하나까지도 눈에 담아 배우기 위해 눈에 힘을 준 채 바라보았다.
짧은 시간이 흐른 뒤.
“이야, 유나 씬 역시 프로는 프로네.”
촬영 감독의 칭찬에도 송유나는 크게 기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칭찬에 기쁘지 않기보다는 그저 늘 들어왔던 말이기에 대수롭지 않아 하는 모양.
“오늘 촬영 엄청나게 일찍 끝나겠는데? 하하.”
그의 말에 스태프들 역시 입꼬리를 올렸다.
스태프들은 연예인에 대한 감흥도 별로 없을뿐더러, 그들 또한 일찍 퇴근하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강할 테니까.
잠시 스태프가 달려와 감독에게 무언가를 전달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음은 유나 씨랑 희성 씨가 같이 찍는 신이니까. 쉬었다가 옷 갈아입고 바로 시작할게요.”
곧장 조명의 불이 꺼지고, 하나둘 자신의 휴식 자리로 뿔뿔이 흩어졌다.
송유나를 보며 넋을 놓고 있던 내게 김 실장이 다가왔다.
“희성아, 이거 마셔.”
그가 건넨 것은 다름 아닌 커피.
그냥 카페에서 사온 커피가 아니었다.
컵 홀더에는 송유나의 얼굴이 커다랗게 부착되어 있고.
아래에는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유나가 광고 찍으면, 그대로 품절! 우리 유나 잘 부탁드립니다♡’
-송유나 팬 카페 일동.
송유나의 팬 카페였다.
오랜 기간 촬영하는 드라마나 영화도 아닌, 하루 찍는 광고 촬영장에 팬들의 커피차라니.
“와아! 유나 씨 커피차 온 거네?”
“어, 좀 전에 와서 받아뒀어. 쉴 때 마시라고.”
김 실장은 미소를 지었고.
나는 저 멀리서 커피를 들고 사진을 찍는 송유나를 바라보았다.
그때, 내 시선을 느꼈는지 송유나가 고개를 돌렸고.
우리의 눈동자는 허공에서 부딪쳤다.
미간에 힘을 주는 그녀를 향해,
서둘러 소리를 내지 않은 채 입 모양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잘 먹겠습니다!’
내 입 모양을 본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옅게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잠깐의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이어진 촬영.
다시 한번 그녀와 함께 찍는 촬영에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몇 시간 전에 홀로 찍을 때는 실수를 하거나 포즈가 부족해도 감독의 지시를 받으며 촬영을 이어가면 됐다.
물론 그래서 촬영 시간이 길어지기는 했지만.
하지만 그녀와 함께 찍는 컷에서 내가 부족할 경우, 덩달아 송유나까지 촬영 시간이 늘어날 터.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A컷이 나오게 하리라, 다짐하며 걸어갔다.
테스트로 몇 컷을 찍은 뒤.
연이어 셔터가 눌리기 시작했고.
다행히 아침 일찍부터 몇 시간 내내 이어진 촬영에 긴장이 풀리고, 광고 촬영에 조금 익숙해져 자연스러운 표정이 나오고 있었다.
찰칵찰칵.
“좋아. 희성 씨도 그렇게 계속 갈게요.”
“네.”
현장에는 셔터 소리만이 울려 퍼졌고.
카메라를 내려놓은 감독은 송유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유나 씨가 희성 씨한테 살포시 기대볼까요?”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고개를 쓰윽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제가 이쪽으로….”
자세를 고쳐 잡으며 말하자, 송유나가 말을 잘라내며 답했다.
“아니, 그냥 알아서 포즈 취해요. 내가 알아서 하니까.”
“아… 네.”
감독이 다시 카메라를 들었고.
나를 무표정으로 차갑게 바라보던 송유나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활짝 휘어진 입꼬리, 반달로 꼬리 치는 눈웃음.
그녀는 밝은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고.
나 또한 그녀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오, 좋아. 그대로….”
셔터 소리가 빨라지고 있었다.
“거기서 조금…!”
구체적이지 않은 감독의 말에도 송유나는 찰떡같이 알아먹은 모양이다.
내 팔과 허리 사이로 쑤욱 그녀의 손이 들어왔고.
송유나는 내게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양팔로 내 한쪽 팔을 꽈악 당기며 품에 안았고.
나는 자연스레 다정한 연인처럼 자세를 취했다.
그녀의 부드럽고 온화한 얼굴.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얼굴이지만, 오늘 촬영하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보는 눈빛이었다.
송유나는 남자 친구를 바라보듯 따스한 미소로 내 눈을 바라보며 움직였고.
나 역시 곧장 포즈를 바꾸며 그녀와의 촬영을 이어갔다.
“아, 잘 어울린다. 더 활짝!”
***
“고생하셨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어요.”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 촬영은 바깥이 어둑해진 후에야 끝이 났고.
손뼉을 부딪치며 현장이 마무리되었다.
내 인생의 첫 광고 촬영.
별 탈 없이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는 생각에, 모든 스태프에게 감사했고.
그들에게 한 명, 한 명 허리를 접어 감사 인사를 전했다.
“오늘 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서둘러 뒤를 돌아 두리번거리며 송유나를 찾았다.
너무나도 소중한 광고를 되찾게 해준 그녀에게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말로만 감사를 전하는 것보다, 무언가 그녀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희성아, 가자.”
“형, 혹시 유나 씨 못 봤어?”
결국 김 실장에게 그녀의 행방에 대해 묻자,
김 실장은 턱으로 저 먼 곳을 가리키며 답했다.
“저기… 벌써 유나 씨 차 가잖아.”
“아….”
나는 이제야 현장을 나왔는데, 송유나는 모든 것을 언제 정리했는지.
이미 차를 탄 채 저 멀리 떠나가고 있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니야.”
“싱겁긴. 우리도 가자.”
“응.”
김 실장은 뒤돌아 차를 향해 걸어갔고.
나는 떠나가는 차를 바라보며 작게 읊조렸다.
“밥이라도 산다고 하려 했는데… 벌써 가버렸네….”
차에 올라타자 하루 내내 긴장했던 몸이 확 풀어지는 것 같았다.
몸을 의자에 푸욱 기댄 채 긴 숨을 내쉬었다.
“희성아, 오늘 고생 많았어.”
“아니야. 형도 고생했지.”
그는 룸 미러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뭘. 첫 광고라 긴장도 많이 했을 텐데. 아까 보니까 진짜 잘 나온 것 같더라.”
“정말?”
김 실장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광고주들도 엄청나게 마음에 들어 하시던데?”
그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유나 씨랑 같이 찍은 것도 진짜 잘 나왔어. 다들 감탄하고 난리더라. 하하.”
김 실장의 한마디에 오늘 하루의 힘듦이 눈 녹듯이 사르르 사라졌다.
“…다행이다.”
“피곤할 텐데, 얼른 좀 쉬어. 말 안 걸게.”
김 실장은 뿌듯한 얼굴로 말하고는 운전대를 쥔 손에 힘을 잔뜩 주었다.
그리고 나는 힘이 풀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없던 힘이 샘솟았고.
의지에 불타오르는 얼굴로 의자에 기댄 몸을 일으켰다.
“형, 나 내일 새로 온 대본이 있으면, 좀 챙겨주라.”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늘 광고 찍었으니까, 내일 쉬고 모레 나와도 돼.”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 그동안 많이 쉬었으니까 빨리 시작하고 싶어.”
“어휴, 쉬는 것보다 일하는 걸 더 좋아하는 애가 여기 있네. 진짜 대단하다.”
그는 입꼬리를 올린 채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
“안녕하십니까.”
회사에 도착하자 김 실장이 시계와 나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뭐야,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얼른 시작해야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고.
김 실장이 손가락으로 멀리 가리키며 말했다.
“회의실 가 있어. 얼른 대본 챙겨서 갈게.”
“응, 고마워. 형.”
휴식 기간에 김 실장에게 받았던 대본들.
그리고 다시 요청해 받은 드라마와 영화 대본들이 수두룩했지만.
내 마음을 사로잡는 작품이 하나도 없었다.
배우라는 직업이 일을 하고 싶다고 해서 당장 현장에 뛰어들어 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시작을 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대본을 보며, 작품을 선정해야 하고.
또 그 배역을 따내기 위해 수백 대, 수천 대의 경쟁률을 뚫고 오디션을 봐야 하지.
그러니 쉬지 않고 일을 하고 싶은 만큼, 이 시간을 빨리 단축시키고 싶었다.
하루라도 빨리 원하는 작품을 골라 수없이 연습하고.
오디션을 보고서야 촬영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
“희성아, 여기.”
그때 김 실장이 대본 한 무더기를 품에 안은 채 낑낑거리며 회의실로 들어왔고.
많은 대본을 테이블에 우르르 내려놓았다.
“엄청 많네?”
“어, 며칠 전에 보여줬던 건, 일부였지.”
서둘러 가장 위에 있는 대본을 집어 들었다.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은 채, 어느덧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을 사로잡는 대본은 찾지 못한 상황.
스트레칭을 하며 정신을 다잡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빙빙 걷다가,
팔을 앞뒤로 움직인 뒤, 다시금 제자리에 착석했다.
“괜찮은 거 뭐 없나….”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수많은 대본들.
순간.
저 많은 대본 사이로 눈길을 확 사로잡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 어떤 감이 오거나, 특별함은 전혀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나를 끌어당기는 듯한 대본이랄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을 뻗어 그 대본을 당겨왔다.
그리고 의자에 몸을 기대고 발을 쭉 편 뒤.
대본 첫 장을 펼쳤다.
가장 편한 자세로 집중해서 대본을 보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대본의 페이지가 한 장, 두 장….
그렇게 몇 페이지가 순식간에 넘어가기 시작했고.
어느새 내 몸은 의자에 기댄 것이 아닌, 테이블 쪽으로 몸을 당긴 채 대본에 빨려 들어갈 듯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이거 좀비잖아?”
대본에 등장한 좀비.
마른침을 삼키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고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게 대본에 몰입했고.
어느새 벌어진 입은 그걸 증명하는 듯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페이지를 넘기던 그때,
잠깐만.
이거… 꿈에서 본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