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91)화 (91/303)

91화 #18 – 더 어울리는 사람 (6)

“희성아!”

회의실 문을 벌컥 연 김 실장이 소리치며 내게 다가왔다.

“왜, 뭐 광고 연락이라도 왔어?”

일주일째, 파워발란스 측에서는 연락이 없었지만.

웃으며 김 실장에게 농담처럼 물었다.

그러자 김 실장의 눈이 휘둥그레진 채 입을 떡 벌렸다.

“뭐야, 어떻게 알았어?”

“응?”

그의 반응에 더 놀란 건 오히려 나였다.

“방금 파워발란스에서 희성이 너랑 광고 진행하겠다고, 계약서에 도장 찍자고 연락이 왔어. 그런데 어떻게 벌써 알고 있냐고.”

“진짜로 연락이 왔다고?”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물었다.

김 실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야, 인마. 네가 해결하겠다더니, 대체 파워발란스에 찾아가서 무슨 말을 했길래 이렇게 마음을 다시 바꿨대?”

나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게… 그때는 분명 바로 바꿀 것 같지는 않았는데….”

곰곰이 생각을 해봐도 그때 직원과 나눴던 대화에서 나로 확신하게 만들었던 부분을 꼬집자면, 딱 하나를 집을 수는 없었다.

대체 어떤 부분이 먹힌 거지?

계약금도, 계약 기간도 나보다는 백영훈의 조건이 좋았는데.

그들이 처음부터 원한 건 나였으니까.

그거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뒤집을 수 있는 건가?

아무렴 어떤가.

결론은, 광고 모델이 나라는 것이다.

나는 기쁨에 포효를 외치듯 소리쳤다.

“됐다!”

처음 광고 제안이 왔을 때만큼 심장이 쿵쾅대고 있었고.

김 실장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기쁨을 만끽했다.

그리고 이내 그 뜨겁던 마음을 차갑게 눌러낸 뒤, 함께 자리에 앉았다.

“희성아, 진짜 고생했다. 이렇게 광고 모델을 다시 가져온 건 정말 대박이야.”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쓰읍 소리를 내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내가 미팅한 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

“그럼 계약은 이대로 진행하면 될 것 같고….”

광고 계약에 대한 회의가 이어졌고.

처음 나에게서 시작한 광고가 백영훈에게로.

그리고 다시 내게로 돌아왔기에, 회의는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지이잉.

그때 한 팀장의 휴대 전화가 울렸고.

그는 휴대 전화를 보며 입을 열었다.

“잠시 쉬었다가 해도 괜찮을까요?”

“네.”

답을 하자, 한 팀장이 김 실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김 실장님, 잠시….”

그는 검지와 중지를 입에 붙이며 담배를 피우자는 제스처를 취했고.

그들은 곧장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회의실에는 나와 조아현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고.

그녀는 긴 회의에 피곤했는지,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고 있었다.

나 역시 한 자세로 오래 앉아 있던 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녀의 자리로 걸어갔다.

“저… 아현 씨.”

“네?”

그녀는 기지개를 켜던 팔을 접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피곤하시죠?”

“하하, 아니에요.”

조아현은 밝게 웃으며 내게 답했고.

그녀에게 광고 모델이 바뀐 이유에 대해 묻고 싶었기에.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하나 싶어 눈동자를 굴렸다.

그런데 그녀가 먼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희성 님은 송유나 배우님이랑 친하신 거예요?”

“네?”

갑자기 나와 송유나의 관계를 묻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송유나와 함께 찍는 광고라 으레 묻는 질문일 거란 생각에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친하다기보다는… 작품도 하고, 아무래도 같은 회사 식구니까요. 근데 왜요?”

“아니, 엄청나게 친하신 것 같아서요.”

알 수 없는 그녀의 말에 눈썹을 들썩였다.

무슨 근거로 나와 송유나가 친하다는 거지?

혹시, 광고 모델이 바뀐 이유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건가?

옅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아현 씨, 광고 모델이 저로 바뀌게 된 이유… 아실까요?”

“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분명한 이유를 알고 있다는 것을.

조아현은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성격인 것 같았다.

당황한 얼굴과 흔들리는 눈빛.

그런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재차 물었다.

“말씀해 주셔도 괜찮아요. 그래도 제가 다시 광고를 하게 된 이유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그러니, 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조아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송유나 씨가….”

그렇게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고.

조아현의 말이 이어질수록 나는 놀라움에 입이 떡 벌어졌다.

……!

***

“하아….”

백영훈은 부릅뜬 눈으로 이 실장을 쏘아보며 물었다.

“확실해?”

“어, 방금 계약서에 도장 찍고 끝났대.”

이 실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백영훈은 회의실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아이, X발!”

그 목소리에 이 실장은 몸을 움찔거렸고.

백영훈은 분을 이기지 못하는지 눈을 뒤집어 까며 욕설을 퍼부었다.

“X친. 이런 X 같은 경우가 어디 있냐고!”

의자까지 박차고 일어나 끓어오르는 화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영훈아, 너무 화나고 속상한 건 알지만.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그래도야. 형은 열 안 받아?”

이미 백영훈의 얼굴은 정상이 아닌 듯 보였다.

튀어나올 듯 커진 눈.

떨리는 얼굴 근육, 말을 내뱉을 때마다 목의 핏줄이 터질 듯했다.

“아니, 나도 열은 받지. 근데 윗선에서 지시가 그렇게 내려온….”

이 실장은 그를 달래듯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지만.

백영훈은 그의 말을 잘라버렸다.

“아오, 개 X 같네!”

이 실장 역시 광고가 넘어갔다는 소식에 화가 끓어올랐지만.

쏟아지는 백영훈의 욕설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의 꽉 쥔 주먹은 터질 듯 벌게졌고.

“진희성… 감히 내 광고를 빼앗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영훈아… 우선 물 좀 가져다줄게.”

이 실장은 그런 백영훈을 진정시키기 위해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회의실을 나가자마자 백영훈은 포효하듯 소리쳤다.

“으아아! 진희성 X 같은 자식. 내가 가진 걸 앗아가고도 무사할 것 같아?”

백영훈의 눈은 이미 돌아가 있었고.

그의 어깨는 빠르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쾅!

분노를 참지 못한 나머지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대본을 벽에다 집어 던졌고.

그 소리는 회의실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그것을 시작으로 손에 집히는 대로 모든 물건을 던지기 시작했고.

“그 자식이 뭔데, 왜 항상 내 앞길을 막는 건데!”

어느새 좁은 회의실 안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진희성… 그 X 같은 놈만 없었어도. 드라마도, 광고도 모두 내 것이었다고. 걔만 없었으면!”

계속해서 목이 터져라 외친 탓에 어느새 갈라진 목소리.

손을 더듬어 잡히는 것이 없자, 고개를 돌려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테이블에는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백영훈이 모조리 던진 탓에 멀쩡한 물건은 단 하나도 없었고.

그는 여전히 분노가 가라앉지 않는지, 테이블 다리를 발로 차기 시작했다.

콰앙-!

“악!”

결국 테이블 철제 다리에 발을 찧은 백영훈은 울부짖듯 포효했다.

“이 거지 같은 테이블까지 난리야.”

그는 책상에 양손을 올려 몸을 지탱하며 빠르게 호흡하고 있었다.

과호흡이 올 정도로 숨을 몰내쉬던 그때.

이 실장이 잔에 물을 채워 회의실에 들어왔고.

난장판이 된 광경에, 입을 벌린 채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아, 영훈아….”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백영훈의 상태 또한 멀쩡하지 않았고.

그는 서둘러 백영훈을 자리에 앉힌 뒤, 물을 건넸다.

몇 분의 시간이 흐르고.

겨우 진정이 된 것 같은 백영훈의 모습.

하지만 여전히 그의 눈에는 살기가 어려 있었다.

“형.”

“어, 영훈아. 이제 좀 괜찮아?”

그의 질문에는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대본, 들어온 대본 전부 다 가져다줘.”

“지금?”

백영훈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응, 빨리.”

“그래도 조금 쉬었다가….”

“아니, 빨리 가져다줘.”

“영훈아, 우리 차분하게 생각을 좀 하고 난 뒤에 봐도 괜찮을 거 같은데.”

이 실장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백영훈은 그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 다음 작품으로 진희성 찍어 눌러야 해. 시간 없어, 회사로 온 작품들 하나도 빼지 말고 다 가지고 와.”

그의 독기 어린 눈빛.

이 실장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어, 가지고 올 테니까. 차분하게 같이 읽어보자.”

쾅!

갑자기 백영훈이 양 주먹을 테이블에 올리며 이 실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진희성, 그 인간이 앞으로 뭐 들어가는지도 전부 다 알아와.”

그의 주먹이 떨리자, 그 진동은 테이블 전체에 전달되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

첫 광고 촬영 날.

얼굴이 부을세라 전날 6시 이후로 아무것도 입에 넣지 않았고.

그 노력 덕에 얼굴 컨디션은 평소보다 나아진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촬영장에 도착하자, 수많은 스태프와 파워발란스 관계자들이 나를 반겼다.

“오셨어요. 희성 씨?”

“네,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에 파워발란스 직원이 내게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아이고, 저희가 잘 부탁드려야죠. 하하.”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럼 얼른 준비하고 나오겠습니다.”

“예.”

잠시 뒤 촬영장에 송유나가 도착했고.

곧장 촬영 감독과 파워발란스 관계자들, 그리고 송유나와 나까지.

광고 컨셉과 콘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예, 이렇게 진행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잘 살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촬영 감독은 파워발란스 관계자에게 답했고.

송유나와 내게 눈빛을 보냈다.

“그럼 이 컨셉부터 갈게요. 옷 갈아입고, 준비하고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네.”

그의 말이 끝나자, 송유나와 나는 각자의 대기실로 향했다.

환복을 마친 뒤.

첫 번째 컨셉 촬영이 시작됐고.

미리 살짝 맞춰봤던 합으로 송유나와 함께 자세를 취했다.

찰칵, 찰칵.

촬영 감독의 연이은 셔터.

밝게 비치는 조명.

첫 광고 촬영에, 첫 번째 사진.

아직 어색함이 묻어 나왔지만, 수없이 연습했던 것을 떠올리며.

어색함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했다.

“좋아요. 계속 가요.”

촬영 감독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촬영을 이어갔다.

“고생하셨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다음 촬영 시작할게요.”

촬영 감독의 말에 나는 허리를 접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휴식 시간 덕에 긴장했던 몸을 풀며 의자에 기대었고.

송유나는 다리를 굽혔다 펴며 한쪽에 서 있었다.

그녀를 발견하고 조심스레 송유나의 곁으로 다가갔다.

“저… 유나 씨.”

송유나는 나를 흘긋 바라보고는 무심하게 자신의 팔을 주무르고 있었고.

할 말이 있었던 나는 마른침을 한 번 삼켜낸 후, 그녀에게 말했다.

“감사해요.”

송유나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이 광고 촬영.

송유나가 백영훈이 아닌, 나를 추천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상대 모델이 나로 바뀌지 않으면 자신도 광고 촬영을 하지 않겠다,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회사 윗선에 올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송유나 덕에 다시 찾아온 광고 모델이었기에.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현해야 하는 건 당연했다.

송유나는 곁눈질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가요?”

“이번 광고 건이요.”

송유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답했다.

“…무슨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네.”

감사 인사에 머쓱해서 그러는지, 그녀는 끝까지 모른 체했고.

주무르던 팔을 뻗어 그대로 팔짱을 꼈다.

그러고는 몸을 휙 돌려, 도도하게 돌아섰다.

“오빠, 나 커피 좀 사다줘.”

송유나는 나를 등진 채 최 실장을 향해 소리쳤고.

그녀의 부름에 최 실장이 서둘러 답했다.

“어, 바로 사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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