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90)화 (90/303)

90화 #18 – 더 어울리는 사람 (5)

파워발란스.

커다란 빌딩 숲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회사.

건물 앞에서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김 실장은 광고를 되찾기 위해 HS 엔터 회사 내부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광고는 다시 내 품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대로 손을 놓고 바라만 보기에는 너무나 억울했고.

다시 되찾으려면, 직접 나서는 수밖에.

그 방법으로 이렇게 직접 광고주인 파워발란스 회사에 찾아온 것이지.

애초에 그들이 골랐던 광고 모델은 백영훈이 아닌, 나 진희성이었다.

앞뒤 상황을 모두 알게 된 지금, 파워발란스 측에서 백영훈으로 모델을 바꿔 달라고 제안한 것이 아니라.

HS 엔터 측에서 백영훈으로 교체 제안 같은 압박을 넣은 것이기에.

결국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똑똑.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때 HS 엔터로 미팅을 왔던 직원이 어색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 희성 배우님 오셨어요?”

불쑥 회사로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막무가내로 찾아올 수는 없었기에.

아마 HS 엔터 측으로도 내가 이 회사에 왔다는 사실이 전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내 일을 되찾으려는 노력이기 때문에.

그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자리에 안내했고.

“네, 잘 지내셨죠?”

“아, 그럼요.”

“불쑥 연락드리고 오게 돼서 죄송합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게 커피를 건넸다.

“아닙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는데, 대접할 게 커피뿐이네요.”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 서로 숨을 고르며 커피를 한 모금씩 들이켰다.

직원들과 분리된 작은 회의실.

고요한 분위기에 마주 앉은 직원의 작은 침 넘기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미팅이나 계약도 아니고, 이렇게 계약에서 제외되어 버린 배우가 찾아온 것이 편치만은 않은 모양.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바쁘실 텐데, 빙빙 돌리지 않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그러시죠.”

“이번 저에게 제안 주셨던 광고가 백영훈 배우에게로 넘어갔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

그는 굳이 변명을 하거나 숨기지 않았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지.

“그런데 백영훈 배우로 모델을 바꾸신 게 파워발란스 측이 아닌, 저희 회사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죠.”

재차 확인된 사실에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회사 내부에서 저와 상의 없이….”

그를 향해 회사에서의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고.

회사에 대한 욕이나 비판은 전혀 없었다.

그저 백영훈 측에서 가로채기 위해 수를 썼다는 사실만을 이야기했을 뿐.

내 말에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저희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파워발란스에 맞는 모델이 진희성 배우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광고 제안을 드렸던 거고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HS 엔터 쪽에서 그렇게 좋은 제안을 주시는데, 저희가 거절하기가 힘든 게 사실이었죠.”

그의 말도 이해가 되기는 했다.

계약 기간은 2배나 긴 1년.

거기에 계약금은 2천만 원이나 적은 8천만 원이니, 솔깃할 수밖에 없을 터.

“그런데 사실 저희가 희성 배우님께 말씀드렸던 대로 예산을 짜둔 거긴 한데….”

그는 쓰읍 소리를 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게다가 이제 와 다시 HS 엔터 측으로 희성 배우님과 하겠다고 하면, 회사 간에 트러블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게 사실입니다.”

잠시 말을 끊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 뒤, 말을 이어갔다.

“저희를 위해 너무 좋은 조건을 주셨는데, 갑자기 모든 걸 엎어 버린다는 게….”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답했다.

“광고주 측에서 원하는 모델로 진행하겠다고 하시면,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음… 혹시나 문제가 된다면, 아시잖습니까. 광고 모델 이미지와 브랜드 이미지가 직결이 되니까, 저희에게는 리스크를 안고 시작해야 하는 문제고요.”

HS 엔터와의 문제를 걱정하고.

그로 인해 앞으로 자신들의 브랜드 이미지 실축을 걱정하는 직원을 안심시켜야 했다.

눈에 힘을 주고 그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계약 기간 6개월 동안은. 아니, 그 이후에도 절대 트러블은 없을 겁니다. 아니, 없습니다.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내 당찬 한마디에 그는 놀란 듯했다.

하지만 이내 눈썹을 들썩였다.

대체 어떻게 보장을 하겠다는 건지에 대한 의문인 듯해,

다시 한번 그를 향해 다짐하듯 외쳤다.

“혹시나 계약 기간 안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전액 환불 조건이라도 걸겠습니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통 이런 건 내가 아닌, 광고주 측에서 제안하는 말이니까.

“…그래요?”

“예, 그만큼 자신 있고, 확실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거기에 제 배우 이미지와 관련해서 트러블도 없을 거고요.”

“음… 그럼 저희도 내부에서 이야기 좀 해 보겠습니다.”

그와 짧은 인사를 끝으로, 파워발란스 건물에서 빠져나왔다.

확실하게 내게 넘어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절대 안 될 거라 느끼지도 않았지만.

단,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란 생각에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는 연락을 기다리는 것뿐.

***

“그래서 아직 연락은 없지?”

김 실장과 함께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대화를 나눴다.

“응, 어제 다녀온 거니까, 조금 기다려 봐야지.”

딩동.

엘리베이터는 김 실장이 누른 층에 멈춰 섰다.

“희성아, 회의실 가서 연습하고 있어. 나 서류만 확인하고 갈게.”

“응, 천천히 와.”

김 실장은 서둘러 엘리베이터에서 내렸고.

남은 나는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닫히는 문을 바라보았다.

그때.

드르륵.

닫히던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다.

누군가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모양이었다.

인사를 하기 위해 기댔던 몸을 일으켰고.

“어?”

엘리베이터에 타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백영훈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백영훈은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헤실대며 나를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형, 오랜만이네요?”

이제는 고개를 숙이거나, 안녕하세요 같은 멘트는 내뱉지 않았다.

물론 그에게 가식적인 인사를 받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그는 나를 오랜 형, 친한 친구 이상으로 대하듯 손을 흔들며 다가왔고.

“형, 안 본 지 너무 오래됐어요. 보고 싶었는데. 하하.”

그런 그의 모습에 소름이 온몸에 쫙 돋았다.

아무 대답도 없이 그의 눈을 바라보았고.

백영훈은 그제야 눈치가 보였는지, 내 옆에 나란히 서서 입을 열었다.

“맞다. 희성이 형, 죄송해요.”

그의 말에 고개를 돌려 백영훈을 바라보았다.

“뭐가?”

“파워발란스 말이에요. 그게 원래 형한테 들어온 광고라던데… 어떻게 해요. 그쪽에서 저를 원한다고 어찌나 부탁을 하는지….”

백영훈의 말에 기가 찼지만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내게 거짓말을 하는 거냐.

왜 내 광고를 빼앗으려고 애를 썼냐.

이런 식의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런 대화조차 섞고 싶지 않았고.

백영훈의 저런 행동에 대응한다면, 그와 똑같은 수준의 사람이 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저 말없이 팔짱을 낀 채 엘리베이터 앞에 떠 있는 층수만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약 올리는 듯한 목소리로 재차 입을 여는 백영훈.

“제 성격 같았으면, 형님 거 광고 절대 안 찍었을 텐데. 아시잖아요. 광고주는 형보다 저를 너무나 원한다고 하지, 회사에서는 무조건 찍으라고 하지….”

그의 입꼬리는 음흉하게 비틀렸고.

딩동.

그때 도착한 엘리베이터.

나는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문으로 향해 걸어갔다.

탁.

그리고 문 앞에서 발길을 멈춘 채 읊조렸다.

“그 광고가 갑자기 왜 너한테 갔는지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나 보네?”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맞췄고.

백영훈의 미간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럼과 동시에 경멸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다시금 고개를 돌려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왔다.

***

뻥 뚫린 도로를 달리는 차.

그리고 그 차 안에는 차가운 공기가 맴돌고 있었다.

“오빠.”

송유나의 까칠한 말투.

그저 매니저 최 실장을 부른 것뿐인데도.

최 실장은 몸을 움찔거리며 룸 미러를 바라보았다.

평소 자신을 부르는 말투에서도 송유나의 감정을 알 수 있었으니까.

“어, 유나야.”

“이거 뭐야?”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어떤 거 말하는 거야?”

송유나는 말없이 종이를 운전석 쪽으로 밀어 흔들어 보였다.

“아, 그거 저번에 미팅했던 파워발란스 광고 내용이야.”

최 실장이 그녀가 묻는 요점을 알아차리지 못하자, 송유나는 짜증 섞인 투로 말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고.”

“광고 내용이랑… 계약서에 들어갈 금액, 그리고 광고 모델 정리한 거. 그게 다인데?”

“오빠, 한 번에 말하면 좀 알아들을 수는 없어?”

송유나의 짜증에 최 실장은 한숨이 나오려고 했지만.

그는 그 들끓는 마음을 차갑게 식혀내며 고개를 돌렸다.

“미안한데, 어떤 거 말하는지 좀 말해줄래?”

송유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최 실장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으며 답했다.

“아, 모델!”

그리고 종이를 툭툭 치며 말을 이어갔다.

“진희성이었잖아. 왜 갑자기 백영훈으로 바뀐 거냐고.”

“아… 그거?”

최 실장은 다시 앞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뭐, 사정이 있었나 봐. 이번에 백영훈으로 바뀐다고 서류 다시 뽑아온 거야.”

송유나는 그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진희성이랑 백영훈 둘 다 우리 회사잖아.”

“그렇지.”

그녀는 다리를 꼰 채 머리를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윗선에서 바꿔치기했네.”

송유나의 연예계 경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이미 다년간 보고 느낀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기에, 그녀는 단번에 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

그러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읊조렸다.

“HS 엔터… 이런 짓 한두 번도 아니고. 진짜, 하아.”

“…….”

그녀의 말에 최 실장은 입을 꽉 다물었다.

최 실장 또한 HS 엔터 직원이었기에.

그녀의 말에 동조할 수도, 그렇다고 아니라도 반대 의견을 낼 수도 없는 노릇.

어차피 이미 윗선에서 여러 과정이 지나간 뒤, 자신에게는 그저 통보가 떨어진 것이니까.

잠시 차 안에는 정적이 흘렀고.

고요함 속에서 최 실장은 그저 운전에 집중할 뿐.

송유나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다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킨 송유나가 최 실장을 향해 외쳤다.

“다시 바꿔달라고 해.”

“뭐?”

“원래대로 진희성으로 모델 바꾸라고 하라고!”

다짜고짜 소리치는 그녀의 말에 최 실장은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졌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송유나에게 물었다.

“…왜, 진희성이 아니면 안 되는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거야?”

룸 미러로 그들의 눈이 마주쳤고.

송유나는 최 실장의 말에 황급히 눈길을 돌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등산을… 그러니까, 등산복은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모델 해야지!”

“…뭐라고?”

최 실장은 눈썹을 움찔거리며 송유나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팔짱을 끼고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아무튼, 백영훈이랑 하면 나 광고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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