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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89)화 (89/303)

89화 #18 – 더 어울리는 사람 (4)

진희성이 미팅이 밀렸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전.

운전석에 앉은 백영훈의 매니저 이 실장이 룸 미러를 바라보았다.

“영훈아, 다음 작품 대본은 언제까지 준비하면 될까?”

그의 물음에 백영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

“형이 알아서 준비하고 알려주면 되잖아. 아무 때나 줘.”

“그래, 챙겨뒀는데 회사 들어가서 한번 보여줄게.”

이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백영훈이 감았던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맞다, 형. 진희성은 회사에서 대본 보고 있나?”

“아마 그럴 거야. 매일 와서 대본 보고, 연기 연습한다고 하더라고.”

이 실장은 진희성과 관련된 이야기에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아! 영훈아, 파워발란스 알지?”

“당연하지. 근데 그건 왜?”

“이번에 진희성이 거기 광고 들어간다고 하더라.”

이 실장의 말에 백영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아니, 그걸 진희성이 한다고?”

“응, 이제 막 미팅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이미 미팅했으려나?”

백영훈은 기가 찬다는 얼굴로 한쪽 입꼬리를 휘었다.

“진희성이 스포츠 브랜드 이미지랑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의 말에 이 실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근데 생각해 보니까,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 그런 이미지는 나랑 더 잘 맞잖아.”

백영훈의 말에 이 실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답했다.

“하하, 맞지. 영훈이가 또 그런 거랑 잘 어울리지.”

이 실장의 말에 백영훈은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안전벨트가 꽉 조이고 있음에도 그는 최대한 몸을 앞으로 당겨 운전석 옆까지 얼굴을 들이밀며 입을 열었다.

“형…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아?”

“응?”

이 실장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곧장 손가락을 튕기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뺏어오자고?”

그의 말에 백영훈 역시 입을 찢으며 다시 몸을 의자에 푸욱 기대었다.

“뺏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주인을 찾는 거지.”

그러고는 팔짱을 낀 채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진희성이 나보다 잘되는 건… 못 보지.”

한참을 달리다 잠시 멈춘 차.

이 실장이 급히 차에서 내려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고.

백영훈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다시 차에 올라탄 이 실장에게 백영훈이 물었다.

“형, 뭐래. 확인했어?”

“응, 1억에 6개월로 계약 예정인가 봐. 아직 계약 전이고.”

백영훈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는지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고.

이 실장 또한 그와 마찬가지였다.

“이 조건이 좋긴 한데, 빼앗으려면 이보다는 낮아야 해.”

그의 말에 백영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형.”

“응, 영훈아.”

“봐, 내가 진희성보다는 먼저 광고를 찍어야 하지 않겠어?”

백영훈은 이 실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잘 돼야 형도 계속 잘나가는 매니저로 있을 거 아니야.”

그의 말투는 굉장히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마치 어린아이를 설득하는 듯한 어투.

이 실장은 눈썹을 들썩였다.

“당연하지. 내가 맡은 연예인이 잘나가는 거 싫어할 매니저는 없지.”

“그럼 형. 광고, 우리가 가져오자.”

“나도 그러면 좋겠지만, 그럼 진희성이 계약하는 것보다 낮게….”

이 실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영훈이 말을 잘라냈다.

“형, 말했잖아. 돈은 상관없어. 그냥 진희성 거를 빼앗기만 하면 돼.”

“…….”

“내가 진희성보다 못한 게 하나도 없잖아.”

백영훈의 눈은 불타오르듯 이글거리고 있었고.

그에 이 실장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토론을 하듯 한참 대화를 이어 나갔고.

곧 이 실장은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를 서둘러 받았다.

이내 전화를 끊자, 이 실장의 얼굴에는 음흉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영훈아, 우선 회사 들어가서 바로 회의해볼게. 우리가 광고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아.”

“회사에서 그렇게 하래?”

“어, 윗선에서도 영훈이 네가 광고하는 걸 더 원하나 봐.”

백영훈은 이 실장의 말에 입꼬리를 휘었다.

“거봐. 진희성보다는 당연히 내가 낫지.”

그러고는 턱으로 앞을 가리키며 외쳤다.

“얼른 회사로 가서 이야기하자.”

“응, 바로 강 본부장님 뵈러 가야겠다.”

***

똑똑.

김 실장은 본부장실의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가 강 본부장 앞에서 입을 열었다.

“본부장님.”

“어, 김 실장이 무슨 일이야?”

그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김 실장을 바라보았고.

“광고 때문에 왔습니다.”

강 본부장은 단번에 그 뜻을 알아차렸는지, 눈썹을 들썩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 앉지. 앉아서 이야기하자고.”

그들은 그대로 소파로 걸어가 자리를 잡았고.

테이블에는 곧바로 커피가 놓였다.

“들게.”

김 실장은 당장이라도 큰 소리로 따지고 싶었지만.

매니저인 김 실장이 HS 엔터 본부장 직책인 그에게 다짜고짜 소리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예.”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 김 실장.

강 본부장 역시 다리를 꼰 채로 찻잔을 들었다.

“그래서 광고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네, 아시다시피 지난주에 진희성 배우의 광고 건이 보고 올라갔다고 들었습니다.”

김 실장은 들고 있던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 광고가 백영훈에게 넘어갔다는데, 알고 계신 거죠?”

김 실장의 말에 강 본부장은 놀라거나 당황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온화한 얼굴로 김 실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알지.”

“아니, 갑자기 계약 직전에 이렇게 되는 게 어디 있습니까. 이유를 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음… 이유라….”

강 본부장은 기대고 있던 등을 떼고 몸을 당겼다.

“듣기로는 백영훈이랑 이 실장이 파워발란스 광고 단가를 낮춰서 하겠다고 했다더라고요.”

“같은 회사 식구끼리 이렇게 가로채는 게 어디 있습니까. 이건 상도덕이 아니죠.”

김 실장의 이야기를 가만히 경청하던 강 본부장은 그제야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 실장 말을 들어보니, 기분이 충분히 나쁠 수 있겠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이 실장을 불러서 따끔하게 한마디 할게.”

“예, 이번 건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실장이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강 본부장은 김 실장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다시금 찻잔을 들며 답했다.

“그래, 식기 전에 어서 들어.”

“…네.”

이후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마셨고.

김 실장은 그런 그에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광고 계약 미팅은 다시 잡으면 되겠습니까?”

그의 말이 끝나자 강 본부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이야, 이미 백영훈이 계약 조건까지 다 변경을 했잖나.”

조금 전까지 이 실장에게 주의를 주겠다던 강 본부장의 말.

그리고 그 광고는 그대로 백영훈이 하겠다는 이야기에 김 실장이 당황한 듯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그게 끝입니까?”

그의 말에 강 본부장은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면?”

김 실장은 자세를 고쳐 잡고 앉아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저희 측에서 광고를 빼앗긴 건데 원상 복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음… 근데 이미 파워발란스 측에서는 백영훈과 하기로 했잖아. 그걸 다시 엎기도 그렇고.”

김 실장은 그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요. 엎어야죠.”

그의 당찬 말에 강 본부장의 입꼬리가 옅게 올라갔다.

“아이, 김 실장. 아까는 같은 식구 운운하더니. 정말 같은 식구끼리 그럴 거야?”

김 실장은 그 말에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입을 떡 벌린 채 탄식을 내질렀다.

“본부장님!”

그의 외침에도 강 본부장은 몸을 소파에 푸욱 기댄 채 눈썹을 들썩였다.

“설마 희성이가 그때 계약 연장을 안 했다고 이러시는 겁니까?”

결국, 참고 있던 김 실장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강 본부장은 그의 표정과 달리 온화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그런 게 어디 있나.”

그 차분함에 김 실장의 울분은 점점 고조되었고.

가쁜 숨을 내쉬며 답했다.

“그거 아니면, 설명이 안 되잖습니까. 다 잡아놓은 광고를 이렇게 빼가는 게 어디 있으며. 그걸 넘어가 주시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흥분한 채 소리치는 김 실장의 말에도 강 본부장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런 게 어디 있나. 내가 뭐 백영훈을 예뻐하고, 진희성을 미워해서 그렇다는 말처럼 들리네?”

“아니십니까?”

강 본부장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아니지. 둘은 다 같은 아티스트일 뿐이지. 내게는 둘 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김 실장이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거 같은데.”

김 실장은 눈살을 찌푸렸고.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강 본부장의 속마음을.

말은 저렇게 해도,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계약 연장을 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진희성을 그저 눈 밖으로 내버린 것.

그 때문이라는 건 옆집 개똥이도 아는 사실이니까.

하지만 끝까지 시치미를 뚝 떼는 강 본부장의 말에 김 실장은 그저 한숨만을 내쉴 뿐이었다.

“강 본부장님.”

“말하게.”

결국 김 실장은 끓어오르는 분노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앉아 있는 강 본부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리 제가 HS 엔터 소속이라고 해도,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말에 강 본부장은 들고 있던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탁.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김 실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뭐 어쩔 건데?”

“…….”

강 본부장은 김 실장의 어깨에 손을 턱 내려놓으며 입꼬리를 휘었다.

“그냥 가만히 있어. 넘어가라고. 김 실장은 내가 알아서 잘 챙겨줄 테니까.”

***

“뭐라고?”

김 실장의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백영훈이랑 이 실장이 직접 윗선에 이야기를 한 것 같아.”

김 실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고.

“광고 금액도 우리보다 낮추고, 계약 기간은 늘렸단다.”

그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설마설마하면서도.

백영훈이 아닌, 파워발란스 쪽에서 백영훈을 모델로 요청했을 거라 예상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지.

지난번 백영훈이 드라마 주연에 캐스팅이 되었을 때의 그 표정.

그날 이후로 백영훈이 어딘가 싸하다는 느낌에 뭔가 한 번 일을 저지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게 이렇게 광고를 채가는 일일 줄은 몰랐다.

김 실장은 주먹이 터질 듯이 쥔 채 읊조렸다.

“이 실장 X친 놈이….”

“아니지, 형. 백영훈… 이 자식이 뭔가 음흉하다 싶었더니만. 결국, 이렇게 한 번 터질 줄 알았어. 그게 배역이 아닌, 광고를 빼앗을 줄은 몰랐지만.”

나는 백영훈의 가식적인 웃음이 생각나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리고 김 실장은 연신 한숨을 내쉬며 입을 꾹 닫아버렸다.

그렇게 몇 분의 고요함이 이어졌고.

김 실장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희성아, 내가 어떻게든 되돌려볼게.”

이미 그가 홍보팀의 한 팀장에게도.

그리고 쉽사리 찾아가기 힘든 강 본부장에게도 다녀온 것을 알고 있었다.

이건 내 일이었고, 백영훈이 그렇게 빼앗고 싶어 하는 주체도 나라는 것을 알기에.

그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내가 해볼게.”

내 말에 김 실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썹을 들썩였다.

“어떻게 하려고?”

그와 마주친 두 눈.

김 실장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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