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18 – 더 어울리는 사람 (3)
한참의 휴가를 즐긴 후 오랜만에 찾은 회사.
사실 예정보다는 굉장히 짧은 휴식으로 끝이 났다.
갑자기 광고 섭외가 들어온 덕에 서둘러 미팅을 하러 회사에 나오게 되었고.
그 길이 너무나도 설레고 떨려왔다.
내게 온 첫 번째 광고.
더군다나 등산복, 스포츠 의류 광고라는 사실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등산복 광고는 배우 중에서도 확실히 라인업이 세다는 것으로 유명했다.
당대 수많은 스타 중 핫하다고 공인받은 거나 다름없는 스포츠 의류 모델.
그 모델로 섭외가 됐으니, 쉬는 것 따위는 전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내게는 아직 휴식보다는 일이 먼저였으니까.
“희성아, 얼마 못 쉬어서 어떻게 해?”
김 실장이 눈썹을 늘어뜨리며 물었다.
“아니, 애초에 길게 쉬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그리고 이런 좋은 기회가 왔는데, 당연히 바로 달려와야지.”
“하하, 그건 그래. 드디어 첫 광고라니. 내가 다 기대된다.”
김 실장은 자신이 광고를 찍는 것처럼 기뻐했고.
나도 그의 모습에 절로 뿌듯한 미소가 지어졌다.
“미팅 들어가기 전에, 브랜드 광고랑 사진 좀 보고 들어가자.”
“좋아.”
미리 브랜드에 관한 자료를 준비해왔고.
우리는 회의실에 나란히 앉아 파일을 살펴보았다.
파워발란스.
한국에서 만든 등산복, 스포츠 의류 브랜드로 초반에는 남성 모델만 있었다.
하지만 점차 브랜드가 유명해지기 시작하자, 몇 년 전부터는 늘 남성과 여성 한 명씩 모델을 짝지어 계약했다고 한다.
그만큼 여성 스포츠 의류에도 비중이 커지기 시작했고.
당연히 매출 또한 천정부지로 오르는 브랜드였다.
몇 년간 찍었던 모델들의 지면 광고를 바라보며, 다시 심장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이들과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할 모델, 배우가 됐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광고라는 건 그동안 보기만 했지, 내가 모델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파워발란스 모델이 되면 이제 희성이 옷이며 신발, 다 파워발란스 거로 신고 입겠다. 하하.”
김 실장이 사진 속 모델의 착장을 보며 말했고.
그의 말에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당연하지. 앞으로 내 옷장이랑 신발장은 다 파워발란스로 꽉꽉 채울 거야. 하핫.”
“아무튼, 너무 잘 됐다. 오늘 미팅은 우리 회사 홍보팀이랑 파워발란스 쪽 직원 몇 명만 와서 같이 이야기할 거야.”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물었다.
“그럼 광고 모델 기간은 어떻게 되는 거야?”
“그걸 오늘 미팅 때 정할 거야. 기간을 얼마나 하는지, 광고비는 얼마인지, 다른 세세한 것들까지.”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부릅뜨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흐른 뒤,
“옆에 큰 회의실로 옮기자.”
“응.”
김 실장과 함께 자리를 옮겨 들어간 회의실.
회의실에는 HS 엔터의 홍보팀 한성민 팀장과 조아현 사원이 앉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그들에게 허리를 접으며 인사했고.
한 팀장과 조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인사에 답했다.
“안녕하세요, 희성 씨.”
홍보팀인 그들과는 교류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한 팀장은 지금껏 회사에서 두 번 정도 마주친 적이 있고.
조아현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한 팀장은 누가 봐도 HS 엔터에 오래 터를 잡았던 티가 물씬 풍겼고.
그에 반해 조아현은 사회생활을 시작한 게 얼마 되지 않았다는 신입의 느낌이 들었다.
화려한 화장,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는 긍정적인 태도가 딱 사회 초년생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온 파워발란스의 직원들.
우리는 서로 인사를 주고받으며 자리했다.
초반의 어색한 분위기가 살짝 풀어진 후.
본론으로 이야기가 넘어갔다.
“우선, 계약 기간은 6개월로 하시죠.”
6개월이라는 계약 기간은 광고 계약에서 짧은 편에 속한다.
“해보시고, 괜찮으면 저희는 더 연장할 생각입니다.”
파워발란스 쪽의 직원이 입을 열자, 한 팀장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좋습니다. 진희성 배우는 앞으로 쭉쭉 연기를 이어가니까, 분명 계약 연장하실 겁니다. 하하.”
한 팀장의 영업적 멘트와 너스레로 회의실에는 미소가 번졌고.
“저희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광고도 희성 배우님이 잘되셔야 서로 윈윈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파워발란스 직원이 웃으며 가져온 서류를 바라보다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광고비는 1억이고.”
그의 말에 나는 입이 떡 벌어졌지만, 서둘러 표정을 감춰냈다.
…대박.
진짜 광고료가 세다고 하더니, 6개월 광고 계약에 1억이라니.
흥분된 가슴을 겨우 누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촬영은 3회, 라이브 방송 출연은 1회. 이렇게 진행할 예정입니다.”
한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받았다.
“그럼 저희 내부에서 검토해 보겠습니다.”
“예, 그럼 다음 미팅 일정은 저희 직원 통해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광고로 인한 첫 미팅은 성황리에 끝이 났다.
파워발란스 직원들이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한 팀장과 조아현, 김 실장과 나 이렇게 넷만 남은 회의실.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나에게 향했다.
“조건은 괜찮은 거 같고, 희성 씨만 오케이하면 다음 미팅을 진행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한 팀장이 말을 내뱉자마자 곧장 답했다.
“저는 무조건 오케이죠!”
“예, 그럼 저희가 계약 조건을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한 뒤에 미팅 날짜 잡겠습니다.”
그의 말에 김 실장이 입을 열었다.
“네, 팀장님. 감사합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
미팅을 모두 마친 뒤, 김 실장과 나는 항상 연습하던 회의실로 향하고 있었다.
회의실로 들어와 문을 닫자마자 김 실장이 손뼉을 연신 부딪쳤다.
“희성아, 진짜 축하한다.”
“하하, 갑자기 새삼스럽게 축하는.”
김 실장에게 손사래를 치고 있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첫 광고.
첫 광고주와의 미팅을 마치고 나자, 나 역시 이제야 실감이 들었고.
계속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제 다음 미팅을 잡고, 도장만 찍으면… 끝난다.
기쁜 마음과 동시에 불현듯 작품을 떠올렸다.
광고만 기다리며 놀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자리에 앉아 김 실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형, 새로 들어온 대본은 없나?”
그러자 그가 입을 떡 벌리며 답했다.
“저번에 메일로 보내줬잖아. 그거 벌써 다 읽었어?”
지난번 좀비 꿈을 꾸고 난 후 요청했던 대본들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에이, 그건 그날 바로 다 확인했지.”
“너도 대단하다. 천천히 시작해도 되는데….”
그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더니, 이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다. 계약한 광고가 나올 때쯤에, 드라마도 방영하면 진짜 딱이겠네.”
김 실장의 눈이 반짝거렸고.
나 역시 그의 말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래, 그게 진짜 윈윈이네.”
“응, 6개월 광고 찍고, 그 정도면 바로 계약도 연장될 수 있어.”
우리는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웃음을 터트렸다.
지이잉.
그때 울리는 김 실장의 전화.
그는 휴대 전화를 확인한 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희성아, 잠깐만 쉬고 있어. 나 전화 좀 받고, 대본 정리해서 올게.”
“응, 천천히 갔다 와.”
김 실장은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닫혀 있던 회의실 문이 재차 열렸다.
“형, 벌써 왔어?”
문소리에 휴대 전화를 보느라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바라보니.
문 앞에서 손짓을 하는 사람은 김 실장이 아닌.
송유나였다.
“어, 유나 씨가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그녀는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눈을 하늘로 치켜뜨며 말했다.
“위에서 좀 봐요.”
인사도 하기 전에 송유나는 다짜고짜 나를 불러냈고.
그대로 그녀는 회의실을 등진 채 멀어져 갔다.
“뭐야, 무슨 일인지 설명도 안 하고….”
하지만 그녀가 나를 이렇게 부른 건 처음이었기에.
분명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에 그녀를 따라 올라갔다.
테라스에 도착하자 송유나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군가가 있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주변을 살피는 모양이다.
들어오면서 이미 안을 훑었기에, 그녀에게 말했다.
“아무도 없어요.”
“아….”
송유나는 이내 팔짱을 끼고 안경을 추켜올렸다.
긴 머리에 푹 눌러쓴 모자.
알이 없는 커다란 뿔테 안경.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촬영을 위해 회사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에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근데 무슨 일이에요?”
송유나와 단둘이 이야기를, 특히나 그녀가 먼저 나를 부른 것은 처음이었기에.
너무나도 이유가 궁금했다.
혹시 그날 캠핑장에서 있었던 일의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이렇게 찾아온 건가?
그런 거라면 굳이 이렇게까지 찾아올 필요는 없는데….
내 말에 송유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저번에 산에서 있었던 일 말이에요.”
역시나.
그녀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아, 그건 저번에 라면으로 보답….”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송유나가 어깨를 들썩였다.
“그거 비밀 지키라구요.”
“네?”
“절대 어디에 새어 나가지 않게, 비밀 꼭 지켜요.”
“아….”
그녀의 말에 나는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정말 예상 밖이었다.
뭐, 항상 송유나가 예상 내에 있던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감사 인사가 아닌, 비밀을 유지하라고 나를 찾아왔다는 사실에 이내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것 때문에 오신 거예요?”
“회사에 겸사겸사 볼일도 있고… 아무튼, 반드시 비밀 지켜요.”
송유나의 눈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고.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예, 그럼요. 비밀… 꼭 지킬게요.”
그녀는 그대로 모자를 꾹 누르며 나를 지나쳐 갔다.
정말 이 이야기를 하러 여기까지 온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가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참… 송유나는 한 치도 알 수가 없네.’
***
매일 대본을 보러 회사로 출근했고.
어느덧 매일 출근하게 된 지도 일주일의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형, 근데 우리 광고 다음 미팅 일은 언제래?”
김 실장이 내 말에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방금 홍보팀 다녀오는 길이야.”
“뭐래?”
그는 내 물음에 대답 대신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왜, 뭔데?”
재차 그를 향해 묻자, 김 실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읊조렸다.
“미팅… 일시 보류됐대.”
그의 말에 나 역시 얼굴이 일그러졌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나도 모르겠어. 하필 오늘 한 팀장님이 월차를 내서 연락이 안 되길래 같이 미팅 참여했던 조아현 씨한테 확인했거든.”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당장 미팅을 잡고, 계약만 하면 바로 광고를 찍는 줄 알았건만.
갑자기 이렇게 미팅 보류라니.
내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김 실장이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되겠다. 다시 확인 좀 하러 다녀올게.”
그는 홍보실을 가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나 역시 그를 따라 움직였다.
“같이 가.”
곧장 찾아간 홍보실에 역시나 한 팀장은 없었다.
조아현은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놀란 눈으로 고개를 당겼고.
그녀와 우리는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 실장님, 주말 지나면 한 팀장님이 출근하시는데, 그때 확인을….”
그녀의 말에 김 실장은 한숨을 참아내며 물었다.
“그래도 아현 씨도 아실 거 아니에요. 대체 이렇게 갑자기, 왜 미팅이 보류된 겁니까?”
“그게… 저는 말씀을 드릴 수가….”
그녀의 말투, 행동, 표정에서 뭔가 이유를 알고 있는 듯 보였고.
나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현 씨는 아시잖아요. 저는 광고 미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보류라니까. 이유라도 좀 알고 싶어서요.”
그녀는 내 말에도 입을 꾹 닫았다.
“제 인생의 첫 광고였는데… 이유라도 조금만 알려주실 수는….”
조아현과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입술을 말아 넣은 채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휴대 전화를 열며 입을 열었다.
“하아…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그녀가 내민 휴대 전화에는 파워발란스 직원들과의 단체 톡방이 있었고.
그 내용은 모델 계약과 관련된 대화의 일부였다.
파워발란스 직원: 오! 그렇게 파격적인 조건으로요?
한 팀장: 네, 근데 모델은 진희성 배우가 아니라, 백영훈 배우로 바꿨으면 합니다.
파워발란스 직원: 아, 그때 말씀하셨던 배우가 백영훈 님이신 거죠?
한 팀장: 예, 맞습니다. 가능하실까요?
파워발란스 직원: 아마 가능할 겁니다. 어제 통화로 미리 말씀해 주셔서, 모델 교체 건은 회사에 확인해 뒀습니다.
한 팀장: 그럼 우선 진희성 배우와의 계약은 보류해두는 거로 하겠습니다.
파워발란스 직원: 네, 계약서 수정하고 있겠습니다.
대체… 이게 뭐야.
백영훈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