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18 – 더 어울리는 사람 (2)
“송유나 씨…?”
“뭐야, 진희성… 희성 씨가 여기에 왜 있어요?”
송유나는 호랑이라도 발견한 듯 흠칫 놀란 얼굴로 경기를 일으키듯 떨었고.
서둘러 그런 그녀에게 나는 손을 건넸다.
“우선 저쪽으로 가서 이야기해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
송유나의 옷에는 풀과 흙이 잔뜩 묻어 있었고.
앞뒤 상황을 듣기도 전에 그녀의 상태가 걱정되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잠시 뒤, 송유나와 함께 텐트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내가 챙겨온 담요를 어깨에 두른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따뜻한 차 좀 드릴까요?”
“…….”
그녀는 내 말도 들리지 않는지 멍하니 피어오르는 불을 바라보았고.
그런 그녀에게 재차 묻지 않은 채 따뜻한 물을 컵에 따라 하나 남은 티백을 우려냈다.
“여기 이거라도 좀 마시고, 차분하게 진정을….”
꼬르륵.
그때 들려오는 그녀의 배꼽시계.
“맞네. 밥도 못 먹었겠다.”
따뜻한 차를 건네려 했지만,
그녀의 꼬르륵 소리에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저녁을 이미 해먹어 버려서, 온전한 음식은 없고. 고기 좀 남았는데, 그거라도 괜찮아요?”
내 말에 송유나는 뾰로통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됐어요.”
하지만 말과 달리 그녀의 배 속은 음식을 요구하듯 우렁찬 소리를 내고 있었다.
꼬르륵!
“흠흠.”
송유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양손으로 배를 부여잡았고.
그 모습에 피식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아무 말 없이 남은 고기를 꺼내 불판에 올렸다.
치이익.
고기가 익어가자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고.
의자에 기대고 있던 송유나의 몸은 어느새 불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불이 세서 금방 익으니까, 조금만 참아요.”
“뭐, 별로 배는 안 고픈데….”
도도한 얼굴로 말한 송유나는 입맛을 다시듯 혀를 날름거렸고.
그런 그녀의 행동에 나는 입꼬리를 옅게 올렸다.
익은 고기는 불판에서 빠르게 사라졌고.
정신없이 고기를 흡입하던 송유나가 이성을 찾을 때쯤.
그녀에게 캔 맥주를 보이며 물었다.
“한잔할래요?”
송유나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녀의 대답에 난 맥주 캔을 뜯어 한 입 가득 부었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차디찬 맥주.
꿀꺽 넘어가는 소리에 송유나는 입맛을 다셨고.
그러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캔 맥주를 하나 가져와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크으!”
우렁차게 외치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뒤로 우리는 멍하니 타오르는 불을 함께 바라보았고.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그녀를 향해 물었다.
“근데… 어쩌다가 거기에 있었던 건지 물어봐도 돼요?”
송유나와 함께 이곳에 있은 지 한 시간이 훌쩍 넘었고.
그녀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녀 역시 내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고, 평소 그녀가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나 또한 재촉하지 않았지.
그러나 송유나가 이곳에, 더군다나 톱 배우인 그녀가 이 한밤중에 산에 홀로 있다는 게 너무나 궁금했다.
단지 궁금증 해소가 아니라, 그녀의 앞뒤 상황이 걱정되는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내 말에 송유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원래 혼자 등산하는 거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문득 떠오른 예전의 기억.
김 실장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녀가 휴식을 취할 때, 흔히들 해외여행이나 예쁜 카페, 호캉스를 하는 줄 알지만.
인적이 드문 시골 마을에서 힐링을 하거나 등산을 한다고 했던 말.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붉게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오늘은 왠지 꼭 일몰을 찍고 싶어서, 일찍 산에서 안 내려가고 버티다가….”
송유나는 그때가 생각이 나는지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앞으로 조금 더 가서 사진 찍다가 휴대폰을 절벽 밑으로 떨어뜨렸어요.”
그녀의 말에 놀라 고개를 돌려 송유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휴대 전화 주우려다가 유나 씨도 절벽으로 떨어진 거예요?”
“…뭐, 엄청 심한 절벽이 아니라 살짝 아래에 있던 거 주우려 한 건데 발을 헛디뎌서….”
그녀의 몸을 빠르게 훑어보며 물었다.
“다치지는 않았어요?”
그녀는 내 말에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고.
“그냥 살짝 구르기만 했는데, 해가 지니까 너무 어두워져서 길도 못 찾고 헤매고 있었죠.”
산길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을지 감히 상상이 되지 않았지만.
나였어도 덜컥 겁이 났을 텐데, 송유나가 아까 그 풀숲에서 벌벌 떨고 있었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쓰였다.
걱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서로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고개를 당기며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그 눈빛은?”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투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혼자 산에서 길 잃고 있었다니까, 무서웠겠다 싶어서요. 그래도 제가 바로 발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송유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게 고맙다거나 감사의 표현, 자신이 무서웠다는 속마음조차 말하지 않았다.
물론 송유나에게 인사를 듣기 위해 한 것은 아니지만.
당연하다는 듯 눈썹을 들썩이며 맥주를 들이켜는 그녀를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송유나가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기는 하지.
시간은 어느덧 10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었고.
나는 하나밖에 없는 텐트를 바라보며 그녀에게 말했다.
“저… 오늘은 늦어서 산에서 못 내려갈 텐데, 저기 텐트에서라도 주무실래요?”
송유나는 고개를 쓰윽 돌려 텐트를 바라보았고.
그런 그녀를 향해 재차 입을 열었다.
“아, 물론 저는 그냥 침낭으로 밖에서 자고요. 혼자 캠핑 온 거라 다 1인용으로만 가져와서….”
이내 송유나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당연히 내가 텐트에서 자는 거 아니었어요?”
“아….”
도도한 눈빛으로 말하는 그녀의 태도에 나도 모르게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렇게 대화가 단절되었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각자 맥주를 홀짝홀짝 들이켰다.
“근데 유나 씨는 요즘 계속 쉬시는 거예요?”
송유나는 마지막 작품 이후로 몇 달을 쉬고 있었다.
“당분간은 일 생각 없어요. 그냥 좀 쉬려고요.”
“그러시구나.”
내가 질문을 던지면 그녀는 바로 답을 했지만, 내게로 돌아오는 질문은 없었다.
툭툭 끊기는 대화.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색하거나 불편한 느낌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편안하기까지 한 느낌이었다.
평소라면 대화가 끊기지 않도록 노력했을 터.
송유나와 이제 몇 번 본 사이라 그런가?
아니면 캠핑이라는 특수한 장소 탓인가?
그렇게 송유나와의 의도치 않은 첫 캠핑의 밤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
짹짹.
산속에 있는 캠핑장이기에, 세게 내리쬐는 태양과 산새들이 눈과 귀를 괴롭혔고.
결국,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뜨고 말았다.
“흐아아.”
겨울이 아니라서 아무리 춥지 않은 날씨라 하더라도.
산속에서 보내는 하룻밤은 꽤 쌀쌀했다.
특히나 텐트도 아닌, 침낭에서만 보낸 밤이었기에.
침낭 안에서 찌뿌둥한 몸을 살살 움직이며 일으켰고.
지퍼를 열자 알에서 깨어난 듯 몸이 자연스레 펴지기 시작했다.
킁킁.
그때 코를 자극하는 매콤한 냄새.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어제 분명 주변에서 캠핑하는 사람들은 없었는데….
아침부터 새로 온 사람들인가?
퉁퉁 부은 눈을 겨우 뜨고 앞을 바라보자, 송유나가 서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 흠칫 놀라자, 그녀가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놀라요?”
“아…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벌써 일어나셨어요?”
“뭐, 그냥 눈이 떠지던데.”
송유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답하고는 턱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녀를 따라 내 고개도 움직였고, 송유나가 가리키는 곳은 다름 아닌 팔팔 끓고 있는 냄비였다.
그 냄새에 이끌려 몸을 일으켜 다가갔고.
송유나가 일찍부터 분주하게 움직여 만든 건, 라면이었다.
식량 상자를 열어 라면을 찾아 끓인 모양이다.
서둘러 라면 앞에 젓가락을 들고 자리를 잡았다.
“유나 씨도 드세요.”
그녀에게 젓가락과 그릇을 내밀자, 송유나가 건네받으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내가 끓인 건데, 나도 당연히 먹죠.”
송유나의 답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도도한 그녀의 말투는 어느샌가 내게 익숙해져 버렸다.
이제는 놀랄 것도 없이, 그녀의 차가운 대답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정신없이 라면을 흡입했고.
푸르른 산속, 차디찬 아침 공기에 먹는 뜨거운 라면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뭐, 물 양이 조금 맞지 않아 살짝 싱거웠지만.
그 또한 그것대로 좋았다.
“우와, 진짜 맛있는데요?”
내 말에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라면을 입에 넣었다.
순식간에 두 봉지의 라면이 냄비에서 사라졌고.
나는 빈 그릇과 냄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송유나가 물을 마시며 읊조렸다.
“어제 여기서 재워주고, 구해줘서….”
“네?”
그녀의 작은 목소리 탓에 내가 눈썹을 움찔거리며 되묻자, 그녀가 나를 곁눈질로 바라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밥값, 이걸로 난 어제 일 보답한 거예요.”
당차게 외치는 그녀의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이 정도의 말이라면, 송유나가 내게 충분히 고마움을 표현한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캠핑장을 나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유나 씨, 이제 정리하고 갈 건데, 태워 드릴게요.”
“아니요. 저 전화 좀 빌려줄래요?”
그녀의 말에 내 휴대 전화를 건넸고.
송유나는 그의 매니저에게 전화를 거는 듯 보였다.
휴대 전화를 산에서 잃어버린 송유나는 쉽게 그걸 두고 갈 수가 없을 터.
수많은 연예인 연락처와 개인 사진, 회사 정보들이 그 안에 다 있을 테니까.
짧은 통화를 마친 그녀는 내게 휴대 전화를 내밀었고.
나는 소매를 걷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매니저님 오신대요?”
“바로 온다고 하니까, 희성 씨 먼저 가요.”
“아… 그럼 저도 같이 찾아봐 드릴게요.”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먼저 가세요. 저 매니저 오빠랑 둘이 하면 돼요.”
“그래도….”
“더 신세 지고 싶지는 않아서요.”
송유나의 말투와 표정은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닌 듯 보였다.
진심으로 내가 남지 않기를 바라는 그녀의 태도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위험하니까, 실장님 오시면 바로 갈게요.”
송유나는 내 말에 어깨를 으쓱이며 부정하지는 않았다.
***
송유나의 매니저는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고.
그들과 짧은 인사 후에야 캠핑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많았던, 나 홀로 첫 캠핑.
아니, 나 홀로 캠핑은 아니라고 해야 하나?
운전대를 잡은 채 전날을 회상하던 그때.
지이잉.
[발신인: 김지훈 실장]
“여보세요?”
-희성아.
“뭐야, 쉬라고 하더니만. 오늘은 형이 먼저 전화한 거다?”
내 말에 김 실장이 웃음을 터트리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무슨 일 있어?”
그의 목소리에 나는 귀를 쫑긋 세웠고.
김 실장은 숨을 고르게 내쉬며 입을 열었다.
-크으, 희성아. 진짜 축하한다.
“축하?”
그의 말에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김 실장은 데시벨을 올려 소리쳤다.
-너, 광고 들어왔어!
그의 말과 동시에 마침 신호에 걸렸고.
갑자기 세차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그에게 물었다.
“광고… 무슨 광고가 들어와?”
-우리 등산복 광고 들어왔어.
좀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김 실장의 목소리에 나 역시 덩달아 가슴이 터질 듯했고.
깊게 호흡을 내뱉으며 탄성을 내질렀다.
“…광고라니, 대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