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17 – 결국 살아남는 게 이기는 거야 (5)
통장에 정산이 된 다음 날.
두둑해진 통장으로 내가 제일 먼저 향한 곳.
다름 아닌 입금을 해준 HS 엔터였다.
“뭐야. 희성아, 회사에는 무슨 일이야?”
김 실장은 귀신을 보듯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고.
그를 향해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설마… 너 또 대본 보려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는지 곧장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아니야. 형 보러 왔어.”
“나?”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김 실장을 향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김 실장과 함께 올라온 옥상 테라스.
커피 한 잔씩을 손에 들고 온 우리는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이야, 여기는 언제 올라와도 좋다.”
산뜻하게 부는 바람.
HS 엔터의 자랑으로 불릴 만큼 잘 가꾼 테라스는 꽃들과 작은 나무들로 푸르러 있었고.
바람에 흩날리는 풀 소리는 도심 한복판에 있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다.
“맞아. 여기는 가끔 힘들거나 지칠 때 오면 힐링되더라.”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며 말했다.
“이상하지. 회사 일로 스트레스 받은 건데, 회사에서 힐링을 한다는 게….”
김 실장의 말에 고개를 돌려 그에게 물었다.
“그 말은… 일하면서 나 때문에 스트레스 받았다는 거지?”
그러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내가 너랑 일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았겠냐?”
활짝 웃으며 아니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잘 맞는 사람과 있어도, 그게 ‘일’이라면 그렇지 않을 때도 있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김 실장 또한 쉬지 않고 나와 함께 달렸으니.
힘들 때도 있었을 터.
그의 말에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형, 항상 잘 챙겨주고, 도와줘서 고마워.”
“에이, 그게 내 일인데, 낯간지럽게 고맙기는.”
“그래도. 아무리 형의 일이라고 해도 힘들 때가 있을 테니까.”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 나름 성격 더러운 연예인들 많이 겪어봤어. 너 같은 연예인의 매니저로 있다면, 평생도 할 수 있다. 하하.”
그의 입꼬리가 옅게 올라가 있었고.
동그랗게 뜬 눈에서는 진심이 묻어나왔다.
오히려 더 고마운 건 나였다.
아무리 내가 쉬지 않고 연기를 하며, 위로 오른다고 하더라도.
곁에서 잘 케어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테니까.
그와 난간에 기대어 동시에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HS 엔터 처음에 왔을 때, 여기가 제일 마음에 들었는데. 여전히 너무 좋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바람을 느끼며 커피를 들이켰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손에 들고 있던 커피의 온도가 식어갈 때쯤.
김 실장이 몸을 돌리며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오늘 회사에는 왜 온 거야?”
“형 보러.”
재차 회사에 온 이유를 말했지만, 그는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흘겨보았고.
그의 표정에 실소를 터트렸다.
“진짜 형 보러 왔어.”
그러자 의심이 가득 담긴 눈초리를 한 김 실장이 물었다.
“집에 있기 심심하디?”
순간 정곡을 찔렸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뭐… 갑자기 너무 오랜만에 쉬려고 하니까, 막상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진짜?”
한 톨의 거짓도 없는, 진짜 사실이었다.
연기를 하겠다고 서울에 올라온 뒤, 한 번도 여유롭게 쉬어본 적이 없었지.
배역이 없는 날은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고.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배역이 생긴 날에는 곧장 현장으로 뛰어나가고는 했으니까.
더군다나 HS 엔터에 들어온 이후, 드라마나 영화 촬영이 끝나면 바로 새로운 대본을 찾기에 바빴다.
그렇게 최소한의 휴식도 갖지 않고 바로 현장에 투입되기 위해 한참을 달리다 보니.
내가 연기나 연습 말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지.
그래서 생각난 게 김 실장이었다.
“친구라도 좀 만나서 쇼핑도 하고 술도 마시고 하지.”
그의 말에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알잖아. 서울에는 친구가 별로 없어.”
그는 내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고향은, 부모님도 뵙고 와. 쉬었다가 또 연기 시작하면 가고 싶어도 갈 시간이 없을 거야.”
“안 그래도, 곧 본가 내려갔다가 오려고.”
그리고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형은 오늘 뭐 해?”
“오늘… 뭐 별거 없어. 회사에서 하던 일만 마무리하면 끝이야.”
“그럼 나 연기 시작할 때까지 쉬는 거야?”
내 말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간을 찡긋거렸다.
“나도 그럼 얼마나 좋겠냐만… 내일부터는 다른 연예인 매니저 대타 좀 뛰어야 해. 회사에서 나 월급 주면서 그냥 쉬게는 안 놔두지.”
김 실장이 어깨를 들썩였다.
“근데 왜?”
“그럼 오늘 저녁이나 같이 먹자.”
“그러자.”
대답과 함께 휴대 전화를 바라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어제 정산도 됐고… 내가 맛있는 거 살게, 형.”
“하하, 좋지.”
“술도 한잔할까?”
그는 입맛을 다시며 미소를 지었다.
“너무 좋지. 그럼 차 두고 가야겠다.”
***
밝은 우드 색으로 장식된 벽면.
우리가 앉은 높은 바 체어.
앞에는 긴 좌석이 있었고, 그 안에는 하얀 조리모를 쓴 셰프가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늘 예약하신 진희성 님 맞으시죠?”
직원의 말에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로 오마카세 코스 준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 실장이 곧장 내게로 몸을 기울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뭐야, 가볍게 먹는 건 줄 알았는데. 오마카세라니. 여기 엄청나게 비싼 데잖아.”
나는 그를 향해 손을 뻗으며 작게 읊조렸다.
“괜찮아, 형. 나 이번에 정산 받았잖아.”
그는 서둘러 휴대 전화로 식당 이름을 검색하더니.
“허어!”
이내 입을 떡 벌렸다.
“희성아, 그래도 여기는 너무 비싸.”
“이번 드라마 촬영 내내 수고했잖아. 형한테 고마워서 좋은 밥 한 끼 사고 싶었어.”
“야, 그건 원래 내가 해야 할 일이잖아. 여기는 너무 비싼….”
중간에 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오늘 나랑 놀아주는 친구 비라고 하자, 그럼.”
내 너스레에 그는 못 말리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어휴, 알겠어. 아무튼, 잘 먹을게.”
“하하, 얼른 먹자.”
몇 번의 초밥이 이어 나왔고.
시원한 생맥주가 김 실장과 내 앞에 놓였다.
“크으, 진짜 참치가 입에서 사라져버릴 정도로 녹는다, 녹아.”
“그러네. 진짜 맛있다.”
김 실장과 함께 한 점씩 먹을 때마다 감탄사를 빼놓지 않았다.
“확실히 비싼 값을 하네. 이렇게 맛있는 초밥은 처음 먹어보는 것 같은데?”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우리의 잔은 허공에서 짧게 부딪쳤다.
“그래서 희성이 너 이제 뭐 할 거야?”
“음… 글쎄.”
“또 회사 출근해서 일할 생각은 아니지?”
걱정이 가득 담긴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형, 나 이번에 차 한 대 사려고.”
놀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뜬 김 실장이 내게 되물었다.
“차?”
“응, 국산 차로 한 대 뽑으려고.”
김 실장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답했다.
“아니, 그냥 비싼 거로 뽑지.”
“왜?”
“그래도 연예인 이미지가 있잖아. 급도 높아 보일 거고.”
나는 허공에 손을 가로저으며 말했다.
“에이, 됐어.”
그리고 곧장 얼굴의 웃음기를 없애고 그를 바라보았다.
“형, 나중에 차 나오면, 주차 연습하는 거나 좀 도와주라.”
“너… 주차 못 하냐?”
김 실장의 말에 나는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잘게 끄덕였다.
“주차만… 딱 주차만 못 해.”
그는 웃음을 터트렸고.
나는 서둘러 앞에 놓인 후토마키를 가리켰다.
“우와! 후토마키 엄청 크다. 형, 빨리 먹어.”
그렇게 우리의 식사 자리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
“진짜 잘 먹었다.”
김 실장이 터질 듯 튀어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형을 좋은 데 처음 데리고 온 것 같아서 미안하네. 앞으로 종종 오자.”
내 말에 그는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아니야. 이런 데는 가끔씩 와야 맛있지.”
“그럼 다음에 작품 끝나면 또 오자.”
“하하, 그래. 나야 좋지.”
서둘러 계산을 한 뒤, 식당을 나왔다.
“간단하게 맥주라도 한잔 더 하고 싶은데. 좀 아쉬운데?”
김 실장이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 내일 다른 연예인 매니저 대타 뛰어야 한다며.”
“그렇긴 해.”
“그럼 다음에 또 한잔하자.”
그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뚝뚝 흘러넘쳤고.
김 실장 역시 다음 날 일찍 연예인 픽업을 가야 했기에, 그 마음을 겨우 눌러내는 듯 보였다.
“어쩔 수 없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김 실장.
그는 빠르게 눈을 굴렸다.
“…형.”
그때, 미리 준비해온 봉투를 안주머니에서 재빨리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거.”
“뭐야, 이게?”
김 실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손에 들려 있는 봉투를 바라보았고.
하얀 봉투 사이로 비치는 것을 바라보자 미간을 찌푸렸다.
“됐어, 인마.”
“형, 받아. 내가 진짜 고마워서 그래.”
김 실장은 얼굴을 파르르 떨 듯이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고.
그런 그의 손에 봉투를 강제로 쥐여 주듯이 밀었다.
그러자 그 역시 봉투를 내 손으로 강하게 밀어냈다.
“희성아, 나 이거 받으면 너랑 일 못 해.”
김 실장의 말은 거짓 섞인 말투가 아니었다.
정말 내가 건넨 돈에 당황한 표정이 드러났다.
하지만 나 역시 다시 이 돈을 거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이, 형. 받아줘.”
이번에는 봉투를 빼앗아 그의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내가 내 매니저 안 챙기면, 누가 챙겨.”
“그래도….”
말을 흐리는 김 실장에게 너스레를 떨 듯 웃으며 답했다.
“형, 나도 여유 있을 때나 줄 수 있는 거니까 받아줘. 매번은 못 준다? 하하.”
내 말에 그제야 김 실장도 웃음을 터트렸다.
“아, 매번은 못 주는 거야? 하하하.”
우리는 결국 농담으로 상황을 풀어냈고.
그럼에도 김 실장은 주머니 속 봉투를 꺼내 내게 건넸다.
“희성아, 마음은 정말 고마운데, 그래도 오늘 비싼 밥 먹은 거로….”
연신 거절하는 김 실장이었지만.
나 또한 김 실장의 말을 재차 거절했다.
“형, 앞으로 나 좀 더 잘 케어해 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내 말에 김 실장의 손이 멈칫했지만.
다시금 봉투를 그에게 내밀며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도 나, 잘 부탁해.”
이내 그의 눈은 초롱거리듯 반짝였고.
눈썹이 역 팔자로 길게 휘어졌다.
내 말이나 돈, 이런 것보다도 자신을 생각해 준다는 것 자체에 감동을 받은 모양이다.
“희성아, 고맙다.”
“내가 더 고맙지.”
연예인을 먼저 보내야 한다며, 김 실장은 나를 택시에 태워 보냈다.
택시에 올라타며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형, 조심히 들어가.”
“너도.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전화하고.”
“아휴, 알겠어. 얼른 형도 집 들어가.”
끝까지 걱정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탁.
택시 문이 닫히고, 곧장 차는 액셀을 밟았다.
그제야 나는 몸을 의자에 기대었다.
오늘 처음으로 통장에서 뺀 돈은 500만 원.
그대로 100원도 빼지 않고, 봉투에 넣어 김 실장에게 보냈고.
잔고는 500만 원이 줄었지만, 마음은 너무나도 뿌듯했다.
돈을 썼는데도 이렇게 행복할 수가 있을까?
눈을 지그시 감고 입꼬리를 길게 휘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김 실장에게 더 주고 싶었다.
돈으로 모든 걸 할 수는 없지만, 고마움을 표시할 수는 있으니까.
그리고 이내 허벅지에 올리고 있던 손은 자연스레 불끈 주먹을 쥐었다.
더… 더 잘나가고 싶다.
그래서 내 주변 사람들에게 더 많이 베풀며 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