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17 – 결국 살아남는 게 이기는 거야 (4)
“안녕하십니까.”
김 실장의 전화를 받은 후 곧장 달려간 회사.
안에서 날 반기는 건, 임 대표가 아닌 김 실장이었다.
“희성아, 왔어?”
“응.”
그는 웃으며 내게 손짓을 보냈고.
아무도 없는 회의실로 향했다.
“이야, 벌써 계약 내용을 조정한다니까, 내가 다 기쁘다.”
“그러게. 원래 이렇게 중간에도 계약서를 바꾸기도 하는 거야?”
처음 HS 엔터에 들어오며 했던 계약은 3년.
벌써 도장을 찍은 지가 1년이 훌쩍 지났고.
시간이 빠르게 지나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계약 기간은 1년 반 정도가 남은 상황이었다.
갑자기 계약서를 조정해 준다는 게 너무 기쁘기는 했지만.
아직 계약서 날짜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변경하는 게 흔한 일인지 궁금했다.
내 말에 김 실장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엄청나게 흔한 일은 아니지. 근데 희성이 네 성적이 워낙 잘 나오니까, 회사에서 비율 조정을 해줘야겠다고 결정하신 것 같더라고.”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말을 이어갔다.
“어쨌든 잘된 일이지.”
그랬다.
결과적으로는 내 입장에서 본다면, 너무나도 잘된 일이다.
HS 엔터에 입사 후부터 찍은 드라마와 영화, 그리고 이번 드라마까지.
쉬지 않고 연기를 이어왔다.
그 말인즉, 꾸준히 돈을 회사에 벌어오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드라마의 시청률이 높아지고, 내 인지도가 오르면.
당연히 내 몸값도 올라갈 터.
그럼 회사에서 벌어들이는 돈도 많아진다는 말이지.
회사 윗선에서는 그런 점들을 감안하여, 내 계약 비율을 조정해 주는 모양이었다.
김 실장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전화로 내용을 전달받았을 때도 기뻤지만, 회사에 도장을 찍으러 온 이 순간의 감정은 조금 더 격해진 듯했다.
심장 박동 수는 조금씩 더 빠르게 뛰고 있었고.
그때.
회의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허리를 접었다.
“본부장님, 안녕하십니까.”
강 본부장.
회사에서 임 대표와 가장 가까운 인물이다.
그만큼 높은 직책의 임원이지.
강 본부장이 환한 얼굴로 들어와 내게 악수를 건넸다.
“아이고, 우리 희성 배우 바쁜데, 회사까지 불러서 미안하네?”
나는 그를 향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드라마 끝나고 잠깐 휴식이라 괜찮습니다.”
“그래도. 힘든 드라마 끝내고 쉬는 것도 일이지. 안 그런가, 김 실장?”
“하하, 맞습니다.”
김 실장이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웃었고.
강 본부장은 내 앞 의자를 빼내며 입을 열었다.
“김 실장?”
그는 김 실장의 눈을 바라보며 불렀고.
그 짧은 한마디에는 여러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강 본부장의 눈은 계약서가 들린 파일과 문을 빠르게 훑었고.
나와 계약 이야기를 해야 하니, 자리를 피해달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김 실장은 곧장 이해했는지, 서 있던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래.”
“희성아, 나 내려가 있을 테니까 이야기 잘 하고 나와.”
“응, 형.”
김 실장이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나와 강 본부장만이 회의실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강 본부장은 본론을 꺼내기 전 사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요즘 힘든 일은 없고?”
“예, 김 실장님이 워낙 케어를 잘해주셔서 힘든 점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 김 실장이 매니저 일도 그렇고 성격도 좋아서 희성이한테 붙여준 거야.”
“하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김 실장한테 들어보니까, 이번에는 좀 쉰다고?”
강 본부장의 선한 눈빛.
하지만 그 질문에는 가시가 있었다.
당연히 회사 입장에서는 소속 연예인이 쉬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터.
내가 움직여 돈을 벌어야 회사에서도 돈을 벌 테니까.
“예, 근데 길게는 안 쉬고….”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휴식도 좋기는 한데, 연예계가 말이야. 감이 살아 있을 때, 그리고 대중들이 원할 때 쭉 달려주는 게 가장 좋더라고.”
그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내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이 바닥 생활이 몇십 년이잖아. 몸값 올릴 수 있을 때 올리는 게 좋아.”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래서 길어야 세 달 정도?”
강 본부장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아니요. 저는 그 정도까지 쉴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
그는 놀랍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졌고.
이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또 조금만 쉬다가 일하려고?”
“네, 잠깐 리프레시 기간만 가진 뒤에 바로 작품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하하, 역시 희성이가 잘되는 이유가 있다니까?”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붙였다.
“그러니까 우리 임 대표님이 희성이를 그렇게 좋게 보셨지.”
강 본부장은 드디어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 일 이야기 좀 해볼까?”
“예.”
그의 말에 의자를 당겨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파일에서 꺼낸 것은 계약서.
기존 계약서를 먼저 꺼내 내 앞에 내밀었다.
“우리 희성이가 벌써 1년 반이나 일했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계약서 위에 손을 올려 글씨를 따라 읽어갔다.
“3년 계약을 했고, 비율이 55 대 45로 했어. 이것도 신인한테는 컸던 거 알고 있지?”
“네, 신경 써주셨던 거 알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동조하며 말했고.
그는 서둘러 기존 계약서를 파일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입꼬리를 올리며 새로운 계약서를 내밀었다.
“자, 이번에 회사에서 희성 씨 성과와 미래를 보고 계약 비율을 조정한 거야.”
나는 몸을 당겨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펜을 돌려 펜대로 계약서의 글씨를 가리켰다.
“비율은 7 대 3으로 해줄게.”
7:3.
당연히 여기서 7은 나의 몫이다.
5.5에서 7의 비율로 올라간 건 내게 좋은 일이었다.
번 돈에서 내가 가져가는 돈이 더 많아질 테니까.
그 숫자에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겨우 누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비율 7로 올려주는 거, 회사에서는 엄청나게 큰 조건인 거 알지?”
“…네.”
사실 HS 엔터가 첫 회사였기에, 비교 대상이 전무했다.
그렇다고 계약 내용을 다른 배우들과 서로 떠벌리며 공유하지는 않으니까.
그럼에도 업계에선 나 같은 신인급은 잘 받아야 6 대 4 정도라는 건 알고 있다.
내 시선은 강 본부장이 아닌, 계약서로 향했고.
“본부장님, 저 계약서 좀 읽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럼, 내용은 크게 변한 게 없어. 우리 희성이 비율 조정하는 계약서니까 말이야.”
고개를 끄덕이며 계약서를 내 앞으로 당겨왔다.
그리고 차분히 위의 글자부터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약을 많이 해본 건 아니지만, 항상 계약서는 꼼꼼히 읽어야 한다는 말이 있으니까.
강 본부장을, 그리고 HS 엔터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그의 말대로 5.5의 비율에서 내가 가져가는 비율은 7로 늘었고.
재차 그 7이라는 숫자에 심장이 떨려왔다.
고작 1.5의 숫자가 늘어난 것이지만, 막상 정산을 받을 때.
그 1.5의 비율 차이는 어마어마할 테니까.
기쁜 마음을 다잡기 위해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시선을 움직였다.
강 본부장은 내가 보고 있던 계약서 윗부분에 손을 올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번에 대표님께서 특별히 지시를 하셨거든?”
그의 말에 나는 시선을 그에게로 옮겼고.
“이번 계약서에 도장 찍으면, 이번 드라마 찍었던 출연료도 7 대 3 비율로 정산해서 입금될 거야.”
“정말요?”
오늘 나온 계약서인데, 이미 촬영이 끝난 드라마의 정산도 새 계약서 비율로 조정해 준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회사의 마음에 결국 나는 입꼬리가 휘어졌고.
강 본부장은 인자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럼. 희성이가 미래가 밝은 배우라는 걸 아시는 거지.”
“하하, 감사합니다.”
그는 뒤를 돌아 회의실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뒤, 내게 몸을 기울였다.
“원래는 안 되는 거 알지?”
강 본부장이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도장 찍은 날부터 그 뒤에 촬영만 원래 유효한 건데. 특별히 희성이한테만 해주는 거니까, 외부에는 꼭 비밀로 해야 해.”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내 옆에 올려진 도장을 바라보며 눈썹을 들썩였다.
“그럼 계약을….”
나는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도장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적힌 ‘진희성’ 글자 옆에 도장을 찍으려던 그때.
눈에 들어오는 항목.
‘계약 기간’이었다.
기존의 3년이었던 계약 기간이 무려 7년으로 변경되어 있었고.
나는 그 글자에 미간을 찌푸렸다.
…….
뭐야, 계약 기간에 대한 언급은 없었잖아.
서둘러 도장의 뚜껑을 닫으며 강 본부장을 향해 말했다.
“저… 본부장님, 아무리 그래도 계약인데, 생각을 조금 해보고 계약해도 괜찮을까요?”
내 말에 그는 눈썹이 찌푸려졌고.
“아니, 왜?”
“그래도 큰 계약인데, 생각을 좀 해보고 싶어서요. 그러고 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계약서를 재차 내밀며 말했다.
“이렇게 좋은 조건으로 바꿔주는데, 왜 고민을 하는 거야?”
아무래도 7년이라는 계약 기간.
내게 언급하지 않은 7년.
그리고 그 긴 시간, 사람의 앞날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HS 엔터와 7년을 함께한다는 것에 쉽게 도장을 찍을 수는 없었다.
물론 HS 엔터가 내게 잘해준 것은 사실이지만, 7년이라는 시간은 연예계에서 생각보다 긴 시간이었고.
그 7년이라는 시간을 HS 엔터에서 활동할 것이냐는 것은 단순하게 고마움으로 정할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그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에둘러 그에게 말을 늘어놓았다.
“부모님이랑 이야기도 좀 해보고 싶어서요.”
그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에이, 나이가 몇인데 부모님과 상의를 해.”
“그래도 이야기 나눠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강 본부장과의 이야기 후, 그가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잠시 뒤 김 실장이 들어왔다.
“희성아, 계약 잘했어?”
“…아니.”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왜?”
“글쎄, 고민 좀 해보고 하려고.”
미리 계약에 대한 언급이 한 번도 없다가, 갑자기 후다닥 계약하려는 이유.
그게 결국은 계약 기간 7년 때문이었던 건가?
특히나 촬영이 막 끝나서 정신없을 이 시기에 말이다.
임 대표, 그렇게 안 봤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김 실장은 환하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그래서 계약금은 많이 챙겨주신대?”
그의 말에 나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고 보니, 새로 계약을 하는데도 계약금 이야기는 일절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계약서… 도장을 찍으면 안 될 것 같은데…?
***
띵동.
휴대 전화의 알람이 울렸다.
나는 서둘러 전화를 확인했고, 그 알람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XX은행 입금 106,370,000원 HS 엔터테인먼트.
결국, 나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지 않았다.
정산 비율이 높게 조정이 된다 하더라도, 7년이라는 계약 조건이 너무나 마음에 걸렸고.
입금 역시 기존 5.5의 비율로 정산되어 들어왔다.
회당 3천만 원씩 총 8회 차.
총 2억 4천만 원이라는 돈에서, 항상 빠지는 유류비까지 뗀 후.
남은 돈에서 55%로 정산된 금액.
106,370,000원.
그 금액을 보며 쓰읍 소리가 자동적으로 튀어나왔다.
이번에 유류비를 좀 많이 떼어간 느낌인데?
그럼에도 내 통장에 찍힌 돈은 1억이 넘는 큰 액수였다.
살짝 찜찜한 느낌이 마음 깊숙이에 자리 잡고는 있지만.
일단 고생한 뒤 들어온 큰 금액에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 큰돈으로 뭐부터 할까?
…아, 그거 먼저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