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78)화 (78/303)

78화 #16 – 파도를 타는 사람과 파도에 휩쓸리는 사람 (6)

“오케이!”

유 감독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뒤,

나를 향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야~ 오늘 희성 씨 연기 너무 좋았어.”

“하하, 감사합니다. 잘 찍어주신 감독님 덕분이죠.”

유 감독을 바라보며 웃었고.

우리에게 다가온 조감독이 유 감독의 말에 공감하듯 입을 열었다.

“희성 씨, 오늘 눈빛 연기가 아주 장난 아니더라. 어느 순간 빨려 들어가서 시청자처럼 보고 있었어.”

“그러니까. 쉬었다가 오후 신도 잘 찍어봅시다.”

그들의 찬사에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갔고.

허리를 접어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다음 신도 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과 벅찬 마음으로 서둘러 김 실장을 찾았다.

항상 내 연기를 가까이서 지켜보는 그였기에, 현장 스태프들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기에.

평소 김 실장과 친하게 지내는 스태프에게 다가갔다.

“혹시 김 실장님 못 보셨어요?”

“아, 전화가 왔다고 급하게 자리를 비우셨어요.”

늘 받는 업무 전화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곧장 주차된 차로 향했다.

차에 올라타자, 역시나 김 실장은 전화를 받고 있었고.

그는 내게 귀에 댔던 휴대 전화를 보이며 통화를 이어갔다.

“예,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김 실장은 한 손에 펜을 들고 허벅지에 펼쳐진 다이어리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고.

“네, 그렇게 진행해야죠. 예, 연락드리겠습니다. 고생하십시오.”

머지않아 통화는 종료됐다.

“희성아, 고생했어.”

그는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고.

“다음 신은 한참 뒤에 시작한다더라.”

“응, 그래서 차에서 연습하다가 가려고.”

고개를 끄덕이는 김 실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근데 무슨 일 있어?”

내가 그의 다이어리를 턱으로 가리키며 묻자.

김 실장이 쓰읍 소리를 내며 몸을 내게 기울였다.

“희성아, 우리 예능에 나가야 하잖아.”

며칠 전, 유 감독이 이야기한 예능 출연.

드라마 홍보차 예능에 나가줄 것을 부탁했고, 나는 그것을 수락했다.

그리고 김 실장이 회사를 통해 프로그램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영훈이랑 같이 출연해야 할 것 같아.”

“우리 회사 백영훈?”

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회사에서 영훈이랑 같이 출연을 했으면 하는데, 어때 괜찮아?”

뭐, 사실 백영훈과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으니까.

큰 불편함은 없었다.

“상관없어.”

그제야 그는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내가 거절할 것이라 예상한 듯했다.

“그럼 회사에 얘기해서 예능 프로그램이 정해지면 알려줄게.”

“좋아.”

그렇게 대화를 끝낸 후, 다시 몸을 의자에 기대었고.

곧장 대본을 펼쳐들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몸을 앞으로 당겨 김 실장을 불렀다.

“형, 근데 그 드라마는 어떻게 됐대?”

“무슨 드라마?”

“붉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박민준 나온 거?”

내가 눈썹을 들썩이자,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완전 망했지.”

“그러니까, 드라마도 엎어지고 제작사 손실도 엄청나겠네.”

김 실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드라마도 드라마지만, 박민준 말이야. 완전 나락으로 떨어진 거지.”

“하긴, 그게 박민준의 첫 주연작이었잖아.”

내 말에 김 실장이 몸까지 돌려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응, 첫 주연 작품이 그렇게 되니까, 앞으로 한동안… 아니, 최소 2, 3년은 주연도 못 맡을걸?”

“헐, 그렇게나 오래?”

“원래 이 바닥이 징크스, 미신 이런 거에 예민하잖아.”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출연했던 영화 ‘천재 영업 사원이 되었다’ 작품도 그랬다.

흥행에 실패하자, 그 화살은 고스란히 주연 배우 최서빈이 아닌 강찬성에게로 돌아갔지.

영화를 찍는 족족 흥행하지 못한 강찬성의 징크스가 다시 발현됐다는 것.

그러니 박민준이 주연을 또다시 맡게 된다면, 드라마가 방영 중지 처분을 받을 거라는 징크스가 생겨 버린 것이다.

박민준의 잘못은 아니지만, 현실이 그러했다.

그 어느 것이라도 불안한 징크스가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게 제작자의 마음일 테니까.

굳이 박민준을 주연 배우로 쓰면서 리스크를 안고 가고 싶은 드라마는 없을 터.

“그러게. 강찬성도 이제 영화 섭외는 안 들어오겠지?”

“당연하지. 강찬성도 앞으로 몇 년간은 영화 못 찍지 않을까 싶다.”

김 실장이 턱을 치켜들며 말을 이어갔다.

“박민준도 휴식기 가진 뒤에 복귀하면, 주야장천 조연만 할 거야. 한참 동안은.”

그의 말이 끝난 후, 박민준의 얼굴을 떠올렸다.

항상 내 앞에서 으스대던 그가 이제는 조연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나는 단역에서 조연, 그리고 주연까지.

쉴 새 없이 오르고 있었고, 어느새 박민준은 내 아래로 내려갔다.

나를 줄곧 무시하던 그간의 박민준의 태도와 말투가 떠올랐고.

자연스레 한쪽 입꼬리는 씨익 휘어졌다.

‘동창회… 또 언제 하더라?’

***

“희성 선배!”

현장으로 향하기 위해 차에서 내리자, 서인우가 손을 뻗어 나를 불렀다.

“어, 인우야.”

그는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달려왔고.

우리는 나란히 현장으로 걷기 시작했다.

“촬영 다 했어?”

“아니, 선배랑 같이 찍고 나서 다음에 한 신 더 있어.”

서인우는 대본을 바라보며 재차 말을 이었다.

“근데 이번 신, 우리랑 민영 씨도 같이 찍는 거 아니야?”

그때.

“와악!”

갑자기 나타난 신민영!

그녀의 소리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쳤다.

“깜짝이야.”

“민영 씨, 언제 왔어요?”

그녀는 우리의 놀란 얼굴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방금 왔어요. 놀랐어요?”

“당연하죠.”

“헤헤, 얼른 촬영 가요.”

그렇게 둘이 아닌, 셋이 나란히 현장으로 걸어갔고.

현장은 촬영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그때 조감독은 서둘러 내 앞으로 다가왔고.

“현장 정리되면 바로 시작하니까, 잠시만 대기하실게요.”

“네, 알겠습니다.”

그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우리는 못다 나눈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흘렀고.

여전히 현장에는 소품이 세팅되어 가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때 희성 선배 말에 빵 터졌다니까요?”

서인우의 말에 신민영은 배꼽을 잡듯이 소리 내어 웃었고.

“에이, 그래도 인우가 그렇게 한 게 더 웃겼지.”

신민영은 무인도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무인도에서는 다 재밌었던 거 같은데요?”

“맞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이야기도 하고… 언제 그런 추억을 쌓아 보겠어요.”

“춥고 힘들긴 했는데. 나도 재밌었어.”

어느새 유 감독이 쓰윽 몸을 비집고 들어왔다.

“우리 배우님들이 무슨 이야기를 이렇게 재밌게 하고 계실까?”

그는 나와 서인우의 사이로 들어와, 양팔을 뻗어 어깨동무하듯 손을 얹었다.

“감독님 오셨어요?”

내 말에 그는 눈썹을 들썩였다.

“이렇게 배우들 케미가 좋으니, 드라마가 잘될 수밖에 없겠네. 하하.”

“그럼요. 그대로 드라마에 녹여내 보겠습니다.”

서인우가 능글맞은 얼굴로 유 감독에게 당차게 말했고.

유 감독은 우리를 번갈아 보며 흐뭇한 얼굴로 답했다.

“그래, 셋은 꼭 오래된 친구 사이 같아.”

“하하, 저희가요?”

동시에 허공에서 셋의 눈빛이 마주쳤고.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본 유 감독이 입꼬리를 올리며 외쳤다.

“삼총사, 촬영하러 갑시다.”

‘삼총사’라는 말에 미소를 지으며 합창하듯 소리쳤다.

“넵!”

***

“잡았대!”

김 실장이 내게로 다가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뭘?”

“예능 출연.”

그의 말에 나는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걱정스러운 마음 반, 설레는 마음 반.

처음 예능을 찍을 때도 이런 마음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예능 프로그램에 온전히 적응하지는 못했다.

매주 찍는 것도 아니었고, 매번 다른 출연진과 새로운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나가기 때문에 익숙해질 수가 없었지.

게다가 예능에서 활약을 했다는 기사가 나면서부터 부담감까지 더해진 터.

예능은 드라마와 같이 연습을 하고 갈 수도 없는 방송이다.

아무리 예능도 대본이 있다고는 하지만, 요즘은 리얼리티를 살리지 않으면 재미 요소가 줄어들어 시청자들에게 외면을 받기에.

일부의 대본으로만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그렇기에 드라마나 영화와는 달리,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즉 연습을 할 수도, 한다고 해서 그대로 카메라에 비춰지지가 않는다는 것이지.

김 실장을 향해 커다랗게 눈을 뜨고 물었다.

“그래서 무슨 프로그램이야?”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 예능 프로그램의 모니터링을 많이 해가는 것.

그뿐이었다.

“일요일 저녁에 하는 ‘미스터리 패밀리’ 알지?”

“당연하지.”

미스터리 패밀리.

주말 황금 저녁 시간대의 방송 프로그램이다.

예능을 매주 챙겨 보지 않는 나 역시 알고 있는 방송.

고정 연예인 패널이 있고, 매번 게스트가 참여하는 형식이다.

매주 미스터리한 일들이 주어지고, MC를 제외한 모든 이가 함께 그 일을 풀어나가는 내용.

늘 게스트가 바뀌기에, 그들에게 맞는 미션과 게임을 펼쳐낸다.

항상 출연한 게스트는 다음 날 인터넷을 도배하고는 한다.

그만큼 시청률과 영향력이 높은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그런 프로그램의 이름을 듣는 동시에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나 큰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긴장이 되기 시작했고.

동시에 회사의 힘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예능 출연을 요청한 후, 잡아온 프로그램이 어마어마했으니까.

김 실장이 내게 다이어리로 날짜를 보여주며 말했다.

“다음 주 목요일이 촬영 날이야.”

“얼마 안 남았네. 빨리 모니터링 좀 해야겠다.”

그는 내게 태블릿 PC를 건네며 입을 열었다.

“여기. 대본 연습하다가 틈날 때 한 번씩 봐.”

“그럴게. 고마워, 형.”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고.

나는 김 실장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근데 그 프로그램에 보통 게스트가 세 명이나 네 명씩은 나오지 않았나?”

“맞아. 그래서 백영훈도 나오고….”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김 실장의 말을 잘랐다.

“아, 형. 백영훈도 드라마 홍보차 나오는 거 아니야?”

내 말에 김 실장이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긴 한데, 아마 영훈이 드라마 이야기는 못 나온다고 보면 돼.”

“…왜?”

“미스터리 패밀리, KTS 방송사잖아.”

KTS.

예능 프로그램의 방송사이자, 지금 촬영 중인 드라마 ‘요리를 너무 잘해’의 방송사.

그러니 타 방송사인 백영훈의 드라마 홍보는 언급될 수가 없을 터.

물론 요즘은 타 방송사의 드라마 홍보도 하기는 하지만.

KTS 드라마와 동 시간대 경쟁 드라마이기에.

같은 KTS 방송사 드라마를 홍보하기에도 부족할 터.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입꼬리를 올렸다.

“다행이네.”

“그리고 아까 물어본 거 있잖아.”

고개를 갸웃거리자, 김 실장이 말을 이어갔다.

“게스트가 한 명 더 있어.”

그의 말을 자세히 듣기 위해 미간을 찌푸린 채 집중했다.

“누구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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