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16 – 파도를 타는 사람과 파도에 휩쓸리는 사람 (4)
“하아… 갑시다.”
송유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서인우가 다급하게 그녀를 따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니에요. 농담입니다.”
“네?”
송유나의 무표정에 서인우가 고개를 당기며 답했다.
“장난이었어요.”
송유나의 반응에 서인우는 당황한 듯 넘기려 했지만.
나는 그가 들고 있는 휴대 전화를 가리켰다.
“진짜로 우리 배터리 없잖아.”
정박된 배에서 짐을 모두 내린 건 아니었다.
내일 아침에 해가 뜨는 대로 무인도를 빠져나갈 예정이었고.
언제 또다시 비가 올지 모르기에, 굳이 필요한 짐이 아니라면 배에서 꺼내지 않았던 것.
아까 보드게임을 가지러 갔을 때에도 보조 배터리는 아껴두자며 놓고 왔으니까.
서인우는 내 말에 휴대 전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한데… 나만 배터리가 없는 거니까, 괜찮아.”
그러고는 송유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아요. 얼른 앉으세요. 다른 벌칙으로 정할게요.”
그는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고.
송유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도 괜찮아요. 게임에서 진 거니까.”
그녀는 시선을 돌려 신민영과 나를 쳐다보았다.
“다들 휴대 전화 배터리 없는 거 아니에요?”
우리는 각자 휴대 전화를 바라보았고.
내 배터리는 17%.
신민영은 자신의 휴대 전화 화면을 모두에게 들어 보였다.
6%.
그걸 바라본 송유나가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봐요. 어차피 보조 배터리가 필요하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있는 날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
“뭐 해요, 일어나요. 가게.”
“아….”
무섭다, 안 가고 싶다, 라는 말을 쏟아낼 줄 알았는데.
송유나가 너무 당당한 얼굴로 먼저 가자고 말하는 게 의외였다.
내가 본 그녀는 매사에 짜증이 많았으니까.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가죠.”
우리가 나란히 일어나 서 있자, 서인우가 손전등을 건넸다.
“선배, 이거 들고 가.”
“그래, 아주 고-맙다.”
나는 그를 쏘아보며 말했고.
서인우는 웃음을 터트리며 내게 답했다.
“이거 우리가 계속 켜고 있었잖아. 불은 밝은 것 같더라.”
그는 내게 자신의 가방 위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배 안에 짐 놓은 곳에 가면, 네이비 색 옆으로 넓은 가방 있거든?”
“어, 내 가방 주변에 있었던 것 같다.”
“거기 안주머니를 열어보면 보조 배터리가 4개 있어.”
그의 말에 송유나는 입을 떡 벌리며 물었다.
“4개나 있어요?”
“네, 저는 조연이라 대기 시간이 늘 길잖아요. 따로 매니저도 없고 하니까. 필수템이죠. 하하.”
신민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도 예전에는 대용량으로 엄청 큰 거 들고 다녔는데. 인우 씨 거로 같이 써도 되나?”
“그럼요. 내일 육지 가서 충전하면 되니까요.”
“그럼 우리 갔다 올게요.”
내가 손전등의 전원을 누르자, 송유나는 자신의 양팔로 팔짱을 낀 채 뒤를 돌았다.
쏴아아-.
송유나와 함께 정박한 배를 향해 걷기 시작했지만.
주변 공기의 흐름은 ‘어색’ 그 자체였다.
깜깜한 주변.
빛이라고는 들고 있는 손전등 하나와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뿐이었다.
“섬이라 그런지 진짜 별이 많아요.”
내 말에 거리를 두고 걸어오던 송유나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들어 하늘을 쳐다보고는 입을 떡 벌렸다.
“네, 뭐….”
그녀는 심드렁하게 대답했고.
굉장히 무덤덤하다 싶은 마음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스리슬쩍 곁눈질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자.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눈동자만으로 먼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반짝이며 빛나는 그녀의 눈과,
수많은 별에 홀린 듯한 얼굴.
“진짜 멋있죠?”
물음에 그녀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에서는 이렇게 별 보기 힘들잖아요.”
“뭐, 그렇죠.”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짧았다.
송유나는 한결같이 나와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걷고 있었고.
나는 다시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유나 씨, 어두워서 앞이 잘 안 보이는데, 조금 가까이 오세요.”
“괜찮아요.”
“위험해서 그렇죠.”
팔짱을 낀 채 내 옆쪽으로 걸어오던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냥 옆에서 걷기 싫다는 건가.
이번에는 그녀에게 손전등을 내밀었다.
“앞이 안 보이니까, 혹시 돌에 걸릴까 봐 그래요. 아니면, 유나 씨가 손전등 들고 걸을래요?”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어요.”
그리고 한 걸음 내 곁으로 쓰윽 다가왔다.
나는 손전등을 앞으로 비춰 배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시야에 배가 들어왔지만, 아직 걸어가기에는 한참이나 남은 곳.
물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자신의 팔을 손으로 쓸어내리는 송유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얇은 옷 하나만을 입고 있었고.
나는 가벼운 겉옷을 걸친 상태.
춥냐고 물어봤자, 그녀는 도도하게 아니라고 할 것이 뻔했기에, 재빨리 겉옷을 벗어 그녀에게 건넸다.
“추운 것 같은데, 이거 걸쳐요.”
“하나도 안 추워요.”
역시나.
송유나는 시크한 얼굴로 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팔뚝에는 쫘악 닭살이 돋아 있었다.
“저는 더워서 벗은 거라, 혹시 추우면 걸치셔도 돼요.”
그녀에게 다시 한번 겉옷을 내밀자, 송유나는 내 옷을 홱 낚아챘다.
“나도 별로 안 추운데….”
퉁명스럽게 대답한 송유나는 내 겉옷을 어깨에 살포시 걸쳤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실소가 나왔지만, 서둘러 입꼬리를 정리했다.
다시금 우리는 아무런 대화 없이 걷기 시작했고.
그때.
바스락.
그녀와 내가 걷고 있는 옆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져 송유나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몸이 움찔거렸다.
“방금 뭐지?”
내가 발걸음을 멈추자, 그녀는 조금 전과 정반대의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냥 바람에 풀이 흔들리는 소리 같은데?”
“아, 그런가.”
내가 고개를 돌리며 풀을 바라보자, 송유나가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무서울 것도 없는데, 얼른 가죠?”
“…네.”
그녀는 어느샌가 나보다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가 걷기 시작했고.
나는 그녀의 발걸음에 맞추기 위해 빠르게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또다시 들려오는 소리.
바스락.
“어?”
순간 송유나의 발걸음이 멈춰졌고.
이내 그녀는 마른기침을 내뱉으며 다시 앞으로 움직였다.
서둘러 그녀의 앞을 손전등으로 비췄고.
팟-!
동시에 빛이 사라졌다.
“뭐예요?”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뒤를 돌아본 송유나.
나는 당황한 얼굴로 손전등의 전원을 연신 눌렀다.
하지만 여전히 들어오지 않는 불빛.
“모르겠어요. 배터리가 나간 건가?”
보드게임을 하고 노는 내내 켜져 있던 손전등.
오랜 시간 켜둔 탓에 건전지가 수명을 다한 모양이다.
“하아.”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고.
나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유나 씨, 휴대 전화 라이트 켜고 가요.”
그녀는 내 말에 더욱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배터리 나가서 휴대 전화 꺼졌어요.”
휴대 전화 라이트는 들고 있던 손전등보다 약했고.
가시거리가 짧아진 탓에 나는 그녀에게 밀착했다.
“그럼 조금 가까이서 가요. 앞이 잘 안 보이니까.”
“별것도 없는데, 뭐 그냥 앞으로만 가면 되지.”
그녀는 다가간 나를 바라보며 살짝 옆으로 물러섰고.
그렇게 우리는 다시 배로 향했다.
마침내 다다른 배.
모든 스태프와 배우가 탔던 만큼, 배의 규모는 꽤 큰 편이었다.
배에 한 걸음씩 오르며 짐이 쌓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고.
정박한 배였기에 배에 오르는 발걸음을 따라 바닥이 삐걱거렸다.
왠지 모를 스산한 느낌에 팔에는 자연스레 소름이 돋았고.
그때였다.
“꺄아!”
송유나가 짧은 비명을 내질렀고.
그녀의 소리에 화들짝 놀라 나는 입을 열었다.
“왜 그래요?”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손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네?”
그녀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니, 아무것도 없는 바다뿐.
“저기… 귀신….”
“귀신이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송유나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눈물을 머금고 가쁜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그녀의 고개는 바닥을 향해 있었고.
서둘러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아무것도 없어요, 유나 씨.”
“진짜 없어?”
겁에 질린 송유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도 모르게 내게 말을 놓아버렸고.
“네, 정말 없어요. 괜찮아요.”
내 말에 안심한 듯 송유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꺄아!”
그러다 재차 하이 톤의 소리를 내질렀다.
송유나가 바라본 곳은 배 끝 쪽.
그곳을 휴대 전화 라이트로 비추자, 막대에 그물이 걸려 있었다.
그것을 보고 귀신이라고 착각한 모양이다.
그녀는 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는데,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게 내 몸에 그대로 느껴졌다.
어느샌가 송유나가 내 팔을 감싸 안고 깊숙이 내 몸 안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기에.
그런 그녀의 등에 내 손을 살포시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부드럽게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귀신 아니에요. 저기에 그물이랑 막대가 있는데, 사람처럼 보였나 봐요. 제가 확인했어요.”
그녀는 내 말에 다시금 고개를 돌렸고.
라이트를 비춰 귀신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자 이내 긴장이 풀린 듯 몸에 힘이 쫙 빠졌다.
나는 그녀의 몸을 붙잡았고.
정신이 돌아온 송유나는 재빨리 나를 밀쳐냈다.
마른기침을 하며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출발할 때부터 지금까지 연신 당당한 모습을 보이던 그녀였기에.
지금의 머쓱한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뭐예요. 하나도 안 무섭다면서요.”
그녀는 내 말에 애꿎은 바닥을 발로 툭툭 치며 답했다.
“흠흠, 아니 발을 헛디뎌서 그쪽한테 넘어진 거예요. 기댄 게 아니라….”
“네, 알겠어요.”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삼켜냈고.
“여기 잠깐 계시면, 제가 혼자 얼른 들어가서 보조 배터리 가지고 올게요.”
말을 내뱉고 앞을 향해 걸어가자.
송유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내 옆으로 착 달라붙었다.
“아니, 같이 가요!”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고.
나는 그런 송유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송유나한테 이런 면도 있었네?
***
지방 촬영을 다녀온 지도 벌써 몇 주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촬영장.
“거의 다 왔다.”
김 실장이 차의 속도를 줄이며 입을 열었다.
눈앞에 보이는 세트장.
창밖을 바라보며 그에게 답했다.
“그러게. 벌써 다 왔네.”
차에서 내릴 준비를 하던 나는 휴대 전화의 소리를 진동으로 바꾸기 위해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인터넷 창을 클릭했다.
메인 화면에 뜬 박민준의 얼굴.
“뭐야, 하필 제일 먼저 보이는 게 박민준이라니.”
“응?”
김 실장이 룸 미러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휴대 전화가 아닌 그에게 시선을 옮기며 답했다.
“인터넷 열었는데, 박민준 사진이 걸린 기사가 메인에 떴길래.”
내 말에 김 실장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왜?”
그의 말에 내가 눈썹을 들썩였고.
“메인에 박민준 기사가 떴다며,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김 실장의 말에 바로 기사를 클릭했고.
“뻔하지, 그냥 드라마 기사겠….”
기사를 보자마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드라마 ‘붉은 꽃’ 역사 왜곡 논란. 국민 청원 방영 중지 요청에 빨간불….]
…박민준 X 됐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