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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75)화 (75/303)

75화 #16 – 파도를 타는 사람과 파도에 휩쓸리는 사람 (3)

타닥타닥.

앞에서는 장작이 타고,

등 뒤에서는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세차게 들려왔다.

“섬이라 그런지 금방 어두워지네요.”

날씨가 따뜻함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금방 어두워졌다.

아니, 주변을 비춰주는 가로등이 없어서 더욱 그렇게 느껴졌겠지.

무인도에 빛이 나는 무언가가 있을 리 없으니까.

서인우의 말에 신민영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비가 그쳐서 다행이에요.”

“맞아요. 비까지 왔으면… 상상만 해도 끔찍해요.”

텐트를 치기 시작할 당시,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비는 굵어지지 않은 채 멈췄고.

그 덕에 우리는 비를 맞지 않았다.

“여기는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육지에 비가 많이 온다니까 참….”

신민영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서인우는 여전히 밝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스태프분들이 물이랑 식량은 넉넉히 챙겨둔 게 어디예요.”

“그렇긴 하죠.”

“캠핑 온 느낌도 나고 좋은데요? 하하.”

긍정적인 서인우의 태도에 우리는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여기에서 하루를 보내게 된다고 언제까지 우울해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다고 해서 육지로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따뜻한 날씨였지만, 사방 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무인도는 점차 기온이 낮아졌고.

우리는 조금 더 불쪽으로 다가갔다.

“희성 씨도 추운데 가까이 오세요.”

신민영이 불을 가리키며 내게 말했고.

“네, 그럴게요.”

그녀의 말에 한 발짝 앞으로 걸어갔다.

“상황은 이렇게 됐지만, 덕분에 이런 경험도 생기네요.”

붉게 타오르는 장작을 바라보며 말하자, 신민영이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뭐, 이런 게 나중에 돌아보면 추억이 될 테니까.”

서인우가 손뼉을 부딪치며 소리쳤다.

“그러네. 나중에 예능에 나갔을 때, 비하인드 스토리로 이런 거 이야기하면 진짜 대박이잖아요.”

우리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랬다.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거라곤 대화뿐.

그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순간 잊고 있었다.

이곳이 무인도라는 것을.

여기에는 그 어떠한 것도 없었으니까.

휴대 전화가 안 터지는 곳은 아니었다.

다만, 배터리가 없었을 뿐이지.

보조 배터리가 있지만, 비상시에 쓰거나 아껴 쓰자는 이유로 우리는 최대한 휴대 전화를 사용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함께하는 배우들과 마음이 맞았기에, 우리는 오히려 잘됐다는 식으로 가까워지기 위해 내내 붙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것.

이런 자리가 생긴 덕에 첫 만남 때 회식을 했던 것보다 더욱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배우님들은 각자 쉬시나?”

서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고.

몇몇 조연 배우들은 각자의 매니저와 휴식을 취하거나, 개인행동을 하기도 했다.

한곳에 모여 있어야 하는 것이 강요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고개를 빼꼼 들어 두리번거렸다.

꼭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는 아니었지만, 아까부터 보이지 않는 송유나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걱정되는 마음보다는, 또 어디선가 그녀의 매니저인 최 실장에게 소리를 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지.

그때, 신민영이 어깨를 들썩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이렇게 가만히 있으니까, 시간이 정말 안 가긴 하네요.”

그녀의 말에 우리는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직 7시도 안 됐어요.”

“이럴 때 게임이라도 하면 시간도 빨리 갈 텐데.”

신민영의 말에 서인우가 씨익 웃었다.

“술 게임이요?”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그에게 답했다.

“하하, 아니요. 그냥 뭐… 보드게임?”

순간 허공에서 부딪친 그녀와 나의 시선.

마주친 눈빛에 나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 떠오르는 생각에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맞다!”

내 말에 신민영이 깜짝 놀라 몸을 움찔거렸고.

“저 보드게임 있어요.”

“정말요?”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내게 되물었다.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자, 그녀는 이내 활짝 웃으며 내게 말했다.

“우와! 이번에 하려고 가져오신 거예요?”

“네, 원래 숙소 가서 심심하면 같이하려고 챙겨왔는데, 여기서 꺼내게 될 줄은 몰랐네요.”

내 말에 그녀의 눈이 반짝였고.

서인우 역시 흥미롭다는 듯 내게 다가왔다.

“심심한데 잘 됐다. 희성 선배, 보드게임 어디 있어?”

“내 짐에 있을 거야. 가져올게.”

“그래, 그럼 여기 한쪽을 정리 좀 하고 있어야겠다.”

그들은 놀 거리가 생겼다는 사실에 아이들처럼 신난 얼굴로 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

“에이, 그렇게 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신민영이 게임의 말을 판에 내려놓자, 서인우는 장난기 어린 얼굴로 말했고.

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럼 제 차례죠?”

“네, 인우 씨 얼마나 잘하나 봅시다. 하핫.”

서인우가 어깨를 들썩이며 허리를 곧게 펴던 순간.

“흠흠.”

작게 목을 푸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리고 우리의 시선은 동시에 그 소리로 향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송유나가 우리의 주변에 다가와 있었고.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바다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

이쪽으로 다가왔다고 생각했는데, 우리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송유나의 모습에 서인우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저 합니다.”

이내 그는 주사위를 굴렸다.

“오오!”

신민영이 그가 굴린 주사위를 바라보며 눈썹을 들썩였고.

“오예, 그럼 저 앞으로 나가요. 하하.”

서인우는 호탕하게 웃으며 신민영을 약 올리듯 입을 열었다.

그사이 나는 게임판이 아닌.

곁눈질로 송유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바다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움찔거리는 몸.

자꾸만 송유나의 눈길이 보드게임으로 힐긋거렸고.

어디에서든 보이는 바다를 굳이 우리가 게임하고 있는 여기까지 와서 보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희성 선배 차례다. 여기 주사위.”

내게 주사위를 건네는 서인우.

그것을 받아들며 서인우가 아닌, 송유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유나 씨.”

내 말에 송유나는 눈을 깜빡이며 턱을 당겼다.

“네?”

“바다 보러 온 거예요?”

“아… 그럼요.”

그녀의 말에 서인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슬쩍 송유나에게 물었다.

“같이하실래요?”

송유나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어깨를 으쓱였고.

“싫으면 말고요.”

그녀에게 가볍게 말을 던진 후.

그녀를 바라보던 내 시선이 다시 게임판으로 향하자, 송유나가 다급히 외쳤다.

“뭐 인원수 부족해요?”

“예?”

“아니, 인원수 부족하면 내가 같이해주고….”

송유나는 말끝을 흐렸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삼켜냈다.

마른침을 삼킨 후, 미소를 꾹 참은 채 그녀에게 장난스레 말을 건넸다.

“뭐… 부족한 건 아니라서 억지로 하실 필요는 없어요. 같이하고 싶으면 앉으시고요.”

결국, 입가에 피어오른 미소.

그녀가 원하는 건 같이 게임을 하자고 붙잡아주는 것이었을 터.

하지만 예상과 다른 내 말에 송유나가 반응을 보였다.

내가 농담으로 말한 것을 그녀도 알았는지.

곧장 내게 도끼눈을 쏘아 보냈다.

“하하, 농담이에요. 같이해요, 유나 씨.”

내 말에 신이 난 건 송유나가 아닌, 서인우였다.

“맞아요. 유나 씨, 같이 게임하고 놀아요!”

게임을 시작한 이후 가장 밝게 웃는 서인우의 모습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송유나는 도도한 얼굴로 서인우가 마련한 옆자리에 앉았고.

“그럼… 한 판만 해보죠, 뭐.”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올랐다.

***

첫 번째 게임이 끝이 난 후.

연기를 하듯 열정적으로 게임에 임한 덕에, 잠시 주사위를 내려놓았다.

“진짜 재밌었다.”

“그러게.”

“희성 씨가 보드게임 안 가져왔으면 어쩔 뻔했어요.”

신민영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고.

게임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우리 잠깐 쉬었다가 또 해요!”

서인우는 그런 신민영에게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민영 씨는 보드게임을 진짜 좋아하신다더니, 정말 맞네요.”

“그럼요. 우리 다음 판에는 벌칙 걸고 해요.”

“오오, 좋은데요?”

내가 그녀의 말에 동조하자, 서인우도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 4명인데, 팀전으로 하면 되겠네.”

동시에 우리의 시선은 송유나에게로 향했다.

한 판만 하고 떠나겠다던 송유나는 못 이기는 척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녀만의 긍정의 표현인 모양이다.

우리는 술 대신 음료수를 들이켜며 대화 주제를 전환했다.

“우리 시청률 잘 나오겠죠?”

신민영의 말에 서인우는 열정 어린 눈으로 답했다.

“당연히 잘 나와야 해요. 민영 씨도 나오고, 그리고 희성 선배도 주연으로 나오고.”

그러고는 빙그레 웃으며 송유나를 향해 말을 이어갔다.

“거기에 유나 씨도 카메오로 출연하니까요. 또 제 첫 번째 조연 작품이기도 하고, 꼭 잘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래야지. 열심히 찍어보자.”

서인우가 머리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그리고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아, 지금 드라마 ‘붉은 꽃’ 방영 시작하겠다.”

붉은 꽃.

나 역시 알고 있는 드라마다.

주연 캐스팅 제안이 왔던 그 작품.

하지만 그 배역에는 내가 아닌, 박민준이 들어갔다.

“그러네. 그 드라마 주연이 박민준 배우 맞죠?”

신민영의 물음에 서인우가 입을 열었다.

“네, 맞아요. 박민준 님도 드디어 주연 들어갔더라고요.”

내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자, 그가 고개를 돌려 내게 물었다.

“희성 선배도 붉은 꽃 드라마 알지?”

“응, 알고는 있지.”

별로 대수롭지 않게 그를 향해 답했다.

박민준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서인우는 내게 재차 그 이야기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희성 선배도 박민준 님이랑 아는 사이야?”

하지만 내가 답하기도 전에 서인우는 자신이 대답을 대신했다.

“맞다. 전에 작품 같이하지 않았었나?”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고.

그는 해맑게 웃으며 물었다.

“그럼 드라마 어떨 것 같아. 박민준 님이랑 붉은 꽃 드라마 이야기해 본 적 있나?”

순수하게 궁금한 얼굴로 재차 묻는 서인우를 바라보며.

나는 결국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음…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드라마가 대박은 안 났으면 좋겠어.”

내 말에 놀란 표정이 된 서인우.

비단 흠칫한 건 서인우뿐이 아니었다.

신민영, 심지어 송유나까지 입을 벌리며 바라보았고.

“혹시 사이 안 좋아요?”

조심스레 물어보는 신민영의 말에 나는 서둘러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들의 표정을 보고 다시 말을 붙였다.

“사실 그 드라마에 제가 출연하려다가 말았거든요.”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신민영이 탄성을 내질렀다.

“저 그거 무슨 마음인지 딱 알아요!”

그러고는 이내 그녀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저도 전에 작품을 거절한 적이 있는데, 제가 안 하겠다고 한 건데도 괜히 시청률이 잘 나올까 봐 자꾸만 신경 쓰게 되더라고요.”

“민영 씨도 그런 적이 있구나.”

“그럼요. 그래서 제가 출연한 것처럼 엄청나게 시청률 확인하고, 드라마 모니터링까지 했다니까요?”

그녀는 그때가 생각나는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희성 씨 마음, 정말 십분 이해해요.”

송유나는 술잔 대신 음료수를 들었고.

나는 그녀의 음료수 병에 내 음료 잔을 부딪쳤다.

밤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우리의 게임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이번에 우리 말이 들어가면 이기는 거죠?”

다시 시작한 게임은 금세 마지막 턴을 향해 달리고 있었고.

편 가르기로 정한 팀은 나와 송유나가.

신민영과 서인우가 한 팀이었다.

그리고 지금.

웃고 있는 건, 내가 아닌 신민영과 서인우였다.

“하아- 빨리빨리 진행합시다.”

나는 퉁명스러운 어투로 서인우에게 말했고.

그는 활짝 웃으며 내게 혀를 내밀었다.

“얄밉게 진짜…!”

“어쩌나, 이번에 희성 선배가 지게 생겼네? 하하.”

주사위는 서인우의 손을 떠났고.

슬로 모션을 건 것처럼 주사위는 허공에서 천천히 구르고 있었다.

탁.

그리고 이내 바닥에 떨어진 주사위.

“와아!”

서인우와 신민영은 소리를 지르며 서로의 손을 부딪쳤다.

“우리가 이겼다.”

“하아….”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고.

송유나는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 시선을 짐짓 못 본 체하며 서인우에게 소리쳤다.

“그래서 벌칙은 뭔데?”

“음….”

그는 서둘러 귓속말로 신민영과 대화를 주고받았고.

벌칙을 정한 둘은 나와 송유나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이내 서인우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손가락을 뻗었다.

“저기, 정박해 놓은 배 안에서 보조 배터리 가져오기!”

우리의 시선은 그가 가리키는 배로 옮겨졌고.

어둑한 이곳에서 배는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때.

송유나가 바지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아…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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