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16 – 파도를 타는 사람과 파도에 휩쓸리는 사람 (2)
몇 시간을 쉼 없이 달리던 차는 목적지인 항에 도착했다.
항이라고 해봤자 시설이 갖춰진 항구는 아니었다.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무인도였기에.
제작진 측에서 빌린 배와 수많은 스태프와 배우뿐.
장시간 한 자세로 앉아 있다 보니, 굳은 몸을 풀기 위해 한시라도 빨리 차에서 내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형, 얼른 내려서 좀 쉬어.”
“응, 너도 힘들 텐데 고생했어.”
김 실장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그냥 앉아 있기만 했는데, 뭘. 형이 운전하느라 피곤하겠다. 오늘 촬영 때 좀 쉬어.”
“이게 내 일인데. 나는 괜찮아.”
그는 밝게 웃으며 내게 답했고.
똑똑.
그때 창문을 살짝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서인우가 환하게 웃으며 차를 바라보고 있었고.
까맣게 선팅이 되어 있기에 안이 보이지는 않지만, 내 차인 것을 알아차리고 온 모양이다.
드르륵.
서둘러 문을 열었다.
“인우야.”
“선배, 일찍 왔네?”
“응, 너는 언제 온 거야?”
“나도 방금 도착했어.”
서인우와 대화를 나누자, 김 실장이 입을 열었다.
“내려 있으면 주차하고 바로 갈게.”
“알겠어.”
답을 한 뒤에 서인우의 옆으로 내리며 땅에 발을 디뎠다.
“하아.”
허리를 풀며 앓는 소리를 내자, 서인우 역시 장시간 굳은 몸을 함께 풀어냈다.
“근데 오늘 하늘이 영 흐리네?”
허리를 뒤로 젖힌 채 하늘을 쳐다보자, 서울에서 보던 하늘색과는 조금 다른 느낌.
쨍한 파란색이었는데, 이곳의 하늘은 잿빛이 가득했다.
“그러게. 오늘 비 소식은 없었는데, 그냥 흐리기만 하려나 보네.”
서인우는 대수롭지 않게 시선을 돌렸고.
그때.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커다란 벤 한 대.
지난주 촬영 현장에서 보지 못한 차량이었다.
대부분 연예인의 차량이 비슷하기는 하지만.
그중에도 급은 존재한다.
확실히 여기 주차장에 있는 차들 중 가장 고급 벤이었다.
서인우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내게 말했다.
“뭐지, 민영 씨 벌써 차 바꾼 건가?”
그의 말에 나는 손가락을 튕기며 답했다.
“아, 오늘 카메오로 특급 배우가 온다더니. 저분인가 본데?”
“오늘 카메오 와?”
그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차는 우리의 앞에 멈춰 섰고.
천천히 문이 열렸다.
서인우와의 대화를 멈추고 열리는 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열린 문에서 나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송유나.
순간 송유나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같은 소속사 식구이자, 나와 작품을 함께했던 그녀.
내가 주연으로 맡은 이 드라마에 카메오로 나오는 사람이 송유나라니.
금세 표정을 풀고 그녀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유나 씨.”
“네.”
밝은 내 인사와는 달리, 송유나는 나를 흘기듯 바라보며 답했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차가웠다.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늘 그랬듯 시크하고 도도한 얼굴.
차에서 내린 사람이 송유나라는 것을 확인한 서인우는,
입을 떡 벌린 채 놀란 눈은 그대로였다.
그러곤 서둘러 송유나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서인우라고 합니다.”
“아….”
서인우의 인사에는 얼굴조차 바라보지 않았다.
허공을 향해 탄식을 내뱉듯 말했고.
그럼에도 그는 지금까지 봤던 얼굴 중에 가장 밝은 얼굴로 그녀에게 답했다.
“팬입니다, 유나 님.”
“네.”
송유나는 팬이라는 서인우의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자신의 매니저에게 시선을 옮겼다.
“오빠, 빨리 와. 가게.”
“알겠어.”
송유나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자신의 매니저에게 다가갔고.
그들은 점점 멀어져 갔다.
서인우가 호들갑을 떨 듯 발을 동동거리며 내게 물었다.
“뭐야, 우리 카메오가 송유나라니. 진짜 말도 안 돼.”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송유나 좋아하나 보네?”
“당연하지. 연기도 잘하고, 얼굴도 예쁘고, 게다가 성격도 너무 좋잖아.”
연기와 얼굴은 인정.
하지만 성격은 글쎄….
그렇다고 송유나의 까칠한 면을 내가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
애써 미소 지으며 서인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송유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서인우의 눈에서는 하트가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그러더니 곧장 시선을 내게 옮겨왔다.
“근데 희성 선배, 송유나 님이랑 아는 사이였어?”
“응, 같이 촬영도 했고….”
서인우는 내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손뼉을 부딪치며 말했다.
“와아! 주연은 다르긴 다르네. 송유나 님이랑 촬영도 하고.”
“에이, 그리고 같은 회사 소속이니까.”
그는 탄성을 내뱉었다.
“캬아! 역시 우리 선배님. 대형 기획사니까, 톱 배우들도 많고. 아니지, 우리 희성 선배님도 주연에 톱 배우가 될 몸이신데!”
서인우의 호들갑에 나는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만해라.”
내 말에 그는 활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왜, 맞잖아. 대형 기획사에, 주연에….”
“쉿!”
내 입에 있던 검지를 그의 입에 가져다 대며 입을 막았다.
“부끄러우니까 그만해.”
서인우와 나는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무인도로 향하기 위해 모두 배에 올라탔고.
김 실장과 나는 나란히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오래 매니저 생활하면서 나도 무인도는 처음 가본다.”
“그러게. 신기하네.”
주변에 누가 있는지를 살핀 후, 김 실장에게 물었다.
“형, 근데 송유나가 카메오로 왔던데, 알고 있었어?”
“아니, 나도 아까 보고 알았어.”
“형은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하긴, 알았으면 나한테 말해 줬겠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송유나는 워낙 톱 급이라 굳이 나한테까지 알려주지 않았나 봐.”
“근데 송유나가 카메오라니, 대체 무슨 일이래?”
보통 카메오는 감독과 친분이 있거나, 혹은 주연인 나와의 친분으로 출연을 해주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같은 소속사 식구인 내 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온 건 절대 아니고.
“아까 최 실장님이랑 이야기했는데.”
“송유나 매니저님?”
그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유 감독님이 송유나를 직접적으로 아는 건 아닌데, 우리 회사에 어떤 분이랑 친분이 있으신가 봐.”
“아, 그러네. 우리 감독님이 엔터 출신이랬지.”
“응, 그래서 하도 송유나 카메오 부탁을 해서 나온 거라더라고.”
그의 말에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배는 무인도에 도착했고.
우리는 하나둘 배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
배에서 내리는 송유나는 최 실장을 향해 투덜거리듯 입을 열었다.
“하필 카메오 출연을 무인도에서 해야 하는 거야?”
“유나야, 하루만 찍고 가니까, 힐링 한다고 생각하고….”
“하아- 누가 힐링을 이런 데서 해.”
“미안. 아무튼 빨리 찍고 가서 푹 쉬자.”
최 실장은 거제도로 내려오는 길 내내 송유나에게 잔소리를 들었지만.
기어코 현장에서까지 한 소리를 하는 송유나의 비위를 맞췄다.
그때 송유나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그녀의 시선 끝에 있는 건 다름 아닌, 진희성의 모습.
송유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맨날 NG만 내던 코흘리개였는데, 주연이라니. 흥.’
그녀는 곧장 시선을 옮겨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오래지 않아, 감독의 신호와 함께 연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마음대로 하는 게 어디 있습니까?”
진희성은 눈에 힘을 잔뜩 준 채 송유나를 바라보았다.
송유나는 그의 말에 할 말을 겨우 눌러내며 눈을 내리깔았고.
진희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쏘아붙였다.
“그러다가 다치면요.”
그 말에 송유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그러면 그때야 제 말을 들을 겁니까?”
진희성은 화를 내고 있었지만.
그 찌푸린 얼굴 사이로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잘게 떨리는 눈동자.
송유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아련함이 뚝뚝 흘러넘쳤다.
둘의 눈이 마주쳤고.
송유나는 마른침을 삼켜냈다.
“컷, 오케이!”
순간 유 감독의 소리가 들려왔고.
마주치고 있던 둘의 눈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진희성… 뭐, 연기가 예전보다는 조금 나아졌네.’
송유나는 진희성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유나 씨.”
그의 말에 송유나는 아련하던 눈을 평소처럼 부릅뜨며 답했다.
“네, 희성 씨도요.”
진희성은 그대로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며 현장을 벗어났고.
송유나는 진희성의 연기를 떠올리며 고개를 잘게 끄덕였다.
현장 밖으로 나온 송유나는 모래에 비치는 햇빛에 선글라스를 끼고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있는 거라곤 물과 풀, 사람들뿐.
다시 고개를 돌리다, 그녀의 시선 안에 진희성이 들어왔다.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진희성과 신민영이 마주 보며 서 있었고.
송유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저번에 말했던 보드게임은 해보셨어요?”
신민영이 진희성을 향해 눈을 초롱초롱 뜨고 물었고.
“그럼요. 민아 씨가 알려준 거 진짜 재밌던데요?”
“다행이다.”
신민영은 자신의 양손으로 깍지를 낀 채 말을 이어갔다.
“이렇게 취미가 같은 분을 만나서 이야기하니까, 잘 통해서 너무 좋아요. 헤헤.”
선글라스를 끼고 있기에, 송유나는 별다른 부담감 없이 그들을 곁눈질로 바라보았고.
들려오는 대화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터에서 저렇게 노닥거리기나 하고. 놀러온 것도 아니고 말이야.’
신민영이 빙그레 웃으며 휴대 전화의 사진을 진희성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이번에 이 보드게임이 새로 나온 건데….”
신민영의 말에 진희성은 허리를 숙여 같은 화면을 바라보았고.
둘은 쉴 새 없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송유나의 귀에 자꾸만 들려오는 단어.
‘보드게임’이라는 말에 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생각했다.
‘뭐… 취미는 나쁘지 않네.’
***
뚝뚝.
얼굴에 두 방울의 물이 닿았고.
재빨리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우중충한 하늘.
빠르게 움직이는 회색빛 구름.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비 올 거 같은데?”
말을 하자마자 스태프가 유 감독에게 달려가며 소리쳤다.
“감독님, 풍랑 경보 떴습니다!”
그의 큰 외침은 모든 배우들의 귀에 들어갔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유 감독의 근처로 모여들었다.
“뭐?”
“배가 못 뜰 거 같습니다.”
스태프의 말에 모두가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았지만.
아직 그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았다.
“무슨 소리야. 여기는 비도 안 오는데.”
유 감독의 말에 스태프가 손가락으로 바다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는 괜찮은데, 거제도 앞바다 쪽이 심각한가 봐요.”
“그럼 마무리 촬영 빨리하고 출발을….”
유 감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스태프가 입을 열었다.
“아니요. 감독님, 출발해도 거제도에서 정박할 수가 없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곳곳에서 한숨 소리가 쏟아졌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래. 얼마 뒤에나 배가 갈 수 있다는 말이야?”
“…오늘 여기서 자야 할 것 같습니다.”
스태프의 말에 현장은 뒤집힐 듯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여기에 있는 모든 배우와 스태프는 내일도 촬영을 해야 하기에 지장이 없었지만.
육지의 제대로 된 숙소가 아닌, 무인도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는 말에 다들 정신이 없는 듯 보였다.
스태프는 현장을 진정시키듯 재차 말을 이었다.
“혹시 몰라서 배에 텐트랑 짐들은 다 실어 왔습니다.”
그때.
“아니, 여기서 어떻게 자고 가라는 거야. 오빠가 가서 다시 말해!”
끝 쪽에 있던 송유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최 실장에게 다그치고 있었지만.
사실 그런다고 해서 상황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카메오로 출연한 그녀임을 알기에, 유 감독은 서둘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유나 씨, 정말 미안한데, 여기 상황이….”
그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차분하게 설명을 늘어놓았고.
스태프들은 재빨리 정박해 있는 배로 다가가 텐트를 꺼내기 시작했다.
인원이 많다 보니, 셀 수 없이 많은 짐이 배에서 나오고 있었고.
나는 쌓여 있는 짐에 다가갔다.
“여기에 텐트 치시는 거죠?”
내가 텐트에 손을 올리자, 스태프가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아유, 얼른 쉬세요. 저희가 빨리 마무리하겠습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이렇게 많은데, 같이 도와야죠.”
그들의 만류에도 같이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조감독은 길게 손을 뻗어 김 실장을 호출했다.
“김 실장님!”
“네.”
저 멀리에 있던 김 실장이 조감독의 말에 달려왔고.
“김 실장님, 배우님 좀 제발 데려가세요.”
그는 김 실장을 향해 눈썹을 늘어뜨린 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희성아, 우린 저쪽에 가서 좀 쉬자.”
“그래도….”
“불편하면 얼른 가서 연습 좀 하면서….”
김 실장은 나를 끌어내듯 몸을 잡아당기며 현장에서 빼내고 있었다.
그때 송유나와 눈이 마주쳤고.
송유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 손으로 선글라스를 치켜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