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73)화 (73/303)

73화 #16 – 파도를 타는 사람과 파도에 휩쓸리는 사람 (1)

커다란 조명.

그 옆에는 바로 사진을 확인할 수 있는 모니터.

그리고 카메라가 테이블에 올려져 있었다.

드디어 다가온 드라마 포스터 촬영 날.

포스터 촬영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많이 찍어본 적도 없었지만 말이다.

촬영은 이번이 딱 두 번째.

조연을 맡았을 당시에는 포스터에 출연하지 않아도 됐기에, 찍어본 적이 없었지.

그리고 처음 주연을 맡았던 건 미니시리즈가 아닌 단막극이었다.

그 단막극 역시 한 화짜리로 짧게 구성된 것이라 스튜디오를 빌리면서까지 포스터를 찍지는 않았지.

처음으로 찍었던 포스터는 최근에 개봉한, 영화 ‘천재 영업 사원이 되었다’였다.

최서빈과 함께 단 한 번의 포스터 촬영을 경험한 게 다인 것이다.

당시에 정신없이 촬영하다가 어느새 끝이 났던 기억만 있다.

게다가 내 분량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제대로 겪어봤다고 할 수도 없을 터.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드라마 미니시리즈의 주연을 맡아 포스터 촬영을 하는 날이다.

포스터 촬영장으로 가는 길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주연에 대한 부담감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부담감보다는 사실 잘하고 싶다는 마음과 설렘이 훨씬 더 가득했다.

늦지 않게 도착하기 위해 평소보다 서둘러 나온 탓에, 현장에는 아직 스태프들 외에 아무도 도착하지 않았다.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누던 그때.

“안녕하십니까.”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들어오는 사람.

서인우였다.

“인우야!”

누구보다 서인우를 반기며 다가갔다.

“희성 선배, 잘 지냈어?”

한층 가까워진 우리 둘 사이.

그때 뒤늦게 들어오던 신민영과 마주쳤는데.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 나와 서인우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고.

서인우는 그녀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잘 지내셨죠?”

“네, 안녕하세요.”

대본 리딩 후 따로 만난 적이 없었기에, 우리는 서로 안부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눴다.

찰칵찰칵!

초반에 연달아 쉬지 않고 찍은 덕인지.

금세 다들 긴장하고 있던 모습이 풀린 듯 보였다.

“네, 좋아요.”

사진작가 조충현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다정하게 서로를 보면서 웃어볼까요?”

“하하하.”

우리는 고개를 왔다 갔다 돌리며 서로를 바라보다 소리 내어 웃었다.

찰칵찰칵!

쉬지 않고 터지는 셔터 음.

“좋습니다.”

그는 들고 있던 카메라를 얼굴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진희성 배우님이랑 신민영 배우님 투 샷 갈게요.”

사진작가의 말에 서인우를 포함한 조연 배우들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옆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재차 이어진 촬영.

신민영과 마주 바라보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우리의 입에선 그 어떤 대화도 나오지 않았지만, 그저 울리는 카메라 셔터 음을 대화 삼아 눈빛 연기를 이어갔다.

그때.

팔짱을 끼고 모니터를 바라보던 유 감독이 사진작가에게 조심스레 걸어가 입을 열었다.

“저 작가님, 이 두 주연 배우는 이런 느낌으로 한번 찍었으면 하는데….”

드라마 촬영 현장이 아닌, 포스터 촬영 현장에서의 디렉팅은 그의 몫이 아니다.

물론 의견을 제시하고 사진작가와 함께 의논하며 찍는 것이었기에.

유 감독은 강압적인 태도가 아닌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고.

사진작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들의 대화는 조금 길어졌고.

디렉팅을 기다리기 위해 우리는 잠시 포즈를 멈췄다.

순간 어색하게 마주친 시선.

신민영은 어색한 얼굴로 빙그레 눈웃음을 지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에,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민영 씨는 영화하고 쉬시다가 이번 드라마에 들어오신 거죠?”

그녀도 어색함을 떨치려는 듯 더욱 밝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 이번에 몇 달 쉬었어요.”

“그럼 여행 같은 거 다녀오신 거예요?”

“아니요. 기간이 애매해서, 그냥 취미 생활하면서 거의 집에서 보냈어요.”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호응했다.

“맞아요. 힘들게 몇 달 일했는데, 집에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쉬는 게 최고죠.”

“희성 씨는 쉴 때 보통 뭐 하세요?”

아직 공통분모도 찾지 못한 대화의 초반.

어쩌다 보니 소개팅에서의 첫 만남처럼 서로의 취향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저는 커피 마시는 걸 좋아해서, 카페 가기도 하고….”

내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그녀가 손뼉을 부딪치며 말했다.

“혹시 보드 카페도 가보셨어요?”

그녀의 목소리에 놀라 눈이 커졌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최근에는 못 갔는데, 대학교 때 친구들이랑 몇 번 가봤어요. 평소 보드게임을 좋아해서 재밌는 건 사두고 집에서 하기도 하거든요.”

내 말에 그녀는 입을 떡 벌리며 말했다.

“진짜요? 저도 보드게임 완전 좋아하는데.”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고.

우리는 ‘보드게임’이라는 공통 관심사 하나로 대화를 쉬지 않고 이어나갔다.

“그럼 희성 씨, 그 보드게임도 해보셨어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며 질문을 던지는 신민영.

나 역시 평소에 관심을 가지던 주제였기에, 흥미롭다는 듯 대답했다.

“어떤 거요?”

“상대방의 패가 있는데, 거기에다가….”

유 감독과 사진작가의 길어진 대화 덕에.

우리는 한층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

“도착했다.”

김 실장의 말에 나는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좀 잤어?”

“아니, 눈만 감고 있었어.”

이른 아침부터 시작하는 촬영에 김 실장은 차에 타자마자 잠을 자라고 조언해 주었다.

하지만 드라마 첫 촬영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잠이 올 리는 만무했다.

그저 눈을 지그시 감고 쉬었지만, 떨리는 심장 때문에 내 눈길은 자꾸만 창밖으로 향했으니까.

그는 내 상기된 얼굴을 바라보며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긴장돼?”

하지만 긴장을 한 사람은 내가 아닌, 김 실장 같았다.

그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형이 긴장한 것 같은데? 하하.”

“긴장이라기보다 주연 첫 촬영이니까, 좀 떨리긴 하네.”

“연습 많이 했으니까 잘 하고 올게.”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배역과 촬영에 진심으로 대해주는 김 실장의 모습을 보니, 가슴 한편이 뭉클해졌다.

촬영장에 내리기 전, 마지막으로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었다.

드라마 ‘요리를 너무 잘해’는 몇 주 전 꿈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물론 음식 종류나 배경은 달랐지만.

신입 요리사에게 닥치는 고난과 역경.

그것을 이겨내며 극복해 나가는 성장 스토리의 드라마는 일부 꿈과 비슷한 장면들이 상당했다.

꿈에서 보았던 그 모습.

그 생생했던 장면을 다시금 머릿속에 그려보았고.

가슴 깊숙이에서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이내 가슴은 뜨겁게 달아올랐고.

그것을 겨우 차갑게 식히며 현장으로 한 발을 내딛었다.

“안녕하십니까.”

현장으로 다가가자, 스태프들이 내게 다가오며 인사를 건넸다.

“네, 안녕하세요.”

처음이었다.

스태프들이 이렇게 우르르 인사를 하는 것은.

항상 인사는 내 입에서 먼저 나가고는 했다.

그리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

한 스태프가 나와 김 실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 촬영은 미리 말씀드렸던 대로 변동 없이 시작하고,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네.”

그의 말에 나는 눈을 깜빡이며 답했다.

한참 이어진 야외 촬영.

배꼽시계가 울릴 때쯤.

“고생하셨습니다.”

오전 촬영이 끝이 났다.

그리고 풍겨오는 음식 냄새.

촬영장 한쪽에 마련된 밥차였다.

함께 촬영한 조연 배우들과 밥차로 향했고.

늘 그랬듯 가득 밀려 있는 줄 끝에 자리를 잡았다.

“이야, 촬영 마무리하고 왔더니, 줄이 어마어마하네요.”

내 옆에 있던 조연 배우가 앞에 늘어선 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고.

“그러게요.”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말에 동조했다.

그때.

유 감독이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희성 씨, 잠깐만.”

“아, 네.”

줄에서 빠져나와 그를 따라가자, 유 감독이 활짝 웃으며 내게 말했다.

“오늘 촬영 첫날이라 고생하는데, 나가서 맛있는 거 먹고 옵시다.”

“예.”

서둘러 그에게 대답했지만.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당연히 현장에서의 점심은 조금 전의 긴 줄을 기다렸다가 먹었다.

스태프고, 배우고 예외는 없었다.

조연 배우로 촬영장에 갔을 때, 늘 줄을 서서 먹고 그랬으니까.

당연히… 그런 게 정상이었다.

그렇게 ‘당연히’라고 여겼던 것들이 오늘은 모두 당연하지 않았다.

이건 촬영장이 바뀌었거나, 스태프들이 달라져서가 아니다.

그저 달라진 건, 단 하나.

내가 조연에서 주연이 됐다는 것, 그뿐이었다.

“감독님!”

그때 옆으로 신민영이 쓰윽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어, 민영 씨. 얼른 밥 먹으러 갑시다.”

유 감독이 놀라지 않은 것을 보니, 이미 그녀에게 식사 제안을 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주연인 나와 신민영, 유 감독은 사람이 많은 밥차가 아닌.

식당으로 향했다.

감독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라고 해서 음식이 특별할 것은 없었다.

촬영 현장이 번화가와 떨어져 있었기에.

현지 맛집이라고 불린다는 두루치기 집으로 들어왔다.

두루치기와 쌈 채소, 그리고 각종 반찬들이 테이블에 쫙 깔렸고.

우리는 서둘러 수저를 들었다.

입으로 밥을 밀어 넣는 와중에도 입꼬리는 자꾸만 휘어졌다.

엄청난 음식 솜씨에 미소가 나온다기보다는, 그저 이렇게 주연이라는 이유만으로 유 감독과 따로 식사를 하러 나왔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유 감독이 쌈을 하나 가득 싸서 입에 넣은 채 우물거리기를 몇 초.

금세 음식을 삼켜낸 후 입을 열었다.

“촬영 초반인데, 로케이션을 짜다 보니까 바로 다음 주에 촬영지를 잠깐 옮길 거 같아.”

그의 말에 나와 신민영은 동시에 유 감독을 바라보았다.

“어디로요?”

그녀가 물었고.

그는 눈동자를 굴리며 답했다.

“어디냐면… 음.”

유 감독은 내가 아닌 신민영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흐렸고.

쓰읍 소리를 내며 재차 입을 열었다.

“무인도거든?”

무인도라는 말에 신민영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네?”

유 감독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무인도이기는 한데, 거제도 근처야. 우리가 배를 통째로 빌려놔서, 매일 촬영하고 육지로 돌아와서 쉴 거야.”

유 감독은 재차 신민영의 눈치를 살피듯 말했다.

“걱정은 안 해도 돼. 많이 떨어진 곳도 아니고….”

아무래도 여배우이다 보니 불편할 거라 생각했는지.

나보다는 신민영의 눈치를 살피는 그였지만.

예상과는 달리 신민영은 활짝 웃으며 답했다.

“우와! 저 무인도 처음 가봐요.”

그녀가 배시시 웃자, 유 감독은 한시름 놓은 듯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다 준비는 해서 가니까 괜찮을 거야. 좀 뒤에 가려고 했는데, 당장 다음 주가 돼서. 희성 씨도 괜찮지?”

나는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무인도라….

나 역시 무인도는 촬영차 가본 적이 없었기에 꽤 흥미로웠다.

재미있겠는데?

그리고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손가락을 튕겼다.

“아, 감독님. 근데 다음 주 촬영에 카메오 있다고 들었는데, 그건 누구예요?”

내 말에 유 감독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특급 배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