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15 – 주연과 조연 그 사이 (5)
“이야, 회식 말고 둘이 술 마시니까 좋네.”
최서빈이 술을 따르며 말했다.
푹 눌러쓴 모자.
파운데이션을 바르지 않은 맨얼굴.
인중에 거뭇거뭇 올라온 수염 자국.
편한 트레이닝복 바지와 하얀색 후드 티를 입은 최서빈의 모습은 톱스타가 아닌.
친한 동네 형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게요. 선배님이랑 이렇게 조용하게 술 마시니까 저도 너무 좋습니다.”
양손으로 소주를 들고 그의 빈 잔을 채웠다.
챙.
넘실거리는 소주를 신경 쓰지 않고 우리는 잔을 부딪쳤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차가운 알코올.
“크으.”
최서빈은 한 번에 소주를 넘긴 후 차가운 입김을 불었다.
“그래서 희성이 너 곧 드라마 촬영 들어가는 거야?”
안주를 집어 들기 전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네, 다음 주에 포스터 촬영하고, 곧 시작할 것 같습니다.”
그는 나를 가족처럼 생각하는지, 누구보다 흐뭇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너는 될 것 같았어.”
“네?”
“처음 연기 같이한 게 드라마였지?”
“예, 시계공과 무희입니다.”
그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 거기서 우리 처음 연기했잖아.”
“맞습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그때부터 알아봤어. 조연이면 딱 조연 티가 나거든. 근데 희성이 너는 마음가짐부터 다르더라고.”
최서빈은 칭찬을 늘어놓으며 소주잔을 다시 채웠다.
“하하, 감사합니다, 선배님.”
“감사는 무슨. 너는 잘될 줄 알았어. 당연하지, 너 같은 애들이 잘돼야 하는 거야.”
“자꾸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에 헤실거리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주연 맡으면, 이제 시작이야. 그러니까 이번 드라마에서….”
그는 내게 배우가 가져야 할 사항들과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조언을 펼쳤다.
그렇게 차갑던 소주가 식어갈 때까지 대화를 나누던 우리.
빈속에 연달아 부은 소주가 위를 아리게 만들 때쯤.
최서빈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희성아.”
“네, 선배님.”
“혹시 무슨 걱정 있어?”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없습니다.”
“아닌데… 얼굴에 고민이 가득한데?”
최서빈의 말에 나는 자연스레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손등으로 볼을 쓰윽 문지르자,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봐. 얼굴에 ‘고민’이라고 글씨가 써져 있구만.”
그의 말에 애써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그에게 보일 내 얼굴이 신경 쓰였다.
최서빈의 말이 맞았다.
사실 고민에 빠지게 만든 게 있기는 했으니까.
그건 다름 아닌 ‘꿈’이었다.
최근 들어 꿈을 꾼 적이 없다.
항상 대본을 받고 나면 꿈을 꿨는데.
대본을 받은 지도 한참이 지났고.
벌써 다음 주면 포스터 촬영에, 조만간 현장 촬영이 시작될 텐데….
꿈을 안 꿨다는 사실에 괜스레 걱정이 됐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그대로 할 수도 없는 노릇.
당연히 내뱉을 수도 없는 이야기였지만.
설사 한다고 하더라도 믿지도 않을 테니까.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그게… 개인적인 거라서요.”
곤란하다는 듯 입을 열자,
최서빈은 내 예상과는 달리, 괜찮다는 듯한 얼굴로 눈썹을 들썩였다.
“괜찮아. 말해도 돼.”
“나중에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래, 너무 개인적인 거라면 그럴 수 있지.”
그를 향해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쭤봐 주셔서 감사해요, 선배님.”
어쨌든 내가 힘들어하는 것 같다는 걸 알아차려 준 최서빈이었기에.
그에게 고맙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최서빈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근데 너 연애 이야기라면 꼭 말해라.”
“예?”
놀란 듯 눈을 뜨자, 최서빈은 더욱 입꼬리를 휘었다.
“우리 배우들은 비밀 연애해야 하잖아. 내가 또 팁이 아주 많거든.”
최서빈은 흐뭇한 얼굴로 말했고.
나는 호탕하게 웃으며 그에게 답했다.
“하하, 그런 일 생기면, 바로 선배님께 상담하겠습니다.”
“그래. 꼭 말해줘라.”
“넵, 한 잔 받으세요, 선배님.”
“좋지.”
우리는 연이어 술잔을 기울였고.
어느새 소주병은 줄을 이뤘고, 모자 아래로 보이는 최서빈의 얼굴은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하아- 영화 손익 분기점을 못 넘은 건 처음이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고.
나 역시 출연한 영화이기에, 그를 따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선배님 덕분에 300만 가깝게는 오른 것 같습니다.”
“술이나 마시자.”
“예.”
챙-.
“그런데….”
술잔을 내려놓은 최서빈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끝을 흐렸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보았고.
“이번 영화 촬영 현장 때, 바쁘게 찍지 말고 좀 여유를 두고 찍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런 마음이 들더라.”
더운 날씨에 서둘러 찍었던 촬영.
매 신을 빨리 소화해야 했기에, 최서빈은 그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 모양이었다.
그는 홀로 술을 들이켰고.
허공을 바라보며 작게 읊조렸다.
“장 감독님이랑 처음 작업하는 건 아니었는데, 이번에 나랑 호흡이 삐걱거린 부분도 있고….”
최서빈은 손익 분기점을 못 넘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운지.
재차 촬영 현장과 환경에 대한 안타까운 점들을 늘어놓았다.
그가 누군가를 타깃으로 삼아 뒷담화를 하거나.
누구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기에, 그런 그의 하소연이 기분 나쁘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저 어디에라도 핑계를 분산하고 싶은 주연 배우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됐고.
오히려 톱 배우 최서빈 또한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가 안쓰럽게까지 느껴졌다.
그를 토닥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술친구가 되어주는 것뿐.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빈 잔을 가득 채웠다.
***
탁탁탁탁.
귓가에 울려 퍼지는 일정한 소리.
무언가를 재빠르게 치고 있는 이 소리는….
그래.
칼질이다.
“킁킁.”
그리고 코끝을 자극하는 불 향.
화르륵.
단순한 가스 불이 아닌, 식당에서나 볼 법한 커다란 불길의 소리였다.
무엇인지 맡기 위해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빨아들였고.
코로 들어오는 향은 찌개의 냄새였다.
이어 느껴지는 한 가지.
음식 냄새 외에 코로 빨아들여지는 것이 없었다.
즉, 공기가 코로 들어오고 나가지 않는다는 것.
잠깐만.
이건… 꿈이다!
“야, 임준기! 빨리빨리 안 튀어와?”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나를 부르는 커다란 목소리.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내 발길은 자연스레 나를 호명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네, 부르셨습니까?”
“멍하니 서서 뭐 하고 있어!”
“…죄송합니다.”
이 식당의 메인 셰프인 박현민이 차가운 말투로 소리쳤다.
“시킨 일이나 빨리 처리해. 이러다가 저녁 손님들 밀려오면 또 정신 못 차릴 거야?”
“빨리하겠습니다.”
그랬다.
나는 이 식당에서 가장 아래.
그러니까 보조로 항상 까이고 있는 직원이었다.
서둘러 달려간 내 업무지.
급히 간 곳은 칼이나 불 앞이 아닌 개수대.
그릇과 식기 도구가 쌓여 있는 설거지 자리였다.
“하아.”
높이 쌓인 설거지에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농땡이를 부릴 수는 없었다.
어차피 대신 해줄 사람은 없으니까.
고개를 돌려 정신없는 주방을 바라보았다.
모두 칼질을 하고, 웍을 흔들며 요리를 하는 모습.
나도 설거지가 아닌, 요리를 탄생시키는 요리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려고 이 식당에서 환대를 받지 않으면서도 남아 있는 것이니까.
그때.
박현민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임준기, 너 오늘 저녁부터 칼 잡아.”
“네?”
“못 알아들어? 칼 잡으라고.”
갑자기.
아니, 드디어 찾아온 기회다.
눈을 크게 뜨고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네, 그럼….”
팟-.
분명 박현민에게 말하고 있었는데.
띠리리.
천장에 보이는 하얀 벽지와 조명.
젠장.
알람에 꿈이 깨버리고 말았다.
요즘 꿈을 꾸지 않는 것으로 고민에 빠졌었는데.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바로 꿈을 꾸었다.
이번 꿈 역시 너무나도 생생했다.
그리고 내가 몸을 담고 있던 식당.
분명 한식을 파는 고급 식당이었고.
이번 드라마 역시 같은 배경이었다.
꿈에서 봤던 기억을 천천히 떠올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
“희성아. 어제 일찍 잤어?”
김 실장은 차에 올라타는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부으면 안 되니까, 어제 6시 이후로 음식도 안 먹고 일찍 잤어.”
“잘했어. 그래서 그런지 오늘 피부도 좋아 보이네.”
집에서 출발한 차는 얼마 걸리지 않아 숍에 도착했고.
김 실장은 숍 문 앞에 맞춰 브레이크를 밟았다.
지이잉.
차 문이 열리자,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희성아, 들어가서 받고 있어. 나 주차만 하고 바로 들어갈게.”
“응.”
김 실장의 배려 덕에 나는 곧장 숍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밝게 웃으며 들어간 숍.
항상 입구에서 반겨주는 직원의 안내를 받았다.
“희성 씨, 오늘 포스터 찍는 날이라고 하셨죠?”
“맞아요.”
“네, 김 실장님한테 들었는데 오늘 실장님께서 안에 기다리….”
앞을 가로막는 누군가로 인해 그녀의 말이 끊겨버렸다.
“여기서 마주치네.”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인사랍시고 말을 건네는 사람은 박민준이었다.
“굳이 아침부터 그렇게 인사를 해야겠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에게 말했고.
박민준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아니, 반가워서 그러지.”
반갑기는.
그의 말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막내야!”
그때, 숍 안쪽에서 큰 목소리가 나왔고.
안내를 하던 직원이 서둘러 대답했다.
“네, 갑니다.”
그러고는 내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원장님이 부르셔서요.”
“아, 네. 가셔도 괜찮아요.”
“그럼 말씀 나누시고, 안쪽으로 들어오시면 돼요. 어딘지 아시죠?”
“그럼요.”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답했고.
직원은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 여전히 박민준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것도 팔짱을 끼고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로.
눈썹을 찌푸리며 그에게 물었다.
“뭐야, 나한테 뭐 할 말이라도 있어?”
박민준은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가 한가하게 이야기 나눌 사이였나?”
그를 향해 퉁명스레 답했다.
“나 이번에 드라마 들어간 거 알지?”
당연히 알고 있지.
내게 주연 제안이 들어왔던 드라마였으니까.
하지만 실제와는 다르게 만들어진 내용 때문에 거절한 주연 자리.
그 자리에 들어간 사람이 박민준이라는 건, 김 실장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게 뭐.”
박민준이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내리깔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이 드라마 들어오려고 했는데, 나 때문에 못 들어왔다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 반응에 박민준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표정을 풀며 입을 열었다.
“뭐 하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음기를 털어냈고.
박민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박민준… 너 잘 모르나 본데.”
“뭘 몰라?”
나는 몸을 박민준 쪽으로 기울였고.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실어 또박또박하게 답했다.
“내가 버린 드라마에 네가 들어간 거야.”
말이 끝나자마자 몸을 다시 뒤로 당기자, 박민준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변해갔다.
“다시 말해줘? 그 드라마, 섭외 들어온 걸 캐스팅 거절했다고. ‘내가’ 직접 깠다고.”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입술을 바라보며, 나는 한쪽 입꼬리를 길게 찢으며 말을 이어갔다.
“남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잘해.”
그러고는 그의 어깨를 툭 치고 앞을 향해 걸어갔다.
“야!”
곧장 들려오는 박민준의 외침.
그 소리에 발길을 멈춰 세웠다.
그러자 박민준이 재차 소리쳤다.
“너 말 다 했어?”
그의 큰 소리에 나는 귀를 후비며, 고개를 살짝 돌린 채 피식 웃었다.
“할 말 더 있어?”
“조금 잘나가는 것 같으니까 뭐라도 된 것 같지? 너 그거 금방이다. 너 같은 놈은….”
나는 녀석의 말을 끊었다.
“너는 참 조연 같다.”
“…뭐?”
“내 인생의 조연 같다고.”
그렇게 업신여기듯 그를 낮게 깔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 원래 2등은 1등을 엄청나게 견제해. 근데 1등은 더 높은 곳만 바라봐야 해서, 밑에 신경 쓸 시간이 없어.”
박민준과 마주친 눈.
그는 분노에 차오른 듯 몸을 부르르 떨었고.
나는 조소를 흩날리며 몸을 돌려 유유히 안으로 걸어갔다.
“진희성 너….”
부들대는 박민준은 말을 잇지 못했고.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실장이 서 있는 의자 앞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