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15 – 주연과 조연 그 사이 (4)
드라마 촬영 시작 전까지 연습에 매진하기 위해 오늘도 찾은 회사.
연습실로 걸어가는 나를 졸졸 따라오며 김 실장이 입을 열었다.
“희성아, 다음 주에 드라마 포스터 촬영 있다.”
나는 연습실 문을 벌컥 열며 답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네.”
“그리고 말이야….”
열린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온 김 실장이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눈썹을 들썩이자 그가 한숨을 참아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우리 개봉한 거 있잖아.”
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
“어, 그거 기사가 엄청나게 떴더라고.”
그의 말에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말하는 김 실장의 표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유쾌하지 않은 기사가 실렸다는 거겠지.
서둘러 휴대 전화를 열어 인터넷 창을 클릭했다.
그리고 개봉한 영화의 제목을 검색했다.
곧이어 쏟아지는 기사들.
기사는 새로 고침을 할수록 많은 기사가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장호철 감독의 영화 ‘천재 영업 사원이 되었다’ 흥행 부진에 영향을 받은 것은 다름 아닌 ‘징크스’ 때문?]
[자타 공인 톱 배우 최서빈의 연기에도 살리지 못한 건, ‘징크스’ 탓!]
[…기대작이었던 영화. 흥행 참패 받아들였을까?]
[짱짱한 캐스팅에도 흥행하지 못한 이유는 과연….]
수많은 기사 중 긍정적인 제목의 기사는 없었다.
지금까지 나온 기사들 중 좋은 기사도 있기는 하겠지만.
오늘 나온 기사에는 제목부터 시작해서 부정적인 내용들만 수두룩했고.
내 표정 또한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와아… 이게 뭐야.”
김 실장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니까. 난리가 났더라고.”
“징크스 이야기는 다 강찬성을 말하는 거지?”
몇몇 기사 제목에 들어 있는 단어, ‘징크스’.
바로 강찬성을 저격한 단어였다.
강찬성은 최서빈 만큼이나 톱스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로라하는 배우 중 한 명이다.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찍은 영화는 대부분 성적이 좋지 않았고.
그래서 한동안 드라마에만 집중하다가 영화에 출연하게 된 것.
이번 영화도 성적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게 드러나고 있자, 강찬성의 징크스가 다시 수면 위로 오른 것이다.
게다가 강찬성은 애초에 캐스팅된 것도 아닌, 중간 투입이었음에도.
그에게 쏟아지는 화살은 넘쳐났다.
“응, 이번 영화가 잘 안 되면, 강찬성이 다 뒤집어쓰게 생겼더라.”
평소 강찬성에게 좋은 감정이 없던 김 실장도 혀를 차며 안타깝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드라마나 영화 모두 그렇다.
잘 되면 좋은 분위기가 이어지지만.
성적이 나쁘면 그 화살은 주연 배우에게로 향하기 마련.
연예계뿐만이 아니다.
모든 일에 책임을 지는 건, 언제나 대외적으로 비춰지는 사람이다.
“그래도 아직 개봉하고 10일 정도밖에 안 됐으니까, 조금 기다려봐야 하는 거 아닌가?”
첫 주 누적 관객 수는 80만 명.
손익 분기점은 350만 명.
못 넘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흥행 실패라고 쏟아지는 기사들도 애써 외면하며 나는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김 실장은 단호하게 답했다.
“아니, 아침에 팀장님이랑 이야기했는데, 절대 안 될 거 같더라.”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회사에서 더 많은 경험을 한 팀장급에서 보다 정확히 판단을 내렸을 것이니까.
김 실장은 다이어리를 끄적이며 말을 이어갔다.
“보통 첫 주 관객 수 곱하기 2를 하는 게, 최종 관객 수라더라고.”
첫 주 관객 수는 80만 명.
거기에 2를 곱하면, 160만 명인 셈이다.
턱없이 부족한 숫자에 탄식을 내뱉었다.
“아….”
“3주 차 관객 수가 총 누적 관객 수의 90% 정도거든.”
추가로 설명을 붙이는 김 실장의 말에 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답했다.
“지금 상황으로 보면 기껏 해봐야… 한 200만 정도 나오겠네?”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사실, 영화라는 게 상영을 오래 해도 대충 사이즈 보면 나오긴 하니까.”
“하아.”
한숨 소리에 김 실장은 나를 달래듯 입을 열었다.
“주연일 때 망하면… 그때는 정말 받는 타격이 클 거야. 강찬성 봐. 난리 났잖아.”
“근데 메인은 최서빈이잖아.”
“그렇긴 한데, 강찬성 징크스 탓에 최서빈한테는 화살이 덜 갈 것 같더라.”
머리를 흔들며 드라마 대본을 끌어당겼다.
“드라마는 내가 주연인데, 드라마 연습이나 얼른 해야겠다.”
“그래. 촬영도 곧 시작할 텐데, 우리는 연습에 매진하자.”
조연이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맡았던 영화.
부진한 기록에 속상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홍보를 위해 프로그램에 나가는 것도 주연들의 몫이었고.
이미 영화의 성적은 결과까지 나오고 있었으니까.
좋은 경험을 했고.
이를 바탕으로 나는 더 나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눈앞에 닥친 드라마 주연.
이것이 지금 내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일이다.
***
웅성거리는 수많은 사람.
여러 조명이 밝게 빛났고.
벽에 붙은 여러 개의 전광판에는 상영 중인 영화 포스터가 LED 화면에 선명히 보였다.
진한 검정색의 긴 머리.
머릿결이 상했는지 부스스한 머리는 어두운색 덕에 더욱 차분해 보이지 않았다.
“포인트 적립하실까요?”
그녀에게 묻는 영화관 직원.
“네, 번호로 할게요.”
“예, 앞에 번호 입력해 주세요.”
띡띡.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키패드에 번호를 입력했고.
“정여진 고객님 맞으실까요?”
“네.”
딱딱하게 답하는 정여진은 매서운 눈으로 손에 들린 포스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직원은 그녀에게 영화표를 건네며 말했다.
“영화, 천재 영업 사원이 되었다. 4시 10분 영화고, B관에 E열 10번입니다. 즐거운 관람 되세요.”
활짝 웃으며 말하는 직원의 손에 들린 영화표를 휙 낚아챘고.
정여진은 상영관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영화 관람 시간을 기다리며 앉아 있는 정여진의 손에는 영화 포스터와 팝콘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팝콘을 우적우적 씹어 먹으며, 빤히 영화 포스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최서빈, 강찬성 그리고 진희성에게로 천천히 옮겨갔다.
‘잘생긴 애들 많이 나오네?’
“B관 천재 영업 사원이 되었다, 입장 가능하십니다!”
그녀는 직원의 목소리에 놀란 듯 몸을 움찔거렸고.
이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B관으로 향했다.
팟-.
커다란 스크린은 검정 화면으로 전환됐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기 시작하자 상영관의 조명이 하나둘 켜졌다.
정여진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상영관을 빠져나갔지만, 그녀는 자리에 앉아 엔딩 크레딧을 빤히 바라보았다.
쾅.
엔딩 크레딧까지 모두 올라가자 환하게 불이 켜지며 청소를 하기 위해 직원들이 상영관 안으로 들어왔고.
그제야 그녀는 자리에서 살며시 일어났다.
그런 그녀의 손에 꽉 쥐어져 있는 영화 포스터.
정여진은 영화관을 빠져나오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걔 이름이… 희성, 진희성이었지?”
흐뭇한 얼굴로 입꼬리를 올리는 그녀는 길을 걸으며 진희성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연신 헤실거렸다.
집에 도착한 정여진은 서둘러 노트북을 열어 진희성을 검색했다.
영화관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길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배우.
진희성의 얼굴은 정여진의 눈에 계속해서 아른거렸고.
그녀는 확신했다.
자신이 진희성의 팬이 되었다는 것을.
“진희성… X나 잘생겼는데?”
홀로 중얼거리며 진희성의 사진을 저장하기 시작했고.
이내 바탕 화면에는 진희성의 사진이 도배되었다.
정여진은 만족하다는 듯 진희성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부스스한 머리를 질끈 묶은 후, 무언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 움직였다.
‘진희성 나이’
‘진희성 키’
진희성에 관한 것들을 검색하던 그녀는 커다란 종이를 가져와 그와 관련된 내용을 적어 내려갔다.
간단한 프로필을 모두 적은 정여진은 마른침을 삼켰고.
프로필 외에 궁금한 것들을 조사하기 위해 팬 페이지를 뒤적였다.
“진희성… 뭘 좋아할까?”
그녀의 입꼬리는 귀에 걸릴 듯 찢어져 있었고.
발그레해진 볼을 손등으로 식혀내며 검색에 열중했다.
“어머, 우리 오빠는 사생활도 깨끗한가 보네?”
정여진은 혼잣말이 익숙한 듯 계속해서 진희성의 사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
정여진은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오래도록 진희성에 대해 조사했다.
그리고 뿌듯한 얼굴로 작게 읊조렸다.
“이제 나보다 희성 오빠를 잘 아는 사람은 없는 거 같은데?”
그녀의 한쪽 입술이 찢어졌고.
감았다 뜬 눈에는 살기가 어려 있었다.
“여자 친구 없다는 건, 진짜겠지?”
정여진은 다시 한번 눈을 희번덕거리며 입을 열었다.
“근데 희성 오빠 집이 어디지…?”
***
이제 영화관에서의 상영은 거의 막바지를 향해가고 있었다.
큰 영화관에서도 하루에 상영하는 영화는 단 두 번뿐.
그리고 가장 중요한 영화의 성적.
한 달이 넘도록 누적 관객 수는 200만을 넘지 못했고.
주연인 최서빈은 단 한 번도 손익 분기점을 못 넘긴 적이 없었기에.
불안한 마음이 컸는지, 홍보차 예능 프로그램에 많이 나갔다.
그가 이렇게까지 많은 프로그램에 나간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김 실장과 차에서 이동을 할 때마다, 라디오를 틀면 그가 출연하고 있었으니까.
그만큼 최서빈에게 쌓인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터.
반면, 강찬성은 어느샌가부터 조용해졌다.
최서빈과 함께 홍보차 돌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부터는 자취를 감췄다.
자신에게 쏟아진 화살을 눈치챘던 모양이다.
그렇게 막바지까지 젖 먹던 힘을 쥐어짠 최서빈의 힘으로 관객 수는 뒷심을 발휘했다.
아직 상영을 하고는 있지만.
이미 90%, 아니 99%의 지점까지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최종 누적 관객 수는 274만.
최서빈의 힘으로 많은 관객을 끌어 올렸지만.
손익 분기점인 350만을 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그 숫자에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나에게 오는 부담감이 사실 큰 편은 아니었다.
주연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같은 영화에 출연한 조연 배우였기에, 걱정스러운 마음과 부담감이 없을 수는 없었지.
그저 주연인 최서빈보다 덜했을 뿐.
몇 달을 고생했는데, 결국 마지막에 울고 웃게 되는 건 ‘숫자’였다.
274만이라는 숫자를 바라보며 착잡함을 느끼던 그때.
지이잉.
주머니에 있던 휴대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인: 최서빈 선배님]
최서빈에게서 온 전화에 화들짝 놀랐다.
그를 떠올리고 있었는데, 마치 텔레파시가 통했다는 듯이 울리는 전화.
“흠흠.”
착잡한 기분 탓에 잠겨 있던 목을 풀고 서둘러 수신 버튼을 눌렀다.
“네, 선배님.”
-어, 희성아 통화 가능해?
“당연하죠.”
-하아, 오늘 바쁘니?
그의 목소리에서는 나와 같은 마음이 느껴졌다.
아니, 나보다 더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
“아니요. 오늘은 별일 없습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안 바쁘면, 오늘 술 한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