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15 – 주연과 조연 그 사이 (3)
대본 리딩 후 곧장 이어진 회식.
회식은 그리 오랜 시간을 끌지 않았다.
대본 리딩을 하며 쏟아낸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서.
그리고 앞으로 함께 작업해야 할 배우들, 스태프들과 어색함을 풀기 위함이었기에.
가볍게 마신 술은 긴장했던 마음을 풀어주기에 충분했고.
그 덕에 회식은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텅 빈 집 안.
김 실장이 바래다주고 떠난 후.
홀로 빈집에 앉아 벽에 몸을 기대었다.
눈을 뜨자마자 집 밖으로 나섰고.
이후 한시도 조용한 적이 없었다.
스쳐갔던 많은 사람, 그리고 함께 대화를 나눴던 사람까지.
오늘도 바쁘고 정신없는 하루였지만, 그래서인지 더더욱 홀로 남아 있는 집이 고요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외롭거나 우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정적임 또한 그대로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한참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 조용함을 고스란히 즐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창밖에는 더 짙은 어두움이 깔렸고.
고개를 돌려 오롯이 그 어둠을 바라보던 그때.
순간 최서빈이 떠올랐다.
당장 이번 주에 개봉하는 영화.
벽에 걸린 동그란 시계로 시선을 옮겼고.
아직 잠을 자기에는 이른 시간.
지금 최서빈 역시 깨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바로 휴대 전화를 열어 최서빈에게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번의 신호가 울리기도 전에 그의 밝은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여보세요?
“선배님!”
-어, 희성아.
“통화 괜찮으세요?”
그의 주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홀로 어딘가에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당연하지. 무슨 일 있어?
늦은 밤에 걸려온 전화라 그런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요. 그냥 오랜만에 선배님 생각이 나서 안부차 전화 드렸습니다. 잘 지내시죠?”
흐뭇하다는 듯 웃는 최서빈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희성아, 고맙다.
“네?”
-이렇게 갑자기 생각난다고 안부 전화도 주고, 이런 후배 없다.
“에이, 선배님은 워낙 인기가 많으셔서, 저는 그저 많은 후배들 중 하나 아닙니까? 하하.”
-야, 아니야. 앞에서는 하하 호호 해도 이렇게 연락을 주는 후배들은 얼마 없어. 고맙다.
“제가 감사하죠. 뭐 하고 계셨습니까?”
그는 찌뿌둥한 몸을 풀어내듯 숨을 크게 내쉬며 답했다.
-그냥 집에서 쉬고 있었지. 너는?
“저는 조금 전에 집에 들어와서 가만히 쉬다가, 선배님 생각이 나서 연락드렸죠.”
최서빈은 쓰읍 소리를 내며 물었다.
-시간이 몇 신데 이제 들어갔어, 요즘 스케줄 있니?
“아, 네. 이번에 드라마 하나 들어가게 됐습니다.”
-오오, 무슨 드라마 들어갔어?
“이번에 KTS에서….”
한참이나 그에게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그는 자신의 일인 것처럼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어, 들어봤어. 이번에 8부작으로 들어가는, 그거 아니야?
“역시 선배님은 모르는 게 없으시네요. 맞습니다, 그 드라마.”
그가 아쉽다는 듯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아… 그거 조금 어려울 텐데, 나한테 미리 물어보지 그랬어.
드라마가 잘못됐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저 8부작이라는 특성이 아쉽다는 것일 뿐.
최서빈의 뜻을 이해한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제 첫 주연이잖습니까. 대본도 마음에 들었고, 주연 캐릭터도 좋아서. 경험도 쌓을 겸 시작했습니다.”
-잘했다. 어쨌든, 희성이 첫 주연 축하한다.
“하하,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리고 다음부터 고민되는 거 있으면, 서슴지 말고 언제든 편하게 물어봐.
단순한 말뿐일지는 몰라도, 연예계 톱 배우인 최서빈의 한마디는 내게 크게 와닿았다.
충분히 든든한 말이었다.
통화로 그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가 앞에 있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였다.
“챙겨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선배님.”
-에이, 챙겨주기는. 당연히 그래야지.
“그리고 저희 영화 이번 주에 개봉이지 않습니까.”
-맞아, 시간 참 빠르다.
“그러게요. 마지막 회식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입니다.”
-영화 개봉하고 나면 얼굴 보겠지만, 따로 술이나 한잔하자.
“언제든 콜입니다, 선배님.”
-그래, 조만간 연락할게.
“네!”
그와 전화를 끊은 후 다시 창밖을 바라보니.
까만 어둠 사이로 밝은 빛을 내는 달이 눈에 들어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며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하나둘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물론 아직 나아가야 할, 그리고 나아가고 싶은 자리는 너무도 많지만.
배우로서의 입지도, 배우들과의 관계도.
나는 흐뭇하게 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 개봉할 영화만 잘 되면 된다.
***
“희성아, 다 준비했지?”
김 실장이 내 손에 든 대본을 바라보며 물었다.
“응, 미리 체크 다 해뒀지.”
안전벨트를 채우며 그를 향해 이어 말했다.
“역시 주연이 다르긴 다르다.”
“왜?”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물었다.
“드라마 제작 들어가기 전에 이렇게 점검도 따로 하고 말이야. 주연은 드라마 들어가기 전부터 할 일이 확실히 많네.”
내 말에 김 실장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지. 근데 오늘 디렉팅하는 거, 주연이라고 해서 무조건 하는 거 아니야.”
“그럼?”
“이 드라마의 유 감독이 엄청나게 열정적으로 임하는 거지.”
“정말?”
나는 그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본 리딩 이후 김 실장을 통해 연락이 왔다고 한다.
촬영이 들어가기 전, 추가로 디렉팅을 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고 말이다.
당연히 주연이기에 이런 자리가 있다고 생각했지.
유 감독이 대본 리딩 날 자신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이 작품이 자신의 입봉작이라고.
그래서인지 그의 열정은 지금까지 함께 작업한 여느 감독들보다 유독 강한 것 같았다.
물론 모든 감독들도 그런 마음으로 임하겠지만.
유 감독의 다짐은 조금 더 특별한 것 같은 느낌.
인생의 첫 주연을 맡았다는 사실에, 항상 설레고 기대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는 만큼.
그 역시 입봉작에 많은 감정이 오고 갈 터.
유 감독의 그런 마음이 여실히 전해지면서 나는 재차 다짐했다.
이 작품에 나 또한 남다른 각오로 임하겠다고.
김 실장은 룸 미러로 그런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유 감독님도 그렇고, 작가님도 다들 신인이잖아. 그래서 유독 이 드라마… 모두 의욕이 장난 아니야.”
“그런 것 같더라. 나도 첫 주연이잖아.”
그는 내 말에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진짜 다 처음이네. 왠지 느낌이 좋다.”
한결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의 말에 숨을 길게 내쉬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휴대 전화를 열어 날짜를 확인했다.
“맞네!”
순간 내 말에 놀란 듯 김 실장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오늘 영화 ‘천재 영업 사원이 되었다’ 제작 발표회 날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는 내비게이션에 뜬 날짜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오늘이야.”
촬영에는 참여했지만, 영화 제작 발표회에 참석하지는 않는다.
제작 발표회엔 감독과 주연들만이 출연해도 충분하니까.
“이제 영화 개봉 임박했네.”
나는 입 밖으로 ‘개봉’이라는 말을 내뱉었고.
순간 심장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서의 첫 영화.
물론 그 전에 단역 배우나 엑스트라로 나온 적은 있지만.
이렇게 많은 신에 나오는 조연으로 출연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엔딩 크레딧에서 굳이 내 이름을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바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너무 걱정 마. 잘 될 거야.”
내가 떨고 있다는 걸 김 실장이 눈치챘는지.
그는 부드러운 어투로 나를 토닥이듯 말했다.
김 실장의 말에도 여전히 심장은 쿵쾅대고 있었고.
나는 심호흡을 하며 차분하려 애를 썼다.
그러다 창밖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잘 됐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조연 걸고 한 첫 영화니까.’
***
좌절에 빠진 어느 날….
상대방 마음의 소리가 귓가에 선명히 들려온다.
이대로라면 영업왕이 되는 건 순식간이다!
천재 영업 사원이 되기 위한 민지훈, 그 치열한 영업 사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천재 영업 사원이 되었다’
절찬 상영 중.
오늘도 들려오는 영화 광고 영상.
TV나 인터넷,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영화 광고를 볼 수 있었다.
벌써 영화가 개봉한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이야- 광고 진짜 많이 나온다.”
김 실장은 회사 휴게실에 있는 TV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
“하긴, 최서빈에 강찬….”
그는 강찬성의 이름을 말하기 싫었는지 말끝을 스스로 잘라냈다.
“맞지. 그래도 톱 배우들이 나오는데, 망하면 안 되니까 광고를 엄청나게 하겠지.”
내 말에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곧 김 실장이 휴대 전화를 열어 무언가를 검색하는 듯 보였다.
그러고는 잠시 뒤 쓰읍 소리를 내며 읊조리기 시작했다.
“근데 생각보다 스타트가 좀 저조하다.”
김 실장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도 알고 있었다.
영화의 관객 수가 적다는 것을.
영화에서 언제나 성공적인 성적을 거둔 최서빈이 있기에.
대부분의 관계자들과 스태프, 그리고 배우들까지도 안심하고 있던 부분이기는 했다.
드라마는 매 화의 시청률로 인기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일종의 성적표 같은 것이지.
하지만 영화는 그런 드라마와는 다르다.
개봉을 하고 상영관에서 막이 내릴 때까지.
그 모든 관객 수를 합산해 성적이 매겨진다.
그렇기에 그 성적 확인이, 굳이 끝까지 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다.
첫날 관객 수는 15만 명.
제작사에서 예상했던 추이와는 조금 비껴나간 숫자였다.
그리고 첫 주의 누적 관객 수는 80만 명.
많다고 할 수도 있는 숫자이지만.
사실상 이 80만 명이라는 숫자는 부족하기 그지없는 인원수였다.
물론 관객 수가 많은 것이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손익 분기점’이다.
그 손익 분기점을 넘어야 한다.
넘었다고 해서 성공적인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그 손익 분기점을 넘어서는 것이 기본인 것이지.
최서빈이 그동안 참여했던 작품은 모두 손익 분기점은 넘었다.
그렇기에 그가 배우로서 좋은 평가를 받아왔던 것이지.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김 실장을 향해 물었다.
“형, 손익 분기점이 350만이었지?”
그는 내 말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맞아.”
우리는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첫 주에 80만인데, 손익 분기점이 350만이라….”
초반 시세가 저조한 만큼 걱정이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김 실장은 애써 미소 지으며 걱정을 털어내듯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계속 광고를 때리고 있으니까, 조금씩 관객 수가 늘 거야.”
“그래야 할 텐데.”
“최서빈이 있으면 우선 흥행 보증 수표이기는 하니까. 조금 더 기다려보자.”
나는 불안한 기분이 엄습했고.
그 기운을 털어내려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하지만 눈앞에 아른거리는 350만이라는 커다란 숫자.
못 넘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