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69)화 (69/303)

69화 #15 – 주연과 조연 그 사이 (2)

“하필 그렇게 겹쳤네.”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하자, 김 실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위에서도 골치 아파하는 중이야.”

그는 검지를 뻗어 천장을 가리켰다.

위, 그러니까 높은 직책에서도 백영훈과 내가 동 시간대에 겹친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당연하다.

다른 회사도 아닌 같은 회사 식구끼리 시청률 경쟁을 한다는 것.

사실상 서로 파이 나눠 먹기나 다름없으니까.

그와 나, 둘 중 어느 쪽이 더 시청률이 높고 낮다고 해서 기분이 좋을 수만은 없을 터.

더군다나 백영훈이 HS 엔터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내게 들리던 말들.

바로 라이벌이었다.

그와 내 포지션이 비슷했고.

함께 성장해 나가는 중이었기에, 회사 내부에서도 우리 둘을 같은 선상에 놓고는 했다.

김 실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읊조렸다.

“이거 말로만 백영훈이랑 라이벌, 라이벌 했는데.”

허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옅게 올렸고.

“이러면 진짜로 라이벌 구도가 되겠는데?”

내 말에 김 실장 역시 공감하는 듯 입술을 당겼다.

“그러게. 영훈이랑 선의의 경쟁을 펼쳐 봐야겠네.”

김 실장의 말에 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떠오르는 그날의 장면.

드라마 결과 발표 날, 탕비실에서 내게 보였던 백영훈의 표정.

내가 떨어지고 자신이 드라마 주연에 붙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던 백영훈은 내게 사과 아닌 사과를 보냈다.

분명 미안하다는 말이었지만.

그의 입가와 눈빛에는 전혀 미안함이 없었고.

물론 나 대신 그가 주연을 따낸 것이 내게 미안할 것은 아니다.

내가 떨어졌다고 해서 백영훈보다 연기를 못했다는 게 증명되는 게 아니니까.

단지 그 드라마의 배역에 나보다 백영훈의 색깔이 더 잘 맞았을 뿐.

그저 같은 회사 식구니까 미안함을 표했던 것이고.

나는 그를 축하해주면 되는 것.

그뿐이다.

그런데 백영훈은 사과랍시고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으며, 옅게 입꼬리를 올렸다.

묘하게 느껴졌던 그의 얄미운 말투.

자신이 나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느끼고 그 상황을 즐기는 듯한.

그런 기운이 강하게 보였다.

나는 천천히 머리를 흔들며 목소리를 늘렸다.

“글쎄… 선의는 맞을까?”

작게 내뱉은 말에 김 실장은 놀란 얼굴로 내게 물었다.

“뭐야, 둘이 무슨 일 있었어?”

김 실장의 큰 목소리에 그제야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걱정할세라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야.”

“그럼?”

김 실장은 눈썹을 들썩이며 나를 바라보았고.

“아니, 그냥 뭐랄까… 좀 꺼림칙해.”

“백영훈이?”

“응.”

“영훈이 싹싹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에게 나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답했다.

“그렇지. 겉으로는 진짜 착해 보이고, 먼저 다가와서 사근사근하게 형이라 부르기는 하는데.”

어깨를 들썩이며 말을 이었다.

“근데 뭔가 거부감이 좀 드네.”

“이번 드라마 캐스팅 때문에 희성이 네가 예민해서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어.”

김 실장은 내 어깨를 툭툭 토닥이며 달래듯 입을 열었다.

“원래 싹싹하던 애니까 말이야.”

그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휘었다.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맞다. 드라마 캐스팅된 다른 배우들 목록.”

김 실장에게 종이를 건네받은 뒤, 서둘러 목록을 훑었다.

이내 내 시선은 한군데를 응시하며 멈췄다.

‘어… 얘가 여기 있네?’

입꼬리를 활짝 올렸다.

***

드라마 대본 리딩 날.

대본 리딩까지 오랜 시간을 대기하지는 않았다.

앞선 시대극 드라마가 밀리는 바람에 이 드라마의 모든 과정이 일사천리로 빠르게 돌아갔다.

그 덕에 연습 시간을 늘려 만반의 준비를 마쳤지.

“안녕하십니까!”

대본 리딩실 문을 열자 나를 살갑게 반기는 사람.

서인우였다.

그를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눈을 크게 떴다.

함께 오디션을 봤던 인물이자, 연기력이 출중한 신인 배우.

이 드라마에 내가 붙어 서인우가 떨어졌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 예상과는 달리 서인우가 활기찬 목소리로 나를 맞이했기에.

반갑다는 마음이 가장 먼저 든 것 같다.

“인우 씨.”

“선배님, 잘 지내셨죠? 하하.”

오래된 선후배 사이인 것처럼 우리는 살갑게 악수를 나눴다.

“그럼요. 같이 연기하게 되어서 너무 좋네요.”

그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제가 부족했는데, 감독님께서 잘 봐주셔서 조연으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인우 씨 연기력이 좋았어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더군다나 오디션 때, 선배님과 함께 호흡을 보여줬던 게 큰 덕이 된 것 같습니다.”

“하하, 저도 인우 씨랑 연기해서 너무 좋았어요.”

그때.

벌컥 열린 문으로 수려한 외모를 뽐내며 들어오는 한 사람.

신민영이었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긴 생머리에 커다란 눈동자.

오뚝한 콧대와 피부에서는 광이 나고 있었다.

신민영은 이미 드라마에서 주연을 자주 맡던 배우다.

작은 조연으로 얼굴을 알린 뒤.

뛰어난 연기력과 예쁘장한 얼굴로 인해 물밀듯이 광고를 찍었고.

그녀는 곧장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별 탈 없이 드라마 주연만을 도맡으며 평타 이상의 결과를 보여주었지.

신민영이 눈웃음을 지으며 모두를 향해 인사했다.

그리고 나와 서인우 앞으로 다가와 재차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희성 씨.”

“네, 반갑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그녀와는 초면이었다.

하지만 이미 TV를 통해 알고 있었고.

그녀 역시 나를 알고 있던 모양이다.

신민영은 활짝 웃으며 인사를 보낸 뒤, 서인우를 쓰윽 바라보았다.

“반가워요.”

“예, 저는 서인우라고 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의 당찬 목소리에 신민영이 눈썹을 들썩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누구 하나 모난 사람이 없는 이번 드라마 배우들.

모두 둥글둥글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더군다나 처음 만나는 대본 리딩실에서 견제의 눈빛 없이 활기차게 서로를 대하는 건, 처음 겪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일이라고는 하지만 확실히 배우들 간에 호흡이 좋으면 그게 TV에도 비춰질 터.

이 드라마, 왠지 느낌이 좋은데?

하나둘 리딩실에 도착해 자리에 착석하자, 유 감독이 입을 열었다.

“자, 대본 리딩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 인사부터 나눌까요?”

그러고는 말을 이어갔다.

“이미 따로 인사들 나눈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전체적으로 소개 한 번씩 하죠.”

“네.”

“우리 주연을 맡은 진희성 배우님부터….”

그는 내게 시선을 고정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임준기 역을 맡게 된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고개를 숙이자 박수가 터져 나왔고.

나는 숙였던 허리를 펴고 말을 이어갔다.

“처음 주연을 맡게 된 만큼 너무나도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잘되도록 힘쓰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내 말에 서인우가 자신의 양손을 입가로 가져가며 소리쳤다.

그의 반응에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고.

“촬영하면서 다들 잘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짝짝짝-.

다시 터져 나오는 손뼉 소리.

이후 차례로 인사를 이어갔다.

순서대로 인사를 마친 후, 드디어 찾아온 서인우의 차례.

서인우는 누구보다 활짝 웃는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언제나 준비된 신인 배우 서인우라고 합니다. 제가 감독님과 선배님들께 폐가 되지 않도록,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의 밝은 에너지는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고.

유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뼉을 부딪쳤다.

나 역시 서인우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첫인상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서인우는 동갑인 나와는 사뭇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발랄하고 애교가 많은 스타일.

그런 그가 굉장히 호감으로 다가왔다.

“흠흠.”

유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이번 드라마를 맡게 된 유준호 감독이라고 합니다.”

짝짝-.

“와아!”

그를 향한 탄성이 터져 나왔고.

유 감독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원래 엔터 쪽에서 오래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여러 갑질들로 인해… 어쨌든, 그렇게 언론 고시를 보고 감독의 길로 접어들었고.”

그는 자신의 일대기를 짧게 늘어놓았다.

감독이 된 그의 과정은 매우 신선했다.

엔터 쪽에서 일을 하다가 언론 고시를 봤다라….

그의 이야기가 꽤 흥미롭게 다가왔고.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그에게 집중했다.

“드디어 이 드라마로 입봉을 하게 됐고, 여러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이 드라마를 찍을 거고, 여러분에게도 좋은 드라마로 기억되게 하고 싶네요.”

우리는 그의 말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귀를 기울였다.

“앞으로 한마음 한뜻으로 잘 지내봅시다.”

“예.”

“그럼 박수로 소개 마무리하고, 바로 대본 리딩 시작할까요?”

“좋아요.”

어느새 창밖에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고.

기나긴 대본 리딩의 마지막 장이 덮였다.

“고생하셨습니다.”

배우들 간의 호흡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꽤 좋은 편이었다.

서민영은 이미 많은 작품에서 주연을 맡았던 만큼 연기력은 말할 것도 없었고.

무엇보다 서인우의 연기력.

오늘 한 번 더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오디션장에서 보았던 그의 연기는 감탄을 자아냈는데.

그 이후 더 많은 연습을 하고 왔다는 게 눈에 선명히 보일 정도였다.

나와 함께 연기하는 신이 생각보다 많았고.

그와의 호흡 또한 완벽했다.

마치 나와 연기를 여러 번 해봤던 사람처럼.

“딱 시간도 저녁인데, 우리 간단하게 식사하고 마무리할까요?”

유 감독이 시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고.

대부분의 배우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좋습니다.”

이후 일정이 없던 나도 유 감독을 향해 긍정의 미소를 보냈다.

***

대본 리딩실을 빠져나오자 몇몇 배우와 스태프는 일정으로 인해 참여하지 못했고.

유 감독과 나, 그리고 신민영과 서인우를 비롯한 조연 배우들이 자리에 참석했다.

그리고 어느새 서인우는 내 옆자리로 다가와 자리를 잡았다.

“선배님, 여기 앉아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딱딱한 말투가 아닌 밝고 애교 섞인 그의 목소리.

저건 노력으로 나오는 말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내 술잔을 채우며 입을 열었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에요. 인우 씨도 고생했어요. 제가 한 잔 드릴게요.”

“넵.”

그는 여전히 내게 깍듯하게 행동하였고.

우리는 그렇게 계속해서 술잔을 기울였다.

소주병이 쌓이고, 서인우는 발그레해진 볼로 내게 술잔을 채웠다.

“그래서 그 작품이 대박이었지 않습니까? 하하.”

“와아, 인우 씨도 그 작품 봤어요?”

“당연하죠. 저는 그거 세 번이나 봤습니다.”

순간 입을 떡 벌리며 입술을 움찔거렸다.

“그거 진짜 본 사람 몇 없는데. 저도 그 작품이 재밌어서 몇 번 봤거든요.”

“크으, 저희는 진짜 취향도 비슷하네요.”

많이 보지 않는 스타일의 작품까지.

나와 은근히 코드도 잘 맞는 듯한 느낌.

그를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휘었다.

왠지 배우 중에 몇 안 되는 친한 사람.

서인우가 내게 그런 존재가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물씬 들었다.

“그러게요. 인우 씨 저랑 작품 이야기하면 밤도 샐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하하.”

그는 활짝 웃으며 내게 답했다.

“맞습니다. 아, 그리고 선배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아….”

나와 서인우는 동갑.

내가 먼저 데뷔를 했다고 후배 노릇을 톡톡히 해주는 그였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말했다.

“그럴…까?”

“네, 그럼요.”

나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럼 인우도 나한테 말 편하게 해.”

“제가 어떻게….”

“뭐, 선배라고만 하면 되지. 나이도 동갑이고, 앞으로 계속 연기하느라 만날 텐데. 친하게 지내면 좋지.”

그는 눈치를 보듯 눈동자를 굴리더니 이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챙.

그리고 우리는 술잔을 세게 부딪쳤다.

술잔을 주고받으며 한층 더 가까워진 서인우와 나.

이제 말을 놓은 것도 어느새 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참, 희성 선배. 곧 영화 개봉하지 않아?”

그의 말에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맞아. 당장 이번 주에 개봉이야.”

“와아! 진짜 응원할게. 나오자마자 보러 가야겠다.”

“하하, 고마워.”

그리고 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초점을 흐렸다.

영화… 잘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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