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만 년 동안 살아온 배우님 (68)화 (68/303)

68화 #15 – 주연과 조연 그 사이 (1)

서인우는 내 눈을 피하지 않았고.

그의 눈에는 살기가 어려 있었다.

근래에 봤던 오디션 중 상대 배역의 연기가 가장 압도적인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서인우를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외쳤다.

“땅바닥 인생이라….”

조소를 흩날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걸 스스로도 알고 있다니, 유감이네.”

서인우는 곧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연기인 것을 알지만.

실감 나는 떨림에 심사석에 앉은 감독과 작가는 입을 떡 벌렸다.

“네가 그러고도 위로 오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서인우는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고.

나는 입꼬리를 조금 더 휘었다.

그리고 턱을 치켜들어 내리깐 눈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어, 난 네놈이랑 다르거든.”

확신에 가득 찬 얼굴.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흐르는 감정을 쏟아내듯 입을 열었다.

“결국, 꼭대기에 오르는 건 나야.”

내 말에 서인우는 거친 숨을 내뱉었고.

그런 서인우를 향해.

“어디 한번 발버둥 쳐보라고.”

노련하게 맞받아쳤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선을 주고받았고.

그 팽팽한 긴장감은 마치 이곳이 오디션장이 아닌, 차디찬 사회 한복판 같았다.

허공에서 부딪치는 눈빛 사이에는 스파크가 튀었고.

잠시 흐르는 정적.

나와 서인우, 그 누구도 먼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짝짝-.

몇 초가 흘렀을까.

손뼉을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그와 나는 불타오르던 시선을 거둬냈다.

세차게 손뼉을 부딪치고 있던 사람은 드라마의 감독인 유준호였다.

유 감독은 흡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린 채 연신 박수를 쳤고.

옆에 앉은 엄지인 작가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보였다.

잦아드는 박수 소리.

유 감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두 분 혹시 원래 알던 사이신가요?”

그의 말에 동시에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럼과 동시에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내 말에 서인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맞습니다. 저희 오늘 초면입니다.”

대답을 들은 유 감독은 아랫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볼펜으로 종이에 무언가를 써내려갔다.

“그런데 진희성 배우님 연기가… 정말 좋네요.”

끄적이던 펜을 내려놓은 유 감독이 나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고.

나는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그는 감탄을 자아내며 오른손 엄지를 살짝 치켜들었다.

“지난 작품 한 거 보기는 했는데. 왜 HS 엔터에 있는지 알겠네요.”

유 감독은 시선을 서인우에게로 옮겼고.

또 한 번 그의 고개가 움찔거렸다.

“그리고… 서인우 배우님은 프로필 보니까 조연으로도 출연하신 작품은 없으시네요?”

“예, 그렇지만 믿고 맡겨 주신다면 잘 해낼 자신 있습니다!”

당찬 포부.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내심 응원을 하고 있었다.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신인인데도 오디션장에서 기죽지 않고 답하는 모습.

거기에 뒷받침해 주는 연기력까지.

흠잡을 곳이 없어 보였으니까.

서인우의 말에 유 감독은 옅은 미소를 보였고.

이후 드라마에 관한 질문을 묻기 시작했다.

“그럼, 결과는 추후에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유 감독은 마무리 인사를 내뱉었고.

옆에 앉은 엄 작가는 부드러운 미소를 뿜어내며 말했다.

“오늘 두 분 연기 너무 잘 봤습니다. 앞으로도 응원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나와 서인우는 허리를 접어 그들에게 인사를 보낸 뒤.

오디션장을 빠져나왔다.

철컥.

문이 닫히자마자 서인우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내게 소리쳤다.

“와아! 제가 선배님과 연기 호흡을 맞춰보다니… 영광입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뼉을 부딪쳤다.

나는 서둘러 그를 향해 손사래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서인우 배우님이야말로 연기를 정말 잘하시던데요?”

그러자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극찬이십니다.”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선배님 덕에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는 말끝마다 ‘선배님’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동갑인 나이에 꼬박꼬박 선배님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잘못된 것은 아니었지만 괜스레 낯간지러운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더군다나 그는 극진한 선배를 모시듯 몸을 아래로 숙이고 있었다.

“동갑인데, 이렇게 계속 고개 숙이실 필요는 없어요.”

“하하, 그래도… 어쨌든 선배님은 꼭 붙으실 거 같아요. 연기가 아주….”

그는 엄지를 치켜들었고.

오디션장에서 배역에 몰입해 서늘한 느낌이 들 정도였던 그의 이미지는 완전히 사라졌다.

다시금 오디션장으로 들어가기 전의 발랄하던 서인우로 돌아온 느낌 이랄까.

그의 모습을 통해 다시 한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서인우가 연기를 정말 잘한다는 것을.

그리고 불과 몇 달 전, 내 모습이 떠올랐다.

첫 오디션 때, 그리고 조연을 따내기 전에 서인우와 비슷했을까?

왠지 모르게 그의 행보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서인우와 나는 오디션장을 함께 빠져나오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앞으로 자주 뵐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서인우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입을 벌렸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꼭 선배님과 연기해보고 싶어요.”

앞으로 그와 인연이 또 닿을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번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다른 작품에서라도 서인우를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금세 헤어질 타이밍이 다가왔고.

서인우는 쭈뼛대며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저 혹시….”

그의 작은 목소리에 내가 눈을 찡긋거리자, 서인우가 내 쪽으로 휴대 전화를 내밀었다.

“전화번호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당차게 내민 휴대 전화와는 달리, 그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사실 무명 배우들에게는 번호를 준 적이 없었다.

조금 친분을 쌓은 후 번호를 주고받아도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서인우에게는 왠지 모를 직감을 느꼈다.

머지않아 배우 신 높은 곳에서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

그래서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인우의 휴대 전화를 받아 들었다.

“하하, 그럼요. 앞으로 또 봐요.”

“네!”

번호를 찍고 있던 도중.

“희성아!”

저 멀리서 김 실장이 손을 높이 뻗어 흔들고 있었다.

“어, 형. 갈게.”

김 실장을 향해 외친 후.

서인우의 휴대 전화에 서둘러 번호를 찍었다.

“다음에 또 봐요, 서인우 배우님.”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서로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 뒤.

각자 뒤를 돌았다.

김 실장을 향해 걸어가던 발길을 멈춰 세우고 고개를 돌렸다.

서인우 역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다시금 눈인사를 보냈다.

그리고 느껴지는 그의 눈빛.

매니저인 김 실장이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흠씬 부럽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건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 또한 저 위치에 있을 때, 그랬으니까.

단지 교통수단의 느낌이 아니다.

그저 소속된 회사가 있다는 것.

그리고 나를 케어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내 뒤에 든든하게 받쳐주는 회사가 있다는 것.

그게 부러운 거니까.

차에 올라타자 김 실장이 내게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희성아, 어땠어?”

“음… 연습한 대로 한 거 같기는 한데.”

“에이- 그럼 무조건이네.”

김 실장이 룸 미러를 통해 나를 바라보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말끝을 흐리는 내게 김 실장이 턱을 치켜들며 답했다.

“아까 나도 대기실에 가 있었거든?”

그의 말에 나는 몸을 일으켜 경청했다.

“근데 쭉 지켜보니까, 될 사람은 희성이 너밖에 없는 것 같더라.”

진지하게 말하는 김 실장의 말에서는 진심이 묻어났다.

혹여나 나를 안심시켜 주려는 말일지라도, 듣기에는 충분히 좋았다.

그 한마디의 말로 오디션에서의 떨림이 진정되기는 했으니까.

“그래?”

“응,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네가 제일 낫더라.”

그제야 김 실장은 입꼬리를 씨익 올렸고.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근데 아까 같이 있던 사람은 누구야?”

“아, 나랑 2인 1조로 같이 들어갔던 배우 서인우라고. 나랑 동갑이더라.”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던데?”

“맞아. 신인 배우래. 근데 형, 걔 연기 잘하더라.”

“그래?”

김 실장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오디션장에서 했던 그와의 연기를 떠올렸다.

***

오디션이 끝난 후 며칠이 지났고.

나는 여전히 연습실에 상주 중이었다.

오디션 결과가 나올 때까지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오디션을 봤던 드라마에 캐스팅이 될 수도 있기에 연습도 해야 하고.

혹시나 캐스팅에서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오래 좌절하지 않게 다음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을 지내고 있어야 한다.

대본을 읽고 있던 그때.

갑자기.

쿵쿵쿵-.

연습실로 다가오는 거센 발소리.

누군가가 세차게 달려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멀리 보이는 실루엣은 김 실장의 모습 같았고.

역시나, 김 실장이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형!”

문을 벌컥 열어 그를 맞이하자 가쁜 숨을 몰아 내쉬기 바빴다.

“하아… 하아.”

“무슨 일인데?”

“너… 그 드라마….”

김 실장은 말끝이 뚝뚝 끊기도록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고.

그 템포에 내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드라마…?

뒷말을 듣기 위해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고.

“형, 천천히, 차분하게 말해봐. 드라마 뭐라고?”

내 말에 김 실장은 허리를 쫙 펴더니 침을 크게 삼켜냈다.

“드라마, 됐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캐스팅됐어, 희성이 너 주연이야!”

“아악!”

기쁨의 포효를 내질렀다.

김 실장은 그제야 차분해진 숨소리로 나를 바라보며 양 입꼬리를 휘었다.

“KTS 미니시리즈 주연 됐어. 진짜 축하한다.”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내가… 공중파의 주연 자리를 꿰찼다니.

내 인생에서 맡는 미니시리즈의 첫 주연.

온몸이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에 하늘을 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벅차오르는 가슴은 작은 몸뚱어리에 담고 있기가 힘들 정도.

터져 나오려는 함성을 겨우 삼켜냈다.

“고마워, 형.”

“이제 주연 라인을 타기 시작하면, 앞으로 캐스팅도 주연 역할로 들어올 거야.”

김 실장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큰 드라마나 영화라면 주연급 조연 정도는 들어올 테니까. 이제 열심히만 하자.”

“그럴게.”

이제 모든 건 내게 달렸다.

이전에도 노력을 안 하거나, 덜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주연을 맡은 이상 내가 드라마를 끌어야 한다는 것.

그 말인즉, 드라마가 망쳐도 주연인 내게로 화살이 쏟아진다는 말이다.

주연의 기쁨이 온몸을 감싸 안았지만.

그만큼 부담감 역시 어깨 위에 무겁게 자리 잡았다.

배우 생활에서의 주연.

이제 그 층까지 계단을 오른 것이다.

아직 올라야 할 층수는 어마어마하다.

오르고 더 올라야 한다.

내 배우 생활은 이제 시작이니까.

김 실장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자리에 앉았다.

“희성아,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

“문제라고?”

그의 말에 뜨겁던 가슴은 찬물을 부은 듯 차갑게 식어갔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응, 우리 들어갈 드라마랑 저번에 오디션 봤던 드라마….”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입을 열었다.

“그 백영훈이 들어간 거?”

“어, 영훈이가 들어간 드라마가 MBS 방송사거든.”

“그런데?”

김 실장이 입술을 샐쭉 내밀며 답했다.

“우리랑 같은 시간대야.”

“…….”

김 실장의 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

하필.

하고많은 요일과 시간대가 있는데 이렇게 겹칠 줄이야.

눈살을 찌푸리며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백영훈이랑 시청률 경쟁을 해야 하는 거지?”

내 말에 김 실장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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