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14 – 인정받는다는 것 (6)
대본을 고르는 데는 그리 오랜 기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니, 오랜 시간이 걸리기는 했다.
그저 잠을 줄여가며 읽었기에 기간이 짧게 걸린 것이긴 하지.
생각보다 괜찮은 대본들이 많았다.
당연히 이것들보다 더 상업적으로 성공할 만한 대본들이 있다는 뜻이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해서 읽은 30여 개의 대본 중, 내 마음을 확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단 한 개의 대본.
그 대본을 읽는 순간 단숨에 읽을 정도로 몰입감이 강했고.
더군다나 그 대본에서 나오는 역할을 누구보다 잘 소화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심이 드는 순간.
바로 김 실장에게 대본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그는 못 말린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진짜 여기에 있는 작품으로 해보고 싶은 거야?”
“응, 분명 찾은 거 같아.”
김 실장은 내가 건넨 대본을 빤히 바라보며 작게 읊조렸다.
“그래, 이게 진흙 속의 진주여야 할 텐데….”
그는 눈을 부릅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제일 중요한 게 있어. 이 대본이 제작이 되느냐가 문제인 거지.”
“응, 좀 알아봐줘.”
“알겠어. 대신 제작이 안 되면, 당연히 바로 마음은 접어야 한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당연하지.”
***
“희성아!”
김 실장이 연습실 문을 노크도 없이 벌컥 열었다.
그러고는 내 앞으로 다가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일 있어?”
“네가 알아봐 달라던 대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에게 물었다.
“제작한대?”
내 말에 그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떨려왔다.
“어, 제작이 되기는 하는데.”
“그런데?”
김 실장은 말끝을 흐렸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히 작가는 신인 작가고, 감독도 신인 감독이 맡을 거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모전에서 겨우 입상한 작품이기에 좋은 감독이 붙지는 않을 거라 예상은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결국 신인 감독이 맡게 된 모양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는지, 김 실장은 쓰읍 소리를 내며 말을 이어갔다.
“거기다가 땜빵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김 실장이 입술을 말아 넣으며 한숨을 삼켜냈다.
그러고는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원래 KTS에서 제작하기로 했던 시대극이 있거든. 근데 그 드라마 주연이 부상을 당했대.”
“그럼 그 드라마 자리에 들어가는 건가?”
“음… 그렇긴 한데. 그 방영이 완전히 밀린 게 아니라, 한 달 정도만 밀렸어.”
김 실장은 탁상 달력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그 밀린 자리를 채우는, 8화짜리 드라마가 들어가는 거지.”
그의 말에 다시 대본을 바라보았다.
내가 본 대본은 16부작으로 기획된 드라마.
하지만 8화가 빈 곳에 대체되어 들어간다면,
당연히 이 드라마의 시놉시스와 스토리 라인이 전체적으로 절반인 8회로 확 줄어든다는 뜻.
김 실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본을 툭툭 쳤다.
“이게 8화. 그러니까 완전 절반으로 뚝 줄어드는 거야.”
아닌 것 같다는 그의 태도.
하지만 나는 오히려 좋다고 생각했다.
“형, 이 대본이 속도감이 있어야 하는 내용이거든. 그래서 더 좋은 기회 같은데?”
환하게 웃는 내 모습에 김 실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기분이 나쁜 게 아닌,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놀란 얼굴.
그는 아래턱을 벌린 채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니, 희성아. 진짜로 하겠다고?”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김 실장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양팔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희성아, 이건 주연이라고도 안 쳐줄 거야. 한마디로 반쪽짜리 주연인 거지.”
자신의 턱을 괸 채로 나를 바라보며 설득하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그냥 주연급 조연 취급만 받을 거야. 그래도 하고 싶어?”
김 실장의 말에 잠시 고민할 것도 없었다.
이미 내 마음은 확고했으니까.
“응, 하고 싶어.”
한 치도 물러섬도 없어 보이자, 김 실장은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잠시 허공에서 눈빛을 주고받았고.
각자 소리 없는 설득을 펼치는 듯했다.
그리고 이내 김 실장의 시선이 떨궈졌고.
그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알겠어. 그러면… 이건 윗선과 회의 좀 해볼게.”
***
김 실장이 돌아오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몇 번이고 대본을 다시 읽을 때까지 연습실에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한참이나 나타나지 않는 그의 모습에.
나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무나 하고 싶은 작품이어도, 회사에서 반대할 경우 오디션조차 보지 못할 테니까.
아직 내 위치는 그러했다.
내가 하고 싶은 작품, 내가 하기 싫은 작품이 무엇인지 의견을 낼 수는 있지만.
그대로 반영이 되지는 않는다.
윗선을 거쳐야 할 테니까.
특히나 윗선에서는 돈이 되는 작품, 유명해질 작품을 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와 같은 입장보다는, 김 실장과 같은 생각일 거라는 예상이 들었고.
그럼에도 ‘혹시’라는 단어 하나로 김 실장을 기다렸다.
연달아 읽은 대본에 글씨가 점점 눈에 들어오지 않기 시작했고.
밖이 점차 어두워질 무렵.
연습실 쪽으로 걸어오는 발걸음이 들려왔다.
꽤 경쾌하지만은 않은 발걸음.
설마 까인 건가?
내 시선은 문에 고정됐고.
곧장 그 시선 안에 김 실장이 들어왔다.
그의 표정은 어둡지도, 그렇다고 밝지만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를 반겼다.
“형!”
김 실장은 옅은 미소를 보이며 맞은편에 착석했다.
“희성아, 이야기 방금 끝났는데….”
“어떻게 됐어?”
그의 말을 자를 수밖에 없었다.
눈을 힘껏 뜨고 그를 바라보았고.
김 실장은 간절한 듯한 내 표정에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이 작품이 엄청 하고 싶구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광대가 올라갔다.
“이 작품, 하자.”
“와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직 작품 캐스팅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오디션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설렜다.
김 실장의 말처럼 윗선에서도 말릴 줄 알았으니까.
곧 그는 얼굴에 있던 웃음기를 없애며 다이어리를 펼쳤다.
“이 작품에서는 무조건 주연으로 가야 해.”
“응.”
“그리고 KTS랑 OTT 플랫폼에서 투자하는 거고. 재방송은 시티즌이 독점할 거야.”
그의 말을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KTS에서도 방영하기는 하는 거지?”
“응, 그 시대극이 밀린 방영 시간으로 들어갈 테니까.”
김 실장은 쓰읍, 소리를 내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주연이기는 하니까. 조건이 좋기는 한데.”
여전히 아쉬운 부분이 남았는지 그는 입술을 움찔거렸다.
“근데 땜빵이라는 건, 이미 네티즌들도 파다하게 알고 있어서 그리 성적이 좋지는 않을 거야.”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는 내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 게다가 신인 작가에 신인 감독인 것도 문제지.”
“아….”
“땜빵이라는 인식도 생각보다 클 거야.”
김 실장은 내가 이 드라마에 출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자신의 연예인이 맡은 첫 주연 작품이 애초부터 성적이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라 싫었을 터.
당연히 더 좋은 작품에 들어갔으면 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런 그의 마음을 나 역시 충분히 느꼈기에.
오히려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너무나도 끌렸고.
꼭 하고 싶은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턱을 어루만지며 고민에 빠진 김 실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형.”
“응?”
“근데 내 첫 주연작이잖아.”
그는 내 말에 눈썹을 들썩였다.
“그러니까, 그래서 더 좋은 작품으로 시작했으면 하는 거지.”
김 실장의 마음을 충분히 알고 있기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첫 주연 작품은 내가 정하고 싶어.”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김 실장의 말에 나는 활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그는 손가락을 허공에 뻗으며 말을 이어갔다.
“대신 이거 안 되면, 다음 작품은 회사에서 정해주는 대로 하는 거다?”
“그럴게.”
***
또다시 찾아온 오디션.
지난번 오디션보다 규모는 훨씬 작았지만.
떨리는 마음은 이전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김 실장과 다른 의견으로 하게 된 작품.
거기에 내 미니시리즈의 첫 주연이 될 수도 있는 작품이기에.
심장은 평소보다 더 떨려왔다.
쿵쾅대는 심장은 터질 듯했고.
대사를 복기하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후우, 하아….”
천천히, 그리고 길게 내뱉은 호흡.
점차 안정을 찾기 시작했고.
그때 귀에 들려오는 커다란 웃음소리.
“하하! 긴장하지 마세요. 긴장하면 연습만큼 나오지도 않는다니까요?”
그 목소리에 감고 있던 눈이 번뜩 떠졌고.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한 남성이 대기하고 있는 배우에게 활짝 웃으며 말을 거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의 표정과 말투에서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초면이라는 것을.
나는 그를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긴장도 안 하고, 넉살도 좋네.
오디션장에서 처음 보는 유형의 배우였다.
오디션장은 모든 배우들이 긴장을 하는 곳이다.
차이는 누가 더 긴장하고, 덜 긴장했냐는 것뿐.
모든 이들이 떨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말을 걸고 긴장을 풀라니.
그 모습이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다.
따스한 인상과 밝은 목소리.
그저 성격이 좋아 보이는 배우였다.
그를 바라보던 순간 눈이 마주쳤고.
아니나 다를까, 그는 곧장 내게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그는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손을 내밀었다.
“저는 서인우라고 해요.”
“예, 저는 진희성입니다.”
“알아요.”
서인우의 말에 눈썹을 들썩이자, 그가 입을 열었다.
“작품 잘 봤어요.”
“감사해요.”
그는 자신의 나이와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고.
짧은 사이, 그에 대해 알게 된 점이 너무나도 많아졌다.
나와 동갑이라는 것.
신인 배우라는 것.
오디션을 처음 본다는 것.
서인우가 자신의 이야기를 내게 쏟아내자,
나 역시 나이와 내 이야기를 짧게 답했다.
처음 본 사람과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그렇게 순식간에 그와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다음 들어가실게요.”
그렇게 서인우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오디션 차례가 다가왔고.
오디션은 2인 1조로 이루어졌다.
하필 나와 서인우가 한 조를 이루게 되었다.
그와 대기하는 내내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함께 오디션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놀라기는 했지만.
그 사실이 긴장감을 조성하지는 않았다.
서인우와 나의 길은 다르기 때문에.
“안녕하십니까, 진희성이라고 합니다.”
짧은 인사를 끝으로, 심사석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고정됐다.
“그럼 진희성 님부터 대사 시작해 볼게요.”
“네.”
눈을 감고 숨을 길게 마시다가 내뱉었다.
그리고 감았던 눈을 떠 서인우를 바라보았다.
그와 눈을 맞추며 빠르게 몰입했고.
마른침을 삼켜낸 후,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렇게 나왔으면 안 됐지.”
내 입꼬리는 순식간에 휘었고.
한쪽 눈을 살짝 찡긋거리며 대사를 이어갔다.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건, 그쪽이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내 대사에 순식간에 고요해진 오디션장.
모든 이들이 내 말투와 표정에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평가지에 매겨지는 점수.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서인우를 쏘아보았다.
서인우는 허공으로 눈을 돌리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그쪽이라. 그럼 대체 내가 어떻게 나왔어야 하는 건데?”
순간.
서인우의 대사에 온몸이 움찔거렸다.
한쪽으로 길게 찢어지는 입꼬리.
여유로운 듯한 시선 처리.
나는 곧장 미간을 찌푸리고 그의 다음 대사에 집중했다.
“왜, 땅바닥 인생은 그렇게 살면 안 돼?!”
소리치는 그의 말에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뭐야, 이 자식.
목소리 톤, 연기력.
거기에 흡입력까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나는 서인우를 빤히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서인우, 신인 맞아?